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남자 11

맛있는 남자 11

M 망가조아 0 1208

맛있는 남자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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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까지 말하는 남자를 두고 이한이 차마 돌아가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망설임 끝에 이한이 핸드폰을 꺼냈다. 


차마 말이 떨어지지 않아 통화 대신 이한이 문자를 넣었다.






- 미안해요. 서진 형 가게인데 형이 많이 아파서 혼자 두고 가기가 그러네요. 형 나아지는 거 보고 들어갈게요. 늦을 수 있으니까 기다리지 말고 먼저 자요. 정말 미안해요.






문자를 보낸 이한이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수건 어디 있어요? 이마에 물수건 얹어드릴게요.”


“수건, 저쪽에.”






한쪽 구석을 손으로 가리킨 서진이, 수건을 가지러 걸어가는 이한의 뒷모습에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저런 착한 남자를 속이는 것이 마음에 조금 걸렸기 때문이다. 


정말 저 남자는 왜 저렇게 바보 같이 순진한 걸까? 라고 생각하며 서진이 손을 이마에 올려본다. 


열은 하나도 없다. 이마보다 손바닥이 더 뜨거울 정도로 이마에는 열이 없다.






- 많이 아파? 우리 세나?




- 응.


- 아빠 손 약손 해줄 테니까 빨리 나아.




- 아빠 손이 약손이야?


- 그럼. 우리 세나 하나도 안 아프게 해주는 약손.






문득, 오래 전의 일이 떠올라서 서진이 이마에서 손을 뗐다. 


열 때문에 뜨거웠던 작은 아이의 이마가 문득 생각이 나서, 그가 눈을 감아 버렸다. 


이한이 물수건을 적시는 젖은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서진이 옆에 앉아 있는 이한을 힐끗 쳐다봤다. 벽의 시계는 열 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양심의 가책이 더해지는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순진하게 의심조차 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 남자는 언제나 그랬다. 누가 말하면, 의심을 하는 법이 없다. 이래서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이한은 열심히 핸드폰으로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누구와 문자를 주고받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했다.






- 동생과 같이 살기로 했어요.






그때 누구보다 그걸 반대했던 것이 서진 자신이었다.






- 친동생인지 어떻게 알아? 이한 씨는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고아원 원장이라는 사람 말만 듣고 어떻게 그런 걸 그렇게 쉽게 결정해? 친엄마가 아닐 수도 있잖아. 아니면 동생이 엄마가 낳은 애가 아니라 남자 쪽 애일 수도 있잖아. 아무것도 확인해보지 않고 그렇게 무턱대고 결정하는 거 난 반대야.






그때 이한이 뭐라고 대답했는지도 서진은 기억했다. 하지만 그때 그 대답은 지금도 납득하기 어렵다.






- 피가 섞여서 가족이 아니라, 이제부터 마음이 섞인 가족이 되어 보려고요.






피가 섞이지 않고 어떻게 가족이 된단 말인가. 마음을 섞는다는 말 따위 서진은 믿지 않았다.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이 마음을 섞을 수 있다는 걸 믿지 않았다.






- 은서 씨와 같이 살기로 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부러워졌다. 그리고 화가 났다. 


자신은 아직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데 혼자서 앞으로 나가는 이 남자의 모습에 부러움과 화가 동시에 일어났다.


점점 더 앞으로 가고 있는 이 남자에 대한 부러움과 여전히 이 자리에 머물고 있는 자신에 대한 화. 정체되어 있는 것 같았던 2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 남자는 이제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만큼 저만치 가 있는데, 자신만 아직 이 유리껍질 안에 갇혀 한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형. 뭐 먹고 싶어요?”






문자를 주고받던 이한이 서진을 돌아봤다.






“응?”






“입맛 당기는 거 있어요? 은서 씨가 사서 온대요. 죽 사오라고 할까요?”






“.....”






줄곧 주고받던 문자의 결과물이 저거다. 


그 여자를 골려주려고 했던 일의 결과가 눈앞에서 두 사람의 애정행각을 보게 되는 것으로 끝나버리게 되었다.






“난 됐으니까 이한 씨 그만 가봐. 은서 씨도 밤길 다니는 거 별로 좋지 않고. 여자한테 밤에 이런 데 오라고 하는 것도 예의 아니야. 나 이제 많이 좋아졌으니까 그만 가.”






연극은 여기서 끝이라고 서진이 생각했다. 그 여자에게는 당해내지 못한다. 도무지 지는 법을 모르는 여자다. 


순하게 생겨서 엄청난 고집이 있는 여자. 그러니까 이 남자를 잡았겠지. 


그리고 이 남자… 순하게 생겼지만 실은, 그 여자 못지않게 고집이 있는 남자.






