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8장(5)
짐승 계약 #8장(5)
“……!”
그를 보자마자 심장이 쿵, 하고 반응했다.
곧 이어지는 요란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희민이 숨을 삼켰다.
혼란스러운 얼굴로 보고 있는데 노을이 짙어진 창밖에 시선을 두고 있던 정혁이 고개를 돌렸다.
무감했던 그의 눈이 그녀를 담는 순간 어둡게 잠기는 것이 보였다.
희민은 로브 안에서 유두가 꼿꼿하게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동시에 심장이 떨렸다.
지금 서정혁의 블랙 셔츠와 그레이 컬러 바지를 입고 느른히 앉아 있는 모습 자체가 심장을 떨리게 했다.
‘저건…… 달라.’
그의 신비로운 색 눈동자 안에 있는 건 익숙한 육체적 욕망과 정염이었다.
그건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과는 다르다.
그걸 느끼자 마음 한편이 허전해졌다.
마치 자신이 환상 속의 연애에 빠져 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정혁이 몸을 일으켜 희민 쪽으로 걸어갔다.
희민은 천천히 걸어오는 그를 혼란스러움을 누르고 마주 봤다.
그녀 앞에 선 정혁이 젖은 머리칼을 매만지며 목덜미로 고개를 숙였다.
“밖에 꽤 멋진 바가 있던데요.”
희민의 말에 정혁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시선을 들어 올리자 그녀가 말했다.
“괜찮다면 같이 한잔할래요?”
최대한 가벼운 말투로 희민이 말했다.
“나 꽤 오래 못 마셨거든요. 임신하면 아예 못 마시게 되기도 하고.”
“…….”
짙은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낸 눈을 숨기지 않고 그녀를 보던 정혁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그렇게 해요. 그럼.”
희민은 앞장서는 정혁의 넓은 등을 보며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이 침실 안에 있으면 아까처럼 다시 관계가 시작될 테고 그럼 제대로 된 대화는 불가능해진다.
대화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바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전면 유리 밖으로 황금빛에서 붉은빛으로 바뀐 채 타오르고 있는 석양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한쪽 하늘에선 푸르스름한 밤이 노을을 잠식 중이었다.
이제 곧 저 찬란한 노을은 검은 어둠 속으로 완벽히 잠식될 거였다.
그 장관을 보면서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희민은 바 테이블에 앉았다.
“어떤 걸로 하겠습니까.”
정혁이 늘어선 위스키병들과 와인 저장고를 가리켰다.
“독한 걸로요.”
희민이 지체 없이 말하자 정혁이 곧 병 하나를 꺼냈다.
그녀가 독한 술을 선택한 건 자신만이 아니라 정혁을 취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그가 취한 모습을 보인 적이 거의 없긴 했다.
전에 한 번 본 게 유일했으니까. 하지만 정혁이 조금이라도 더 취하는 편이 유리하다.
‘그래야 저 남자의 마음속에 있는 말을 들을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다행인 건 희민 자신이 술이 세다는 거였다.
회사 생활 할 때 중요한 계약을 따기 위해 술을 동반한 접대 자리들이 있었고 그럴 때마다 아무리 독한 술을 마셔도 취하면 안 됐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있어야 실수하지 않았다.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조직 문화가 그녀의 주량을 키웠다.
“버번위스키 좋아하나 봐요.”
희민이 말하자 정혁이 그녀 앞에 둥근 잔을 내려놓고 옆자리에 앉았다.
“별로 좋아하진 않는데.”
그의 말에 희민이 의아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처음 만난 날에도 당신 버번 마시고 있었잖아요. 그 뒤에도 당신에게서 자주 버번 향이 났는데……?”
정혁이 말없이 그녀를 마주 보다가 느른하게 잔을 들었다.
“그럼 좋아하는 걸로 해 두죠.”
챙.
