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태전 - 1장 초간택

교태전 - 1장 초간택

M 망가조아 0 2772

교태전 - 1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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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장. 초간택






금혼령이 내려졌다.


금혼령이란 무엇인가. 국왕의 비, 즉 왕비를 뽑는 절차를 가리켜 간택이라고 하는데 그 간택을 위해 전국의 사대부가의 모든 처녀의 혼인을 금지하는 어명이 내려지는 것을 금혼령이라고 했다.




일단 금혼령이 반포되면 전국에 있는 사대부가의 딸들은 그 누구든지 혼인이 금지되었다.


동시에 사주단자를 올리게 되어 있는데 물론 여기에도 예외는 있었다.




사주단자를 올리지 못하는, 즉 왕비의 자격이 없는 경우는 첫 번째로 성이 이 씨인 경우였다.


왕의 성씨가 ‘이 씨’이니 당연히 왕비가 될 처녀는 이씨 성을 쓰는 처녀는 불가했다.




두 번째로 사주단자를 올리지 못하는 경우는 처녀가 대왕대비와 동성으로 5촌 이내의 관계일 경우였다.




세 번째로는 왕대비와 동성으로 7촌 안에 해당하는 경우도 제외되었다.




그리고 네 번째로 양친 중 어느 한쪽이라도 없는 처녀도 역시 제외되었다.


홀어미나 홀아비의 슬하에서 자란 처녀의 경우에는 자격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렇게 네 가지의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사대부가의 딸들은 간택이 시작되면 생년월일과 조상들의 이름과 살아 있을 때의 관직을 적은 사주단자를 올려야만 했다.




간택은 모두 세 번의 과정을 거치는 탓에 삼간택으로 불렸다.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이 그것으로, 최종 삼간택에서 선택받은 처녀가 왕비로 책봉되었다.




전국에서 올린 사주단자 중에서 가문이 좋고 집안이 부유하며 인물이 좋은 처녀로 30~40명가량을 추리고, 그 처녀들을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게 하여 궐에 들어오도록 하는 것이 초간택이었다.




보통 초간택을 위해 궐에 처녀들이 입궐할 때는 네 명이 드는 가마를 타고 수발을 드는 유모와 몸종을 거느리고 입궐하는 법이었다.


물론 궐에서 먹을 점심까지 미리 준비해서 입궐해야만 했다.




이때 얼마나 좋은 가마를 타고 오느냐, 같은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라 해도 얼마나 값진 비단으로 지은 것이냐에 따라서 처녀의 위상이 결정되었다.




초간택에 참여하는 처녀들의 경우는 모두가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기 때문에 가마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입은 의복도 돈을 아낌없이 쏟아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까닭에 모든 처녀가 가마를 타고 궐문 앞까지 이를 때 유일하게 가마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온 처녀가 있었으니, 그녀의 이름은 바로 임수영이다.




임수영은 한양에 살지도 않고 세도가의 딸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부유한 집안의 딸도 아니다.


사대부의 딸은 맞지만, 부친은 과거에 계속 미끄러지다가 진사시에 겨우 합격한 것으로 시골로 낙향해서 고을 아이들에게 글이나 가르치는 훈장 노릇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양반이었다.




초간택에는 재물이 없는 집안의 딸은 보통은 뽑히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가진 것이라고는 쥐꼬리만 한 것도 없는 임수영이 초간택에 뽑힌 것은 전적으로 가례도감 관리들의 실수였다.


그것도 어이없는 실수 말이다.




원래 사주단자에는 처녀의 이름, 생년월일, 그리고 4대까지의 조상들의 이름과 관직, 마지막에 부친의 이름과 관직을 적게 되어 있는데 임수영은 도무지 적을 것이 없었다.




그런데 마침 임수영과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임수연’이라는 처녀가 있었는데, 이 처녀의 부친은 함경도 관찰사에 4대 전 조상들은 참판 벼슬을 한 인물들이었고, 무엇보다 집안에 재물이 많았다.




임수연의 부친인 함경도 관찰사 임혁이 제 딸을 왕비로 만들고 싶어 가례도감에서 초간택을 주관하는 관리들에게 뒷돈을 찔러줬다.


그런데 뒷돈을 잘 받아먹은 관리들이 그만 실수로 임수연의 사주단자 대신에 임수영의 사주단자를 뽑고 말았으니.




이미 초간택의 명단을 올리고 난 후에 그 실수를 알아차렸지만 엎질러진 물이요, 건너가 버린 강이었다.