고집.






치열하게 느껴졌던 그 고집. 모두가 그만 놓으라고 했던 바보 같은 신념, 바보 같은 삶의 모습, 그 바보 같이 순수한 고집. 그 고집의 결과로 이 남자는 지금의 행복을 손에 넣은 것일까. 영악하지 못해도, 바보 같은 자신의 삶을 끝까지 고집한 결과가 지금의 행복을 만들어낸 것일까.






“출발했대요. 길이 엇갈리면 안 되니까 여기서 기다렸다가 같이 돌아가는 게 더 나아요.” 이한이 순진하게 웃는다. 그 순진한 웃음에 2년 전 그를 처음 만났을 때를 서진이 떠올렸다. 지독하게 더웠던 그 여름을. 땀이 물처럼 흐르던 그 여름에 한 번도 해보지 않은 못질을 하느라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을 때 이 남자가 말을 걸어왔었다.






- 도와드려요?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짜증이 폭포처럼 밀려오고 있을 때 도와주겠다는 그 목소리는 마치 더운 여름날의 시원한 냉수 한 그릇과 같았다. 


물론 땀을 뻘뻘 흘리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지독하게 더워 보였지만.






*






“카페요? 와, 대단하다.”






하얀 무지 반팔 티가 땀에 흠뻑 젖어서 짜면 물이 한바가지는 나올 것 같은 차림을 한 채로 못질을 하며 그 남자가 환하게 웃는다. 


근처 체육관에 소속된 복싱 선수라고 자기를 소개한 이 남자의 이름은 변이한. 


다섯 번째 못질에 실패하고 망치를 내던진 서진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남자다.






“전에는 뭐 하셨어요?”






“리모델링했어요. 토목과 나왔거든요.”






사실이 아니지만 되는 대로 대답했다. 토목과는 무슨 토목과. 망치 한 번 잡아보지 못했고 설계도는 볼 줄도 모른다. 


리모델링? 가구 배치 한 번 스스로 해본 적 없다.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순진하게 그걸 또 믿는다. 


진짜 토목과를 나왔고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는 일을 했다면 겨우 못질 하나에 이렇게 절절 매지 않을 거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조금만 생각해보면 충분히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텐데, 모르는 척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것일까?






“와, 그래서 혼자서 이 가게도 리모델링하시는구나.”






“그렇죠, 뭐.”






실은 가게 리모델링을 하기로 한 업체가 터무니없는 견적을 내는 바람에 열이 받아서 혼자 하겠다고 망치를 들었을 뿐이다. 


인터넷으로 내부 리모델링에 대한 공부를 이틀 동안 하고 재료를 구입해서 오늘 처음으로 망치를 들었지만, 처음부터 화가 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 이전부터 나있던 화가, 이제 한계점에 이르러버린 것이다.






“또 어디 박아드려요?”






“아, 저쪽도 다 해야 하는데. 그런데 여기서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운동도 다 끝냈고, 이제 돌아가도 할 일은 별로 없어요. 그것보다 이거 재미있는데요?”






환하게 웃는 남자를 보는 순간 서진이 문득 톰 소여와 그의 친구들이 생각했다. 


톰 소여가 해야 할 ‘일’인 펜스 페인트칠하기를, 마치 재미있는 놀이라도 되는 양 톰 소여에게 자신들의 보물을 상납하기까지 하며 페인트 붓을 받아들고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던 그 바보 같던 친구들. 




그리고 그런 바보 친구들을 쳐다보며 느긋하게 상납받은 사과나 깨물어 먹으며 여유로움을 즐기던 영악한 톰 소여. 


양심의 가책이 살짝 느껴졌지만 애써 모른 척하는 것은 이미 익숙하지 않은 망치를 쥔 손바닥에 물집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육체적인 노동을 해본 적 없는 손이 금방 투정을 부리고 있었다.






“커피 좋아해요?”






슬금슬금 빠져나갈 기회를 엿본다. 이 남자에게 커피를 대접하고 이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좋아해요. 주시게요?”


“땀 흘렸으니까 단 걸로.”




“아니요. 저 단 거 마시면 안 돼요. 그냥 설탕 들어가지 않은 걸로 부탁드릴게요.”




“.....”






무슨 심술이었을까. 단 걸 마시면 안 된다는 그 말에 그냥 아메리카노를 가져다 줘도 됐을 것을, 무슨 심술이었을까. 


서진 자신도 마시지 않는 에스프레소를 가져다 준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자신이 하지 못하는 못질을 수월하게 해대는 남자에 대한 약간의 심술이었을까? 


땀 흘리는 모습이 아름다운 남자에 대한 약간의 질투였을까? 