묘한 미소를 지으며 건배한 정혁이 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그를 주시하며 자신도 한 모금 삼킨 희민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확실히 좋아하는 건 뭔데요?”
정혁이 잔을 든 채 그녀를 바라봤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감정 없는 눈동자에 희민이 시선을 잔으로 내리깔았다.
“이를테면…… 아니 뭐든 말이죠. 남자들이 흔히 좋아하는 명차라거나, 아니 그런 건 당신이 충분히 가질 수 있는 것들이라 별로 관심 없으려나.”
마땅한 예가 떠오르지 않아 희민이 둥근 잔의 기다란 스탬을 매만지며 눈을 가늘였다.
“난 한희민 몸을 좋아하는데.”
희민의 내리깔았던 눈이 다시 그를 향했다.
정혁은 사람을 유혹하려는 것도 아니고 농담을 하는 것도 아닌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볼 때마다 입 안에 삼키고 핥고 싶거든요.”
무감각해 보이던 정혁의 눈빛이 어둡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
숨이 막히게 할 정도로 관능 어린 열기를 내는 짙은 색 눈동자를 희민이 잠시 할 말을 잃은 채 바라봤다.
눈썹을 살짝 찌푸린 그녀가 시선을 내려뜨리고 말했다.
“그건 임신 때문이겠죠. 임신을 하는 게 목적이니까.”
희민이 빠르게 잔을 비웠다.
독한 술 때문인지 긴장 때문인지 목 안이 바짝 조여드는 것 같았다.
정혁의 시선이 그녀의 느슨해진 로브의 여밈 부분에 닿아 있었다.
그 시선에 가슴이 흥분으로 부풀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술이 빠르게 도네. 오랜만이라 그런가?’
생각보다 술기운이 몸 안에 퍼져 가는 속도가 빨라 희민은 내심 당황했다.
이래 가지고는 혼자 취할 뿐 이 남자에 대해선 아무것도 건지지 못할 것 같아 조급해졌다.
“처음 만났을 때 당신이 했던 말 기억해요?”
희민은 병을 들어 자신의 잔에 버번을 따르며 물었다.
“어떤?”
그녀의 얼굴에 닿았던 정혁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가 목덜미와 쇄골을 느릿하게 훑었다.
숨을 크게 들이켤 때마다 로브의 가슴 앞섶이 벌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의 시선이 로브 안의 가슴을 핥듯 내려가자 희민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왜 이 계약을 한 거냐고 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한 말이요.”
정혁의 시선으로 유두가 포도알처럼 땡땡해져선 로브에 닿을 때마다 짜릿하게 자극됐다.
두툼한 로브 안에 숨길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희민이 말했다.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 지금도 궁금해서요.”
“아아, 그거.”
정혁이 나른한 눈빛으로 잠시 웃는 듯하다가 바 위에 팔꿈치를 대고 희민 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그게 왜 궁금한데요?”
시선을 맞추고 정혁이 되물었다.
희민의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복잡하게 생각이 얽혀 들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퍼지는 술기운과 시선만으로 달아오르는 몸 때문에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는 초조함이 들었다.
“알고 싶어서요.”
“뭘 알고 싶을까.”
정혁의 얼굴이 좀 더 가까워지자 버번 향과 그가 늘 쓰는 향수의 우드 향이 느껴졌다.
“우리 계약의 대가는 보통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는 차원이 아니잖아요. 그만한 대가를 준다는 건 그때 말한 당신 말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아서요.”
“…….”
정혁이 말없이 그녀를 보고 있자 희민이 확인하듯 물었다.
“그 조건을 성립시키는 상대가 나밖에 없다는 뜻인가요?”
이건 항상 생각하고 있던 거였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계약이라면 그런 조건을 걸지는 않을 거였다.
그렇다면 자신만이 그 계약을 이행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데 그 이유가 궁금했다.
무감한 표정으로 희민을 보던 정혁이 눈썹을 살풋 찡그렸다.