그렇게 영문도 모르고 임수영이 초간택에 참여하게 되었지만, 문제는 임수영의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이라는 것.


평생 일이라는 것을 해본 적 없는 조부, 그리고 대과에 열두 번 낙방하고 진사시만 겨우 합격해 훈장 노릇을 하고 있지만 시골 서당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고작해야 보리 몇 말, 콩 몇 말, 장작 몇 짐, 그리고 쌀 두서너 말이 전부였다.


그것으로는 당장 입에 풀칠도 힘들어서 임수영이 어머니와 함께 남의 집 품팔이도 하고 삯바느질도 해서 집안 살림을 겨우겨우 꾸려온 처지다.




그런 처지에 가마에 유모, 그리고 몸종은 꿈도 못 꾼다.


지금 입고 있는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도 빌린 것이다.


어차피 초간택에 떨어질 것이 자명하니 딱 한 번만 빌려 입고 곱게 돌려주겠다며 품팔이를 자주 가던 그 고을의 사또 딸에게 간청해서 빌렸다.




의복은 빌렸지만, 한양까지 오는 여비가 충분하지 못해서 결국 한양까지 열흘길을 걸어왔다.


초간택의 날까지 맞춰서 오느라고 쉬지도 않고 걸은 탓에 발은 이미 부르텄다.


외곽의 주막에 하루를 머무르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찬물에 세수하고 보따리에 곱게 싸서 온 노란 저고리에 다홍치마를 입고 길을 물어 궐 앞까지 온 것이다.




임수영은 궐 앞에 나와 있는 백여 명이 넘어 보이는 궁녀들과 내관들을 보고 살짝 기가 질렸다.




더 기가 질리게 만든 것은 화려한 가마에서 내리는 처녀들이었다.


한눈에 봐도 명망 있는 집안 딸들이 분명했다.


거기에 비하면 임수영은 한없이 초라해서, 처녀들이 데리고 온 몸종보다도 더 누추한 차림새와 모습으로 보였다.




“.”




수영은 조금 전부터 계속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 궐 안의 거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그녀라고 왜 모르겠는가.


궁녀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 것이 다 보였다.


아마 자신의 초라한 차림새를 비웃는 것이리라.




초간택을 위해 입궐한 처녀들은 대비전의 뜰에 서서 자기 차례가 되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부 서른여섯 명의 처녀들이 각각 여섯 명씩 짝을 이루어 대비전 안으로 들어가서 왕실의 웃전들에게 선을 보이는 것이다.


수영의 차례는 제일 나중이었다.




곧이어 작게 웃는 소리까지 들렸다.


그뿐만 아니라 ‘저 꼴로 어떻게 왔지?’라고 말하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그래, 웃어라 웃어.’




수영이 속으로 혀를 찼다.




난생처음 들어와 보는 궁궐과 엄청나게 많은 내관, 궁녀들에게 살짝 기가 죽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제 슬슬 적응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왔다.


살아생전 궐 안 구경을 언제 또 하겠는가.


초간택에 뽑혔는데 오지 않으면 죄가 되기 때문에 없는 살림에 양식을 살 돈을 톡톡 긁어모아 여기까지 왔으니까 이왕 온 것, 궐 구경이나 실컷 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궐이 어떻게 생겼는지 꼭 말해주어야 해.’




의복을 빌려준 사또의 딸은 수영에게 그렇게 신신당부했었다.


그 사또의 딸을 위해서라도 이야깃거리는 많이 가져가야 한다.




‘용마루가 으리으리하구나.’




수영이 대비전의 지붕을 쳐다봤다.


처마 위의 용마루가 화려했다.


괜히 할 일이 없어 용마루나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이를 어째.’




수영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하필이면 이런 때 소변이 보고 싶어진 것이다.




‘이를 어쩌지?’




한번 요의를 느끼자 점점 심해졌다.


아랫배에 힘을 꽉 주고 다리를 살짝 꼬아 봐도 요의는 사라지지 않았다.


수영의 목덜미로 식은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싸겠어.’




대비전 앞에서 오줌을 싸면 목이 달아날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대비전 안에는 왕실의 웃전들이 모여 있다고 했다.


귀한 분들이 계신 곳에서 오줌을 싸버리면 망신은 둘째치고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


오줌을 쌌다고 목이 달아난다는 것이 우습지만 세상에는 별 우스운 일들이 다 일어나니 사람 일은 또 모르는 것이다.




‘안 되겠다. 일단 싸고 보자.’




이럴 때는 창피한 것을 생각하면 안 된다.