뜻밖의 쓴 맛에 표정이 변하는 남자의 모습에 서진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표정이 변하면서도 굳이 그걸 다 마시는(컵이 쾌 컸다) 모습에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사이에, 짜증도 화도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






카페 내부의 집기를 들여놓기 시작한 지 이틀 정도 지났을 때 이한이 찾아왔다. 


한동안 열심히 망치를 두드리는 일과 목재를 나르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들을 거의 도맡아 해주던 이한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흘 정도 보이지 않다가 다시 온 것이다. 


그가 오지 않은 나흘 동안 업자를 불러 나머지 마무리를 처리해버린 서진이었다.






“거의 다 하셨네요. 혼자 하시느라 힘들지 않으셨어요?”


“별로.”






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한 거 없지만 서진이 그런 내색도 하지 않는다. 이 남자는 충분히 약아빠진 도시형 남자인 것이다.






“죄송해요, 끝까지 도와주지 못해서.”






그에 비해 이한이라는 이 남자는 얼마나 멍청한가. 하루의 반나절을 땀 흘리며 도와줘봐야 좋아하지도 않는 쓴 커피만 돌아오는 일이 뭐가 좋다고 티셔츠에 소금이 배어 나오도록 열심히 도와주는지 알 수가 없다.






“카페 오픈하면 이한 씨는 평생 VIP니까 커피 마시고 싶을 때마다 와.”


“평생 VIP? 그게 뭔데요?”




“평생 무료 손님이라는 뜻이야. 일 도와준 거에 대한 내 감사의 표시.”


“안 그러셔도 돼요. 그럼 저 부담스러워서.”




“어차피 물장사야. 커피 몇 잔 그냥 줘도 표시도 안 나. 괜찮아.”






이 약아빠진 남자가 이런 걸로 무디어진 양심이 가책 받는 것을 조금 덮어보려고 하는 중이다. 받은 만큼 되돌려주면 된다, 이런 식으로.






“그런데 무슨 일 있었어?”


“아, 저 시합 일정 잡혔어요. 그래서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아서.”




“시합? 언제야?”


“보러 오세요.”






이한이 서진에게 작은 종이를 한 장 내민다. 초대장이다. 서진은 한 번도 복싱을 직접 본 적이 없다.


치고 박고 하는 난폭한 게임을 싫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무슨 시합이야?”


“국가대표 선발전이요.”




“오, 멋진데?”


“이번에 이기면 올림픽 나가요.”




“좋은데? 꼭 가야겠다.”






매일 후줄근한 반팔 면 티에 땀이 흠뻑 배어나오도록 달리기만 하던 남자가 실은 괜찮은 운동선수라는 사실에 서진이 뭔가 기대감이 생긴다. 


좋아하지 않는 복싱이지만 구경할 만할 거라고 서진이 생각했다.






“커피 마실 거지?”


“네.”






이한의 대답에 서진이 빙그레 웃었다. 


지금쯤이면 다른 커피로 달라고 할 법도 한데, 꿋꿋하게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시는 이 청년이 묘하게 신기했다.






“그런데 형은 왜 전에 일 관두고 이 일 시작하셨어요?”






커피를 기다리며 가게 내부를 둘러보던 이한이 문득 궁금했는지 물어온다.






“그냥. 이젠 느긋하게 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렇구나.”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느긋하게 살고 싶었다. 더 이상 아등바등 살고 싶지 않았다. 


아등바등 몸부림치고 산 결과가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다 놔버리고 느긋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이래도 저래도 결과가 시원찮다면 차라리 노력하지 않는 쪽으로 결정을 내려버린 것이다.






진하게 퍼지는 커피의 향을 맡으며 서진이 비어있는 오른쪽 약지 손가락을 쳐다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결혼반지를 끼고 있던 손가락이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






이전에 하던 일은 외환 딜러였다. 토목과는 거리가 멀고, 커피와도 거리가 먼 직업이었다. 


경영학과를 나와 외국계 증권회사에 들어가 외환 딜러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 그 자리에서 인정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의 주인공이 되기도 했었다. 


소개팅으로 만나 결혼한 아내와 결혼한 지 2년 만에 얻은 딸. 세상에 부러울 것은 없었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행복이 자신이 치열하게 산 삶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고, 더 바쁘게 뛰어다녔다.


잘못한 것은 없었다. 


더 잘 살기 위해 노력한 것 외에는 잘못한 것이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차가운 배신이었다.






- 네?






귀를 의심했었다.






- A형입니다.






영유아 건강검진에서 1분이면 결과가 나온다고 해서 빈혈 검사를 하며 같이 받았던 딸의 혈액형 결과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진 자신은 O형, 그리고 아내는 B형. 하늘이 무너져도 A형은 나올 수가 없다. 


