섹스, 가장 원초적인 연극
섹스, 가장 원초적인 연극
by 이정미
Article _ sex
인간의 지식체계는 크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선언적 지식이다.
선언적 지식은 1+1= 2라는 덧셈 법칙을 아는 것처럼 명확하고 설명이 가능한 지식이다.
이는 언어를 통하여 표현될 수 있고, 의식적인 과정을 거쳐서 성취할 수 있다. 주입식 교육을 통하여 터득한 지식 대부분은 선언적 지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두 번째는 절차적 지식이다.
절차적 지식은 운전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것처럼 행동으로 나타낼 수는 있지만 그것에 대한 학습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말로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는 암묵적인 지식이다.
첨언을 하자면, 흔히 "체득”을 통하여 얻게 되는 것들이 이에 해당하는 것 같다.
세 번째는 조건적 지식이다.
조건적 지식은 이러한 선언적 지식과 절차적 지식을 언제, 어떻게, 어디에서 사용할 것인지에 대하여 말해준다.
‘섹스를 잘 안다’라는 문장은 어디인지 모르게 어색한 것에 비하여 ‘섹스를 잘한다’라는 명제가 별문제 없이 통용되는 것을 보았을 때,(통용된다고 하였지, 반박당하지 않는다고 하지는 않았다.) 섹스에 대한 지식체계는 절차적인 부분에 많이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지식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난감한 것 같기도 하다.
SEX라는 것은 굳이 학습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 아닌가?
어떤 이들은 섹스 또한 섭식이나 배설과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어린아이가 젖을 빠는 방법을 아는 것과 같이 당연한 것.
그러나 우리가 접하는 수많은 매체가 있는 한, 어떠한 종류의 체위들이 단순하게 ‘발견’된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이는 분명히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들이라는 점을 간과하고 싶지 않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섹스라는 것은 그 목적이 분명히 원초적이지만, 그 모든 과정이 인지적인 체계 안에 포섭되는 한,(즉,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아주 연극적인 것 같다.
섹스를 하겠다는 의사결정이 이루어지고 나서 이어지는 모든 행동은 감각적인 제스처를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지극히 전략적이다.
어떤 속옷을 입을 것 인지에서부터 어떤 향수를 뿌릴 것인지, 샤워를 할 것인지, 하다못해 애무의 종류부터 사정하기까지의 지속시간까지도(유감스럽게도 의지를 통하여 조절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것도 안다.) 모두 찰나의 계산과 이어지는 판단 속에서 이루어진다.
심지어는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흥분을 가져다준다는 작은 엇나감까지도 모두 상정할 수 있지 않은가?
완전히 예상에서 엇나간 것들이 로맨틱함을 선사한다고 믿고 싶지는 않다. 조금도 계산되지 않은 섹스는 강간에 준할 뿐이다.
섹스를 하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물론 그 행위 자체가 주는 즐거움을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 모든 과정이 팔 할, 아니 칠 할만 들어맞는다고 하여도 그것만큼 로맨틱하고 만족스러운 쾌락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섹스관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비단 원나잇 스탠드를 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인과 섹스하는 것조차 어느 정도 무신경해져 달라고 요구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극본과 그쪽이 가지고 있는 극본이 처음부터 일치할 수는 없다.
엇나가는 지점은 쾌락과 상관없는 불필요한 마찰음을 빚어낸다.
우리는 작은 소음을 용납할 수 있을 만큼의 무신경함이 필요한 것이다.
같은 곡을 같은 악기로 연주한다고 하여도 연주자마다의 느낌이 다르듯이 같은 체위를 취한다고 하여도 그것이 똑 같지만은 않다.
물론 물리적인 부분에서 빚어내는 차이도 관여한다.
사이즈, 테크닉,그 어떠한 요소들도 행위의 미묘한 변화를 빚어내는 요소라고 할 수 있으나 가장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작은 습관이다.
그 습관들은 저마다 가지고 있는 섹스의 플롯이다.
누군가는 정상 위 一 여성 상위 一 후배 위에 걸쳐진 단계를 모두 거쳐야만 사정하려고 들었고, 누군가는 후배위에서는 내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고, 누군가는 자기 손가락을 입술에 물리려고 하였다.
그는, 그리고 나는 이제 친구의 역할뿐 아니라 다른 배역도 맡아야 할 것이다.
협소한 마켓에 우리를 전시하고 잠시 동물이 되었다가 내 몸 전체가 성기가 되어버린 듯 성기만 있는 듯 섹스를 하고,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정액을 삼키기도 하고, 그러고는 살짝 인간이 되었다가, 상대가 동물이 되는 것은 용서할 수 있지만 본인이 동물이 되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를 감수하고 또 다른 사랑을, 나를 인정해줄 사람을 찾아 세이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을 절대 그만두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벌써 피로감이 몰려온다.
김봉곤, 「Auto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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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요구를 어디까지 들어줄 수 있는가의 문제는 상대방을 향한 감정의 무게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누군가에게는 절대로 하지 않았을 어떠한 행동들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가 너를 이만큼 생각하고 있다’라는 비겁한 징표로써 이용되었다.
구강 섹스만을 통해 사정을 끌어내고, 구태여 무릎을 꿇고 애무하거나 정액을 삼키는 행위는 다분히 전시적( 展示的)인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모종의 행위를 통하여 가장 낮은 지점에 있는, 혹은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욕구를 채우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때 일종의 굴욕감이 느껴진다면 더는 사랑하지 않음을 확증하고서 하였고, 아직도 그렇게 역겹지 않다면 더 지속해 볼 만한 감정이라는 판단을 내리고 한다.
섹스의 원래 목적은 어디로 갔는지 우스울 지경이다.
가끔은 꽤 비슷한 틀 안에서 반복되고 있는 ‘절차’에 그들이 질리면 어떡하나 고민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익숙한 것들이 좋다. 과정이 변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주는 만족감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리드를 잘해주는 것과는 별개로, 나 또한 잘하는 것(?)을 하고 싶다.
그의 플롯 안에서 움직일 때 떠오르는 끊임없는 걱정들, (이럴 테면, 이런 식으로 하는 게 아닌가? 내가 잘하고 있나?) 편안하고 익숙한 것들 속에서는 안정감을 느낄 수 있고, 그 안정감이 성적인 긴장감의 나태와 직결되는 것이 아님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쓸데없이 새로운 것을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들고 오지는 않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몸에서 체득한 것들은 익숙한 편안함과 집중력을 선사하고, 행위에 더욱 집중할 수 있도록 해준다.
혹자는 그가 가지고 있는 판타지나, 하나씩 드러내는 섹스 습관들이 나한테 버거운 것들이면 어쩌나 싶기도 하다.
물론 버거운 것은 그의 하드코어적 취향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인 경우가 더 많을 것 같다.
이전의 그녀들과 어떠한 방식의 섹스를 하였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지만 자연스럽게 알게 될 때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난감해지기도 한다.
물론 그러한 것들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도, 추궁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조금 당황스러운 순간들이기는 하지만 어떠한 의미에서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미묘한 패턴을 알게 되는 순간을 조금 더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나 또한 누군가와 공유하였던 모든 패턴에 저마다의 애정을 품고 있고(물론 어떠한 개XX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이기적이었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는다.), 내가 가지고 있는 플롯을 누군가에게 맞추어가는 시간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