가장 창피하고 난감한 것은 서서 오줌을 싸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보다는 모두의 주목을 받게 되더라도 뒷간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저어.”




맨 뒷줄에 서 있던 수영이 제 바로 뒤에 있는 궁녀를 슬며시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여기 뒷간이 어디입니까?”




아주 작은 소리로 묻자 궁녀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내가 지금 쌀 것 같아서 그러는데…… 뒷간이 어딥니까?”




궁녀의 표정이 점점 혐오스럽게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도 수영은 뒷간을 포기하지 못했다.


이대로 싸버리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어 버린다.


죽어도 그 짓은 못한다.


하지만 아랫배는 이미 터지기 직전이었다.


정말 이대로 있다가는 싸버릴 것이다.


수영의 얼굴은 이미 귀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측간은 이곳을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가다가 중문이 나오면 다시 왼쪽으로 꺾어서, 또 길을 따라 쭉 가다가 작은 샛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과하면 행랑이 보일 겁니다. 그 행랑의 뒤편에 측간이 있습니다.’




궁녀가 가르쳐준 뒷간은 참 멀기도 했다.


물론 수영이 살던 고을의 사또가 기거하는 내아에도 뒷간은 멀찍하게 지어져 있었다.




원래 양반들은 집안에 뒷간을 짓기 꺼리고 최대한 내실에서 먼 곳에 뒷간을 짓는 법이지만 궐의 뒷간은 정말 멀었다.


왕과 왕비, 그리고 대비는 뒷간도 가지 않는 건지 당최 뒷간이 왜 이렇게 먼 것인지 수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궐 안의 사람들은 볼일이 급해질 때마다 이렇게 멀리까지 가야 하는 것일까?


가다가 옷에 싸버리면?




별걱정을 다 한다 싶겠지만 지금 수영의 상태가 그랬다.


겨우겨우 참고 있지만 몇 발자국 더 걷지 못하고 싸버릴 지경이다.


그러나 궁녀가 가르쳐준 행랑은 아직 나타나지도 않았다.




‘더, 더, 더는 못 참겠.’




수영이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사람이라고는 한 명도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눈에 수풀이 우거진 작은 동산이 보였다.




층층이 돌을 쌓아 올린 위로 아름다운 꽃나무들을 심은 보기에 좋은 동산이었지만 지금 수영의 눈에는 그런 아름다움은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허리까지 자란 꽃나무들과 풀이 보일 뿐이었다.




허둥지둥 동산 위로 뛰어 올라간 수영이 얼른 속바지를 내리고 치맛단을 걷어 올렸다.


그리고 수풀 속에 쭈그리고 앉아 오줌을 눴다.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다.’




초라한 차림새나 남들 다 타는 가마를 타지 못하고 걸어서 온 것은 창피한 것이 되지 못하지만, 오줌을 싸는 것은 두고두고 씻지 못할 창피한 짓이다.




‘겨우 살았네.’




위기를 모면한 수영이 안심하고 오줌을 눴다.




‘그런데 참 많이도 나온다.’




아침부터 계속 참았던 까닭에 오줌은 눠도 눠도 끝도 없이 나왔다.




‘저기는 용마루가 없네.’




오줌을 누며 수영이 슬쩍 얼굴을 들었다.


그녀의 눈에 아름다운 기와가 들어왔지만, 그 처마 끝에 용마루가 보이지 않았다.




‘궐의 지붕에는 다 용마루가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왜 저 지붕에는 용마루가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 생각하며 옆으로 고개를 슬쩍 돌릴 때였다.




“!”




그곳에, 사내가 서 있었다.


쭈그리고 앉은 채로 수영은 저를 쳐다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는 머리에는 익선관을 쓰고 가슴에는 금실로 용을 수놓은 흉배를 붙인 붉은색의 의복을 입고 있었다.


사내는 등에 활을 메고 손에 검을 쥐고 있었기 때문에 수영은 그가 궐의 호위를 맡은 군관이라고 생각했다.


군관 중에서도 상당히 벼슬이 높은 군관 말이다.




‘어쩌지? 이를 어쩌지?’




수영이 급하게 당황한 것은 사내와 눈이 마주쳤는데, 도대체 이놈의 오줌이 그치지를 않았다.


빨리 그쳐야 도망을 치든지 할 것인데 말이다.




“그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느냐?”




그때 사내가 수영에게 말을 걸었다.


수영이 볼일을 보고 있는 작은 동산이 어디인지 아느냐는 물음이었다.


물론 수영이 그런 것을 알 까닭이 없다.