집에 돌아와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신을 속여 온 여자.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왜 그랬을까?’였다. 


무엇이 부족해서.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는 삶인데 대체 왜.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는 풍요한 삶, 아무리 바빠도 한 달에 두 번은 꼭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아이가 태어나고 최대한 자상한 아빠가 되려고 했고, 가정적인 남편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왜 그랬을까. 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져버린 것일까. 






딸의 나이는 여섯 살. 6년 동안 이 여자는 자신을 속여 온 것이다. 아니, 그 이전부터 다른 남자를 만났을 것이다. 


자신이 그녀를 위해 신경을 곤두세우며 돈을 벌고 있을 때 이 여자는 다른 남자를 만나 그와 섹스하고, 그의 아이를 가진 채로 자신을 속여 왔던 것이다.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만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가 떨려왔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말없이 준비한 이혼 서류를 내밀었을 때 아내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부도덕함을 애써 부정했었다. 


하지만 결국은 인정하고 말았다. 결혼 전에 잠깐 사귀었던 남자와 우연히 만나 몇 번 전화를 걸고 받았다고. 






처음에는 전화만 주고받았지만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만나고 싶은 생각이 들었고, 두세 번 만나다 보니 어느새 모텔 침대 안에 같이 누워 있게 되었다고 했다. 






왜 그랬냐고 묻지도 않았지만 그녀는 외로워서 그랬다고 항변했다.


밤낮으로 일에 바빠 주말에도 시간을 내주지 못하는 그로 인해, 그녀는 외로워서 그랬다고 항변했다. 


그는 그녀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외로워서 다른 남자와 잤다고 말했다.






- 하지만 세나를 가진 후로는 만나지 않았어요. 지금까지도.






그녀의 변명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만나고 만나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 날 속이는 게 재미있었어?






배신감. 사랑을 쏟아 부었던 딸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것에서 오는 절망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딸이, 실은 다른 남자의 딸이라는 사실이 아내의 외도보다 더한 충격으로 그를 집어 삼켰다.






아내는 그를 두 번 죽였다.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긴 것으로 한 번, 그리고 그에게서 딸을 빼앗아 간 것으로 또 한 번.






- 아빠는 같이 안 살아?






이혼 서류가 접수되고 아내가 짐을 챙겨 집을 나가던 날, 아내의 손을 잡은 여섯 살 어린 딸이 아무것도 모르고 물어올 때, 그는 차마 그 작은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나는 네 아빠가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없었다. 이제 같이 살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집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팔아버렸다. 


누군가와 같이 살았던 기억이 남아있는 집에서 혼자 살고 싶지 않아 집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직장을 그만 뒀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행복해지려고 열심히 살았는데, 결과가 배신으로 돌아왔다면 더 이상 그렇게 살기 싫어져버렸다. 






이런 구석진 자리에 굳이 카페를 차린 것도 사람 얼굴을 대하는 것이 싫어져서였다. 


행복한 척 웃고 있는 사람들의 그 얼굴 뒤편에 뭐가 숨겨져 있을지 한눈에 들여다보이는 것 같아서, 웃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싫어져서 누구도 오지 않을 것 같은 이런 곳에 카페를 차렸다. 






그랬더니 저런 바보 같은 남자가 찾아들었다.


저런 남자는 분명 세상에 이용만 당할 것이다. 


똑똑하다 자부했던 자신도 뒤통수 맞아버린 세상에서 저런 바보 같은 남자는 말할 것도 없이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질 것이다.






바보 같은 남자. 그 바보 같은 모습에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조금 가려지는 것 같아서 서진이 위안을 삼는다.


저 바보 같은 남자에 비하면 난 괜찮아, 그렇게 실패했어도 저 남자보다는 아직은 내가 더 나아, 하며 위안을 삼아본다.






커피를 잔에 내리며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






“오, 제법 사람이 많은데?”






체육관 안으로 들어선 서진이 제법 사람이 들어찬 광경에 휘파람을 불었다. 


굳이 초대장이 없어도 들어올 수 있는 곳을, 일부러 초대장을 찍는 이유는 그럴 듯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일까? 


체육관 입구에도 ‘국가대표선발전’이라는 현수막이 거창하게 붙어 있었다. 그리고 안쪽의 열기는 제법 후끈거렸다.






“선수 대기실로 가야 하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서진이 결국은 포기하고 링이 잘 보이는 자리를 골라 앉았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았다. 아마 절반은 관계자들일 것이고, 절반은 선수들의 가족일 것이다. 


이한은 가족이 없다고 들었다. 그래서 자신에게 초대장을 건네준 것일지도 모른다고 서진이 생각했다. 


누구라도 응원해주러 올 사람이 필요했던 건지도 모른다. 시합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다.