“그 좋은 머리로 왜 생각을 못 할까.”
“……무슨 뜻이죠?”
희민이 눈을 치켜뜨자 정혁이 안타깝다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모르는 게 당신에게 이롭다는 겁니다.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아질수록 당신이 위험해진다는 뜻인데.”
정혁이 고개를 더 가까이 숙였다.
“그런데도.”
바짝 다가온 독특한 빛깔의 눈동자에 웃음기가 없어 희민의 어깨가 긴장됐다.
“이런 식으로 술을 먹여서까지 나에 대해 캐내고 싶어?”
“…….”
낮은 목소리에 희민의 눈이 작게 흔들렸다.
‘전부 다, 간파하고 있어.’
서정혁은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이 이 남자를 간파하려고 하는 모든 것들을 알아챌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아니면 촉이 뛰어나든가. 하지만 그저 촉만으로는 이 정도의 부를 축적하지 못한다.
순간 머릿속이 뒤죽박죽되었지만 희민이 깊이 숨을 들이켜고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신 말대로 술을 먹여서라도 알고 싶다고 하면…… 알려 줄 거예요?”
정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이지 않는 탐색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혀 들었다.
뭘 관찰하려는 것이든 희민은 그대로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지금 이 순간 서정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를 필사적으로 파악하려 했다.
지지 않고 마주 보는 희민을 조용히 보고 있던 정혁의 눈매가 설핏 부드럽게 휘어졌다.
착각인가 싶을 정도로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가 말했다.
“아니.”
아니라고?
희민의 표정이 굳었다.
“난 말하지 않을 거야.”
정혁이 부드럽게 팔을 뻗어 희민의 젖은 머리칼을 매만졌다.
너무나 부드러운 손길이라 희민은 일순 이 남자와 자신이 실제 연인이라고 믿을 정도였다.
“당신이 위험해지는 건 싫거든.”
제 뺨 위로 옮겨 오는 손길을 느끼며 희민이 눈을 예리하게 치켜떴다.
“날 위험하게 만드는 것도 당신 아닌가요?”
그녀의 말에 정혁이 나른하게 웃었다.
“아아, 잘 알고 있네. 역시 영리해.”
지금 그의 말은 전혀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희민은 짧은 대화 중에 너무나 많은 생각을 하느라 머릿속이 완전히 혼란스러워져 버렸다.
‘도저히 파악이 안 돼. 이 남자는.’
입술을 지그시 무는데 정혁의 손길이 그녀의 입술로 내려왔다. 입술을 매만지는 그의 눈빛이 짙어졌다.
“하지만 당신 머리가 당신을 그렇게 만들었듯이 영리한 게 꼭 좋지만은 않아.”
“네? 그게 무슨 뜻…….”
끼익.
희민이 뭐라 말하려는데 정혁이 스툴에서 일어나 희민을 안아 올렸다.
단단한 바 위에 그녀를 앉히고 양옆으로 손을 뻗어 짚은 그가 바로 앞에서 희민을 응시했다.
“지금도 그렇고.”
방금 전과 분위기가 달라졌다. 엄격한 눈동자에 타오르는 열기에 희민이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그건,”
“그만하라는 뜻이야.”
정혁이 희민의 말을 막듯 그녀의 아랫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살짝 아릿한 고통이 느껴질 정도로 깨물었던 그가 입술을 놔주고는 다시 시선을 맞춰 왔다.
“이쯤 하면 알아들어. 한희민.”
낮은 목소리와 함께 입술이 겹쳐졌다.
더 이상의 질문을 차단하듯 곧장 입술을 벌리고 들어온 혀가 질척하게 얽혀 들었다.
그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두 무릎을 벌렸다.
벌어진 다리 사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희민은 눈을 감았다.
그의 중단을 받아들여야 했다.
이젠 언어의 대화가 아닌 육체적 대화가 시작될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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