오늘 처음 궐에 들어왔는데 무슨 수로 그걸 알겠는가.




“그곳은 아미산이다.”




무슨 산? 아미산?




이렇게 작은 동산에도 이름을 붙여놓다니, 궐 안의 높으신 분들의 생각은 이해할 수가 없다.




“교태전의 창문을 열면 창문 가득 아미산이 병풍처럼 들어오라고 거기에 만든 동산이지.”


‘교태전의 창문.’




수영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용마루가 없는 행각을 쳐다봤다.


이쪽을 향해 나 있는 창문이 보였다.


그런 것이라면 저기가 바로 교태전이라는 뜻이다.




왕비가 거하는 교태전.


교태전.


그리고 교태전의 후원인 아미산.




지금 자신이 오줌을 누고 있는 곳은 왕비의 후원에 있는 동산이다.


그것도 이름까지 붙여진 동산.




식은땀이 다시 뻘뻘 나기 시작한 수영을 향해 사내가 살짝 짓궂게 웃었다.




“그런 곳에 볼일을 보다니, 목이 달아나겠구나.”




그 말을 하며 손에 쥐고 있던 칼의 칼집을 살짝 밀어서 열자 수영이 기겁을 했다.


때마침 오줌이 더는 나오지 않아 얼른 속바지를 끌어올린 그녀가 치마를 내렸다.




이미 얼굴은 새빨갛게 변했고 빨리 도망치고 싶지만, 도망친다 해도 이 군관이 쫓아올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했다.


수영은 달리기를 잘하는 편도 아니고, 결정적으로 궐 안의 지리를 잘 모른다.


어디로 달아나야 하는지도 모르고 조금 전까지 대기하고 있던 대비전으로 달아났다가 저 군관이 거기까지 쫓아오면 정말 낭패다.


간택을 위해 궐에 들어왔다가 교태전에 오줌을 눈 죄로 목이 잘려 나가게 생겼다.




“그, 그, 그것이 너무 급한 나머지…… 뒷간은 너무 멀고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고.”


“초간택에 참여한 처녀냐?”




수영이 입고 있는 노란 저고리와 다홍치마를 보고 그리 짐작한 모양이다.




“한 번만 눈감아 주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이렇게 된 이상 사정할 수밖에 없다.




“저는 어차피 초간택에서 떨어지겠지만 제 고향 집에서는 제가 살아서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고, 제가 없으면 저희 식솔들은 다 굶어 죽을 수도 있고, 제가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해야 하는지라. 제발 노구의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눈감아주시어요.”




눈앞의 군관이 성품이 좋은 사내이기를 바라며 수영이 간절하고 애절한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으고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자니 사내가 픽, 하고 웃었다.




“초간택에 참여할 정도면 제법 산다고 하는 집안의 여식일 텐데 연로한 부모 봉양이라니. 좀 그럴듯한 핑계를 대어야 하지 않겠느냐?”




“아니, 아니요. 제가 초간택에 어떻게 들었는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지만, 제 아버님께서는 진사시만 합격하시고 대과에는 계속 떨어지셔서 지금은 시골로 낙향하여 작은 서당을 차려놓고 아이들 몇 명을 가르치는 것이 전부인지라 입에 풀칠도 하기 나쁜 상황입니다.


제가 어머니와 함께 삯바느질도 하고 품팔이도 해서 집안을 꾸려나가는데, 이제 곧 겨울이라 땔감도 들여야 하고 양식도 들여야 하는 상황에서 제가 죽으면 우리 부모님은 그 엄동설한에 어찌 되실지.”




물론 그 정도 상황까지는 아니다. 하지만 동정심을 사려면 확실하게 사야 한다.


수영의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울까? 우는 것이 낫겠지?’




다행스럽게도 수영은 우는 흉내를 아주 잘 낸다.




이건 생계를 위해 스스로 터득한 방법이다.


사람들은 불쌍해 보이는 사람을 도와주기 마련이다. 




아무리 재물이 차고 넘쳐도 안 불쌍해 보이는 사람은 도와주지 않는다.


정말 불쌍하고 가련하고 애처로워 보이면 곳간 문도 열리기 마련이다.




그래서 수영은 어려서부터 불쌍한 표정을 짓는 것을 아주 잘했다.


어머니를 따라간 품팔이 집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으면 보리 한 되라도 더 얹어줬었다.




“제발…… 한 번만 모르는 척해주시면…… 흑.”




수영의 뺨으로 눈물 한줄기가 또르르 흘러내렸다.