하지만 이한의 시합은 아니었다. 링 위에서 서로 치고 받는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서진이 왜 저러고 살까, 하고 생각했다. 


굳이 저렇게 치고받으며, 얼굴에 멍이 들어가며 저걸 굳이 해야 하는 것일까.






“아함.”






서진이 하품을 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일까. 


아무리 기다려도 이한의 시합이 이어지지 않아 그가 돌아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형-!”






이한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날아들었다. 헤드기어를 쓴 그 모습을 서진이 알아보는 데 몇 초가 걸렸다. 


처음에 잘 알아보지 못한 것이다. 헤드기어를 쓰고 글러브를 손에 낀 이한의 모습은 서진의 눈에 낯설었다.






“아.”






서진이 어색하게 손을 흔들어줬다. 링 위로 올라가는 이한을 쳐다보는 서진의 옆으로 몇 명의 남자들이 다가왔다.






“이한이 아는 분이세요?”


“네?”






말을 걸어오는 낯선 사람들에게 서진이 눈을 깜빡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우린 체육관 식구들이어요. 못 보던 분이라서, 이한이 아는 분인가 해서요.”


“아, 네… 조금 아는 뭐.”




“복싱 좋아하세요?”


“아니요. 몸 움직이는 거 안 좋아해요.”




“그렇구나.”






만약 복싱 좋아한다고 하면 여기서 체육관 영업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진이 딱 잡아뗀다. 


물론 운동을 싫어하는 건 사실이었다. 타고난 몸치인 것이다. 몸치에 운동치.






땡-.






종이 울리며 링 위에서 시합이 시작되었다. 


붉은 색과 파란 색의 헤드기어를 쓴 선수들이 서로를 향해 주먹을 날리는 모습을 서진이 구경하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한 씨, 잘하네.”






생각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어리바리하게 보이던 모습으로는 상상할 수 없이 빨리 움직이며, 상상하지 못한 거친 주먹을 날리는 모습은 평소에 그가 보이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랐다.






“잘하죠? 발도 빠르고 주먹도 괜찮고.”


“저거, 이건 거죠?”






서진이 막 시합이 끝난 링을 보며 묻는다.






“이겼어요.”


“대단하네.”






“바로 다음 시합 이어져요.”


“쉬지도 않고요?”




“계속 뒤로 시합이 밀려 있어서 바로 바로 다음 시합 치르는 거예요. 다 그래요.”






서진의 눈에 링의 모서리에 앉아 땀을 닦은 이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헤드기어를 잠시 벗은 이한의 얼굴은 땀투성이에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평소에도 자주 본 땀투성이의 얼굴이었지만 링 위에서 흘리는 땀이 평소의 땀과 달라 보이는 것은 분위기 때문인 것일까.








“여기서 이기면 올림픽 가는 건가요?”


“그렇죠.”






“이한 씨 잘하는데. 좋은데요?”


“항상 잘했어요. 그런데 항상 실패해서 문제지.”




“네?”






체육관 사람들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진이 다시 물으려고 할 때, 다음 시합이 시작되는 종이 울리고 있었다.






*






2분씩 모두 4라운드. 도대체 저 남자는 지치지도 않는 것일까. 


쉬지도 않고 네 번째 시합을 치르고 있는 이한의 모습에 서진이 조금은 질렸다는 눈으로 링 위를 쳐다봤다. 






다리가 무거워질 만도 한데 몸은 여전히 가벼웠고 그저 숨만 거칠었다. 


그리고 무어보다 헤드기어 사이로 빛나는 눈동자는 조금도 빛을 잃지 않았다.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서진이 생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서진이 봐도 저 남자는 대단했다. 


저런 남자가 이기지 않으면 누가 이긴단 말인가. 






마지막 결승 시합을 치르고 있는 이한의 모습에 서진이 힘내라고 소리라도 질러주고 싶었지만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주먹을 꽉 쥐는 것으로 응원을 대신했다. 






마지막 네 번째 라운드까지 링은 치열했다. 그 위에서 흩어지는 땀방울이 소름끼치게 느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치열함 가운데서도 링 위에서 주먹을 날리는 남자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리고 마침내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을 때, 서진은 확신했다.








저 남자가 이겼다. 누가 봐도 저 남자가 이겼다. 


축하의 말을 속으로 생각할 때 주심이 두 명의 선수를 링 가운데로 불러 들였다. 그리고 승자의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승자의 손이 위로 번쩍 쳐들려 올려지는 순간 서진이 뭔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왜 이한의 손이 올라가지 않은 것일까? 누가 봐도 이한이 이긴 시합인데, 왜 주심은 그의 손을 올리지 않은 것일까?






“저거, 실수한 것 같은데.”


“4:1 판정으로 졌네요.”




“네?”


“심판 판정이 4:1로 나왔다고요. 졌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원래 다 그래요.”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체육관 남자들이 서진을 두고 걸어간다. 그들이 걸어가며 중얼거리는 말이 서진의 귀를 울렸다.






“K.O. 승이 아니면 힘들다니까. 저 텃세를 어떻게 이겨?”


“그래서 한 방에 보내라고 했는데, 판정까지 가면 절대로 못 이기지.”




“이한이 이번에는 포기하려나?”


“그냥 이젠 국가대표 포기하고 프로 전향해서 승점 쌓고 격투기 쪽으로 나가는 게 돈 버는 데 더 좋지 않나?”




“고집이 있잖아. 죽어도 포기 못 한다는 고집.”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들으며 그제야 서진이 깨달았다. 링 역시 작은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흘리는 땀이 정직하게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 결국은 힘 있는 자가 이기는 작은 세상의 축소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치열하게 살아도 결국은 바보 같은 자는 지고 마는 그런 작은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






탁.






문이 가볍게 닫혔다.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서진의 눈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는 이한의 모습이 들어왔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덮고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이한.”






그를 부르려던 서진이 입을 다물었다.






“윽.”






그 남자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윽… 흐윽.”






붕대로 손을 칭칭 감은 채로 감싸 쥔 그 남자의 숙인 얼굴에서 억누른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억울해서 우는 것일까. 다 이긴 시합을 억울하게 빼앗긴 것이 서러워서 우는 것일까. 


저렇게 우는 남자에게 세상은 다 그런 것이라고 가르쳐줘야 하는 것일까? 


자기도 열심히 살아 이겼다고 생각한 삶을 말도 안 되는 반칙에 내줘야 했다고, 열심히 해봐야 소용이 없다고 말해줘야 하는 것일까. 


현명하게 세상을 사는 법을 가르쳐줘야 하는 것일까. 


다 포기하고 이제 세상을 좀 편하게 살라고, 남들처럼 적당히 타협해가며 살라고. 아등바등 해봤자 소용이 없다고.






“이한 씨, 울지 마. 남자가 왜 울고 그래?”






그의 앞으로 걸어간 서진이 이한의 앞에 살짝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땀과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이었다. 몇 번의 시합을 치르느라 얼굴에 든 시퍼런 멍과 터진 입술 위로 눈물이 엉망으로 흘러내렸다.






“힘든 거라며. 안 되는 거라며. 미리 다 정해져 있었던 거라며. 그러니까 그냥 더럽다고 욕 좀 하고 포기해. 포기하면 쉽잖아.”






포기하면 쉽다. 더럽다고 욕하고 포기하면 쉽다.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더럽다고 욕하고 포기했다. 


세상이 참 더럽다고 욕을 하며 포기했다. 포기하니 쉬웠다. 어차피 그런 세상이니 포기하니 쉬웠다. 포기하면 쉬운 것이다.






“포기하고 다른 길을.”


“…았어요.”






눈물을 닦으며 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아직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응?”


“아직 난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포기 못 해요.”




“이한 씨.”


“정해져 있다면, 그 정해진 것들도 어떻게 하지 못하게 날릴 수 있는 한 방이 있으면 돼요. 난 아직 그 한 방이 없어서 진 거니까, 난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 아니니까.”




“.....”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적어도 혼신이라고 불릴 정도로 싸워보지 않고서는… 포기하고 싶지 않아요.”




“바보네… 이한 씨는.”






눈물이 마르지 않는 남자를 바라보며 서진이 중얼거렸다. 


싸워도 안 되는 싸움을 싸우며, 그래도 여전히 더 싸우겠다고 말하는 남자를 보며 서진이 중얼거렸다. 


너무 억울해서 울어버린 주제에, 그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남자를 보며 서진이 반지를 뺀 자신의 손가락을 떠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한 한 방. 자신에게는 그것이 있었던가. 


욕하고 달아나고, 결국 구석으로 도망쳐오며 자신은 한 번이라도 아직은 더 해볼 여지가 남아 있다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치열하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정말 치열한 것이었던가. 


정말, 치열하게 살았던 것일까. 이 남자의 눈물처럼, 땀처럼. 


울지라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이 남자처럼, 눈물을 흘려도 포기하고 싶지는 않다는 이 남자처럼 바보스럽게 치열했던 적이 있었던가.






“이한 씨, 정말 바보야.”






그런데 이 바보 같은 남자가 왜 이렇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일까. 이 남자의 눈물이, 땀이, 시퍼런 멍이 왜 이렇게.






*






“뭐 하나 물어봐도 되나? 이한 씨?”






이한을 향해 돌아누운 서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의 이마에 있던 물수건이 떨어졌다.