‘눈물까지 흘렸으니 봐주겠지. ……사람이면 봐줄 거야.’




애절하게 눈물을 흘리며 보고 있을 때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아니, 이름은 왜 묻는담? 그냥 보내주면 될 것을.




“이, 임수영입니다.”


“임수영.”




사내가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몇 번째 줄에 섰느냐?”


“마, 마지막 줄이옵니다.”


“그래? 그러면 아직 차례가 한참 남았군.”




사내가 수영의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차피 초간택에서 떨어질 거라고 했느냐?”




수영이 제 앞에 다가선 사내를 살짝 올려다봤다.




‘무슨 키가 이렇게.’




떨어져서 봤을 때도 참 체격이 늠름하다 싶었는데, 바로 앞까지 다가온 사내는 진짜 키가 컸다.


키만 큰 것이 아니라 어깨도 떡 벌어진 것이 궁궐의 군관이라는 사내들은 다 이런 것일까 싶었다.


수영보다 머리가 하나 하고도 반만큼은 더 큰지라 올려다보느라 목이 아팠다.


눈썹이 짙고 코가 우뚝하면서도 콧날이 반듯하다.




‘인물은 참 좋은데.'




이 상황에서도 사내의 인물이 수영의 눈에 들어왔다.


뚜렷한 이목구비가 시원하게 생겼다.




“초간택에서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느냐?”


“네? 저는 아무것도.”


“궐에 들어올 때 무엇을 밟고 들어왔느냐?”




궐문을 넘어설 때?




“소, 솥뚜껑을 밟고 들어왔습니다.”




궐문을 들어설 때 수영은 문 앞에 놓인 솥뚜껑을 밟고 넘어왔다.


왜 그런 것을 일부러 밟고 넘어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다른 처녀들도 전부 그렇게 솥뚜껑을 밟고 궐 안으로 들어섰다.




“솥뚜껑을 밟고 들어온다는 것은 이제 궐 안에 시집을 왔다는 뜻이다.”


“네?”


“궐 밖 여염집에서도 여자가 시집을 가면 시집살이를 시작한다는 뜻으로 솥뚜껑을 밟고 문지방을 넘어선다고 하지. 


초간택에 참여하는 처녀들이 솥뚜껑을 밟고 궐 안으로 들어서는 것은 최종 간택의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궐 안 시집살이가 시작되었다는 뜻이고, 


초간택에서 떨어져도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갈 수 없다는 뜻이라는 걸 몰랐다는 것이냐?”




“네?”




다른 곳으로 시집을 못 가?


초간택에서 떨어지면 다른 곳에 시집을 못 간다고?




아니, 세상에 무슨 이런 망발이 있단 말인가.


초간택에서 떨어졌는데 왜 시집을 못 가?




막말로 임금님 용안 한번 뵙지 못했는데,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는데 왜 시집을 못 가?


그러면 평생 처녀로 늙어 죽으라는 건가?


그럴 거라면 차라리 후궁이라도 시켜줄 것이지!




집이 가난한 것도 서러운데 이제 시집도 못 갈 거라는 생각에 수영의 눈에서 이번에는 진심 어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설마 자신이 처녀로 늙어 죽을 줄은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작년에 건넛마을 최 진사 댁에서 혼담이 들어왔을 때 얼른 시집을 갈 것을.


최 진사의 막내아들이 건달이라는 소문이 자자해 그 집에는 시집을 못 가겠다고 버티다 보니 초간택에 들어버렸고, 결국 평생 시집을 못 가게 될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시집을 못 가게 된 것이 그리 서럽냐?”




갑자기 펑펑 울기 시작하는 수영을 보며 사내는 살짝 당황했다.


설마 그런 이야기를 듣고 울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몰랐던 것이냐?”




수영이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은 아무도 해주지 않았다.




“너 같은 멍청한 처녀가 어떻게 초간택에 들었을까.”




사내가 미간을 슬쩍 구겼다.




“안 멍청해요……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것을…… 흑, 어떻게 알겠습니까. 흐윽.”




훌쩍훌쩍 울면서 수영이 자신을 멍청하다고 말하는 사내를 쳐다봤다.




“초간택에 들었을 때는 다들 그 정도의 각오는 하고 오는데, 너는 정말.”




사내가 혀를 찼다.




수영은 기가 막혔다.




그러면 저 서른다섯 명의 처녀 중 한 명만 간택이 되고 나머지 서른네 명, 아니 자신을 포함해서 서른다섯 명은 전부 처녀로 늙어야 하는 걸까?