어차피 이마에 열도 없다. 찬 물수건은 아직 찬기를 유지하고 있다. 물수건을 옆으로 밀어놓고 서진이 이한을 바라봤다.






“뭘요?”


“복싱 포기한 거, 정말 후회 안 해?”




“후회 안 해요.”


“정말 좋아했잖아.”




“뭐, 그렇긴 한데.”


“울 정도로 좋아했잖아.”




“아, 형. 그게 언제 적 일인데.”






서진의 말에 이한이 그런 때도 있었다는 걸 기억했는지 당황해버린다. 


생각해보니 서진 앞에서 울었던 적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너무 억울하고 속상해서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었잖아. 혼신을 다하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다고 그랬잖아. 혼신의 한 방을 날려 봤어?”


“아니요.”






“그 한 방을 날리기 전에는 포기할 수 없다고 멋지게 말하더니, 겨우 동생 앞에서 결심이 무너진 거야?”


“전 아직 링 위에 있어요.”




“응?”






이한이 만지작거리던 핸드폰을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서진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때와 변함없이 빛나고 있는 눈동자였다.






“저 아직 링 위에 있다고요. 여기, 이 자리에.”


“무슨 링?”




“제 삶이요.”






이한이 빙그레 웃었다.






“전 남들처럼 말을 잘 못하지만, 그래서 가슴속에 있는 걸 그대로 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이것만은 말할 수 있어요. 


전 아직 링 위에 있고, 제 한 방은 아직 날리지 않았어요. 아직 혼신의 한 방을 만들지 못했어요. 


그래서 제 시합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전 링 위에서 내려갈 생각이 없어요.


이전의 제 주먹이 상대방의 얼굴을 향했다면 지금 제 주먹은 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세상을 향해 날리고 있어요.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지만 두 다리, 두 손, 그리고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제가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전 지금도 링 위에서 뛰고 있는 걸요.”






이한이 두 손을 펴 보인다.






“오늘 처음으로 케이크를 만져보았는데 제 생각보다 훨씬 더 약하고 부드러웠어요. 그래서 조금만 힘을 줘도 망가져버렸어요. 


우스웠어요. 전에는 링 위에서 있는 힘껏 주먹에 힘을 실어 날렸는데 지금은 힘주면 부서질까 조심해서 케이크를 옮기고 있는 절 보면서요. 


그런데 마냥 우습지만은 않은 것이, 이것도 제 삶의 일부라면 전 이제 케이크와 빵과 싸울 생각이 들었거든요. 


글러브가 아닌 빵칼을 들고 있더라도 제가 앞으로 나가는 걸 멈추지 않는 이상 전 여전히 링 위에 서 있는 거니까, 이건 포기한 게 아니잖아요?”




“말 잘하네. 뭘 말을 못해? 잘만 말하는구먼.”






서진이 싱긋 웃었다. 역시 이 남자의 말을 듣고 있으면 우울했던 마음이 사라진다. 


이 남자는 정오의 따뜻한 햇살과도 같은 남자, 그리고 우울했던 마음에 단비를 내리는 남자. 


이 햇살이, 이 단비가 어느새 삶의 일부처럼 스며들어버려서 이 남자가 좋아진 것이리라.






‘게이’






은서의 말을 떠올리며 서진이 혼자 웃었다.






‘게이’라는 말이 우스웠다. 한 번도 남자를 좋아해본 적도, 좋아해볼 생각도 한 적 없다. 


그런 취향이 있냐고? ‘아니올시다에 사양하겠습니다’다. 


세상에 예쁜 여자들이 많이 있는데 뭐하라고 떡대 같은 남자를 좋아하겠는가.






그런데 좋아한다. 확실히 이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번도 육체적인 관계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다


. 뭘 어떻게 해볼 생각도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런 생각은 없다. 


그저 이 남자가 이렇게 따뜻한 모습으로 언제까지나 자신을 비쳐주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외로울 때 힘이 되어주고, 아플 때 위로가 되어주고, 혼자 있기 힘든 시간에 전화하면 달려와 줄 수 있는 그런 친구로 남아있어 주기를 바랐을 뿐이다.






채은서. 그 여자를 딱히 질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거다. 


처음에는 이 바보 같은 남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자라는 생각에 신경이 쓰였다. 


똑똑하게 보이는 예쁜 여자. 가만히만 있어도 남자들이 줄을 설 그런 타입의 여자가 하필이면 이 바보 같은 남자와 사귄다는 것이 신경 쓰이지 않으면 뭐가 신경이 쓰일까. 






이 남자는 속아도 속는 것을 모를 것이다. 그래서 예민해졌었다. 