이런 잔인한 간택이 세상 어디에 존재한단 말인가.




“혹시…… 간택에 떨어지면 궁녀로라도 들어올 수 없는 건가요?”


“궁녀? 나인 말이냐?”


“네…… 어차피 시집을 못 갈 거라면 궁녀로 들어와서 녹봉이라도 많이 받아 집에 보내드리려고요.”




이 와중에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 우습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자신의 혼삿길을 막아놓은 궐에서 뭘 좀 뜯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은 억울해서 못 살겠다.


적어도 궁녀는 시켜줘야 하지 않겠는가.




“궁녀라.”




사내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내가 궐 안에서 발이 좀 넓어서 도와줄 수 있기는 하지만.”




딱 봐도 그렇게 보였다.


입고 있는 의복이 무척이나 지체가 높은 군관의 것처럼 보였다.


이 정도 군관이라면 분명 높은 벼슬을 하고 있을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궐 안에서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할까? 사람의 정이라는 것이 오는 것이 있어야 가는 것이 있는 법이니 네가 불경스럽게 교태전의 후원에 오줌을 눈 것을 눈감아주고, 네가 초간택에 떨어져도 궁궐의 궁녀가 될 수 있게 해줄 것이니 너도 내게 뭔가를 다오.”




“네?, 하지만 줄 것이 없는데요?”




여기까지 오는 여비도 모자라서 걸어서 오고 먹는 것도 줄였다.


그런데 뭘 달라는 걸까?


이젠 돌아갈 때 국밥을 사 먹을 돈도 없다.


점심밥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수영은 그것도 가져오지 못했다.


딱하게 여긴 주막집 여자가 주먹밥 한 덩이 싸준 것이 전부다.




“저어…… 가진 것은 주먹밥 하나뿐인데 그거라도.”


“푸흡.”




수영의 대답에 사내가 기어이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크게 웃는 사내를 보며 수영의 귀가 빨개졌다.




그래, 주먹밥이라니.


주먹밥이라니! 잘못했다! 잘못했어!




한참을 웃던 사내가 웃음을 그치며 수영의 얼굴을 살며시 들여다봤다.




“이렇게 하자. 어차피 초간택에도 못 들고 평생 시집도 못 갈 것이니, 내가 너를 안게 해주면 내가 네 뒤를 봐주마.”


“네?”




뭘 하게 해달라고?


뭘?


뭘?!




수영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미친 사내인가?’




……이 사내는 위험하다.


아니, 처음 본 처녀에게, 그것도 초간택에 들어온 처녀에게 뭘 하게 해달라고?


이러다가 목이 달아나면 어쩌려고 이러는 걸까?




“아직 시간이 있을 것이니 치마를 걷고 다리만 벌리거라. 그러면 내 빨리 끝낼 것이니.”


“.”




수영이 입을 뻐끔거렸다.


하도 기가 막혀서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이 무슨 파렴치한 인간이 다 있단 말인가.




“그, 그, 그런 짓은.”


“어차피 궁녀가 되어 궐에서 살려면 누군가의 줄은 잡아야 하는 법이다. 궐에서 잡을 줄이 없는 신세를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 끈 떨어진 신이라고 부른다. 누가 이리 치고 저리 쳐도 하소연할 곳 없는 신세일 뿐만 아니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가도 누구 하나 불쌍하게 여기지 않지.”




사내가 수영을 바짝 겁을 줬다.


그 겁주는 목소리에 수영이 바짝 얼어붙었다. 사내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처럼 들린 것이다.




“자, 선택하거라. 초간택에서 떨어지고 평생 처녀로 늙던가, 아니면 내 제안을 받아들여서 궐의 궁녀가 되어 연로한 부모라도 봉양할 것인지. 선택은 네가 하는 거다. 덤으로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내가 궐에서 네 뒷배가 되어주고, 조금 전에 네가 한 불경스러운 일도 눈 감아 주겠다는 것이다.”




이 사내의 목소리는 퍽 부드럽고 다정다감하게 들리는데 그 하는 말의 내용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파격적이었다.




“이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 어떻게 하겠느냐? 계속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 네 차례가 되면 그땐 선택의 기회도 사라질 것인데?”




수영이 숨을 삼켰다.




이 사내의 말이 맞는다. 선택해야 한다.




“아, 아무리 생각해도 모, 몸을 버리는 것은 아니 되겠습니다.”


“그래? 그러면 내가 많이 양보해서, 손으로 만지기만 할 것이다.”


“.”




‘마, 만지기만? 만지는 것만이라면 괜찮지 않을까?’




수영의 마음이 살짝 허물어졌다.




“여, 여, 여기서 치마를 걷으면 되는 것입니까?”




그래. 눈 한번 질끈 감고 저지르는 거다.




사내의 말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초간택의 처녀들이 일생 시집을 못 간다는 사실을 몰랐던 자신이 바보였지만 이제라도 살 궁리를 해야 한다.


어차피 간택에 뽑힐 가능성은 아예 없으니 이 사내가 자신을 조금 만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결심한 수영이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때 사내가 수영의 손을 잡았다.




“여기서 그랬다가 누가 지나가다가 보기라도 하면 우리 둘의 목이 함께 달아날 것이다.”


“그, 그러면.”


“따라오거라.”




사내가 수영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수영은 얼떨결에 사내의 손에 이끌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갔다. 그러면서도 눈길은 저 멀리 대비전을 향했다.




이러는 중에도 초간택은 계속 진행되고 있을 것이다.


자신만 빼놓고, 말이다.






사내가 수영을 데리고 들어간 곳은 다름 아닌 교태전이었다.




“여, 여기에 함부로 들어와도 되는 것입니까?”




교태전 안으로 들어선 수영이 와락 겁을 먹고는 물었다.


그녀가 아무리 뭘 모른다고 해도 교태전이 왕비의 처소라는 것은 안다.


함부로 들어올 수 없는 장소다.




“아직은 주인이 없는 곳이니 몰래 들어온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하겠느냐.”


“하지만.”


“나중에 주인이 생기면 들어오고 싶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구경해보거라.”




사내는 태연하게 문을 닫았다.




안절부절못하며 불안해하는 수영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며 사내가 손에 쥐고 있던 칼을 놓고 등에 메고 있던 활도 내려놓았다.


그런 다음 수영의 앞으로 성큼 다가섰다.




“이제 치맛단 좀 걷어보겠느냐?”


“.”




수영의 얼굴이 해 질 무렵의 노을처럼 붉게 물들었다.


열이 오른 나머지 화끈거리는 얼굴을 푹 숙인 채로 수영이 치맛단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다홍치마를 들어 올리자 안쪽에 입고 있던 하얀 속바지가 드러났다.


저고리와 다홍치마는 사또의 딸에게서 빌렸지만, 속바지는 수영의 것이다.


깨끗하게 빨아서 입지만 워낙 오래 입어서 낡은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간택할 때 치마 속까지는 보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낡은 속옷을 깨끗하게 빨아서 입고 왔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낯선 사내에게 속곳을 보여줄 것이라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흐음.”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들어 올린 치맛단 아래로 사내가 시선을 내렸다.




“정말 집이 가난한가 보구나.”




그 말에 수영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자신의 낡은 속옷을 가리켜 한 말이 틀림없다.




“여기에.”




사내가 바짝 다가서자 수영이 뒤로 물러났다.






탁.




그러나 한 발자국 물러나자 등에 벽이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었다.




“구멍이 났군.”




사내의 손이 속바지의 중심을 꾹 눌렀다.


조그맣게 뚫어진 구멍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속바지 안쪽의 속곳을 누르자 수영이 흠칫 몸을 떨었다.




“조금만 힘을 줘도 찢어지겠는데?”


“찌, 찢지 말아주세요…… 하나밖에 없는 거라서 찢으면 곤란해요.”


“저런.”




사내의 웃는 소리가 여간 짓궂은 것이 아니다.




짓궂은 사내에게 걸린 것일까?


이 사내가 정말 약속을 지킬까?




불안을 감추지 못하는 수영의 얼굴 위로 사내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가 숨을 내쉴 때마다 제 얼굴에 흩어지는 숨결이 부담스러워서 수영이 얼굴을 숙였다.


하지만 얼굴을 숙여도 귓가에 닿는 숨결과 머리카락을 간질이는 숨결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이름이 임수영이라고 했지?”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확인하며 사내가 그녀의 속바지 안으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속바지와 속곳의 안쪽으로 파고들어 온 손이 그녀의 둔덕을 쓱 더듬었다.




“으응.”




투박하면서도 단단한 손바닥이 제 은밀한 둔덕을 쓸어올리자 수영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사내의 손가락 끝이 수영의 수풀 위를 톡톡 두드렸다.




“말랐군.”




사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뭐가 말랐다는 걸까.




“이곳은 항상 젖어 있어야 하는 법인데 말이야.”




이곳?




수영이 살짝 얼굴을 들었다.


눈을 뜨는 순간 저를 쳐다보는 사내와 눈이 마주친 수영이 얼른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잠깐 마주친 사내의 눈은 웃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웃음이 그저 짓궂기만 한 것이 아니라 어쩐지 조금 다정해 보인 것은 착각일까?


너무 빨리 고개를 숙이는 바람에 잘못 본 것일까.




“이렇게 하면 젖으려나?”


“아.”




사내의 손이 수영의 속바지 안에서 꿈틀거렸다.


음모 위를 더듬던 손이 그 수풀을 헤치고 파고들더니 꽉 다물어져 있는 살점을 살며시 벌린 것은 그때였다.




“흡.”




당황한 수영이 치맛단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치맛단이 구겨지며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 순간 닫혀 있던 살점을 벌린 손이 길게 갈라진 틈새를 쓱 문질렀다.


손가락의 끝이 틈새를 아래에서 위로 쓱 문지르자 수영이 허리를 굽혔다.


허리를 굽히고 허벅지를 모은 채로 몸을 비틀자 사내의 다른 손이 그녀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이렇게 힘을 주면 사내가 또 미친다는 것을 아느냐?”




허벅지를 모으고 애써 힘을 준 것이 틈새 안으로 파고든 사내의 손가락을 꽉 문 꼴이 되어버린 것이다.




“아!”




수영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그때까지는 틈새의 입구를 위아래로 문지르기만 하던 사내의 손가락이 더 깊은 안쪽으로 쑤시고 들어온 까닭이었다.




푹, 소리가 났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사내의 굵은 손가락이 그녀의 안을 쑤시고 들어왔다.


그런 이물이 들어온 것은 처음이라 수영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제 속바지 안에 들어간 사내의 손목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사내가 오히려 제 손목을 잡는 수영의 손목을 휙 잡아 위로 올렸다.


그녀의 손목을 벽에 붙인 채로 사내가 제 가슴으로 수영의 몸을 바짝 짓눌렀다.




“하읏.”




사내와 벽 사이에 갇혀 수영이 숨을 헐떡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의 손가락은 그녀의 안쪽으로 더 깊이 파고들어 내벽을 긁어댔다.




“아, 하읏…… 읏.”




사내의 가슴에 눌린 채로 수영이 그의 가슴이 급한 숨을 토해냈다.




사내의 손가락은 굵고 길었다.


수영도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 굵은 것이 좁은 구멍 안을 쑤시고 들어와 갈고리처럼 손가락 끝을 휘어 내벽을 긁다가 안쪽을 꾹꾹 찌르고 휘저을 때마다 그녀의 머릿속에 습기가 차올랐다.


목덜미에서부터 누가 불을 지핀 것처럼 열기가 달아올랐다.


아궁이에 불을 때는 것처럼 목덜미가 뜨겁고 머릿속에는 솥 안에 김이 차오르듯 습기가 차올랐다.


눈앞이 뿌옇고 숨이 가빠졌다.


지금 서 있는 것도 사내가 그 몸으로 제 가슴을 꽉 누르고 제 손목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 탓에 간신히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게 아니면 벌써 주저앉았을 것이다.




사내의 손가락은 집요하게 그녀의 내벽을 긁어댔다.




“하읏…… 읏.”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숨을 헐떡이던 수영의 귓가에 질컥거리는 젖은 소리가 울렸다.


이 젖은 소리가 어디서 울리는지 그것을 생각할 여유도 지금 그녀에게는 없었다.




“이것 좀 보아라.”




그때 수영의 틈새에서 사내의 손가락이 쑥 빠져나갔다.


그리고 사내가 그 손가락을 수영의 눈앞에 내밀었다.


사내의 굵은 손가락은 끈적끈적한 애액에 젖어 번들거리고 있었다.




“금방 젖는구나.”




사내의 젖은 손가락을 보며 수영이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어졌다.


귀가 화끈거렸다.




그때 사내의 얼굴이 수영의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쿵쾅거리는 심장의 소리가 사내의 귀에 들릴 것 같아서 수영이 애써 심장을 가라앉히려고 해봤지만 그게 될 리가 없다.




사내가 내쉬는 숨결이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그 젖은 숨결이 콧등과 입술을 덮자 수영이 숨을 멈췄다.


가까이에서 보니 속눈썹이, 아래쪽 속눈썹이 무척이나 길다.


길고 촘촘하고, 결정적으로……




‘속눈썹이 야해.’




아니, 무슨 사내의 눈이 이렇게 야하게 생겼을까. 그것도 속눈썹이.




“잘 젖으니 수월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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