하지만 곧 우스워졌다. 이 남자에게서 뭘 빼앗을 것이 있기라도 해야 뭔가 노리고 접근했다고 오해를 하지? 이 남자는 가진 것이 진짜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신경이 쓰인 것은, 그 여자 때문에 이제 이 남자가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이 남자가 자신을 만나러 오지 않으면 자신은 또 다시 혼자가 된다.


스스로 가두어놓은 이 조용한 카페에서 혼자가 되어버린다. 유일한 친구인 이 남자가 오지 않으면. 






하지만 그런 두려움의 반대로, 이 남자가 이젠 행복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너무 오래, 치열하게 달려왔던 이 남자가 이제는 그 멍투성이 손안에 행복이라는 걸 잡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다. 






이 남자는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질 자격이 있다. 


충분히 달렸고, 충분히 울었고, 충분히 멍들었고, 또 충분히 아파했다. 


이제는 이 남자가 행복해질 시간이다. 세상에서 제일 바보 같았던 남자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질 시간이다. 


그런데, 그 행복 앞에 혼자 남겨질 자신이 두려워 마음으로 그 행복을 축하해주지는 못한다.






“그리고.”






두 손을 내려다보던 이한이 조용히 웃는다.






“겨우 동생이 아니라, 가족이니까요. 가족이요. 믿겨져요? 형? 제게 가족이 생겼다는 게… 지원이, 그리고 은서 씨.”


“피가 안 이어졌는데도 그렇게 소중해?”






가족이라 말하지만 실은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타인과, 절반 밖에 섞이지 않은 타인에 가까운 존재들이 아닌가.






“피가 이어져 있어야 가족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피보다는, 마음이.”






이한이 손바닥을 가슴에 올려놓는다.






“여기가 이어져 있으니까, 그게 진짜 가족이잖아요. 서로를 보고 싶어 하고, 서로를 걱정하고, 또 서로를 생각하는 가족.”






서로를 보고 싶어 하고…서로를 걱정하고…서로를 생각하는…






서진이 문득 지금도 지갑 안에 넣고 다니는 사진 속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은 많이 변했을 것이다. 여섯 살 때 마지막으로 찍은 사진이니까 지금은 부쩍 자랐을 것이다.






여덟 살. 어쩌면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자랐을지도 모른다. 


피가 섞이지 않은 딸. 그러나 6년 동안 딸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했던 아이. 






6년의 마음은, 6년의 사랑은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6년의 마음 때문에 아직도 사진을 버리지 못하고 지갑 안에 넣어둔 것일까. 


어느 어두운 밤에 혼자 몰래 사진을 꺼내보는 이유는, 6년이 지나도 마음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일까.


가족이기 때문일까.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마음으로 사랑했던, 마음으로 이어져 있던 그 흔적이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그만 가봐, 이한 씨.”


“네? 하지만.”




“나 이제 열도 다 내렸고, 괜찮아”


“그래도.”






그때였다. 딸랑거리며 출입문 쪽의 풍경이 울린다.






“아, 은서 씨 왔나 봐요.”






이한이 일어서자 누워있던 서진이 따라 일어난다. 그리고 이한의 등을 떠밀었다.






“은서 씨 데리고 집에 가.”


“형.”






서진의 손에 등이 떠밀려 이한이 카운터 너머로 나오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은서가 이한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걸어왔다.






“죽 사왔어요!”






은서가 손에 들고 있던 죽 가방을 흔들었다. 늦게까지 문을 열고 있던 죽 가게에서 사온 전복죽이었다. 


서진은 얄밉지만 이한을 봐서 사온 것이다.






“죽은 고맙게 먹을 테니까, 은서 씨. 이 바보 데리고 그만 돌아가요.”






서진이 은서의 손에서 죽 가방을 받아들고 대신 이한을 은서에게로 떠밀었다. 그리고 뭔가 생각난 듯 말한다.






“이번 일요일 집들이 갈 때 뭐 필요한 거 있어요? 내가 사갈게.”




“.....”






이 인간이 낮과 다르게 왜 이렇게 변했나 싶어 은서가 서진을 쳐다본다.






‘분명히 이한 씨 앞이라서 착하게 구는 거야. 우와, 위선 쩌는 인간.’






은서가 눈을 깜빡이다가 생긋 웃으며 대답한다.






“두루마리 화장지나 잔뜩 사다주세요. 있어도 있어도 모자라네요.”


“은서 씨?!”




“.....”






벙 쪄 있는 두 남자를 향해 회심의 한 방을 날린 은서가 이한의 팔에 손을 건다. 그렇게 팔짱을 낀 채로 은서가 이한을 끌다시피 문을 향해 걸었다. 








그녀는 아직 씻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한의 몸에서도 땀 냄새가 나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서 함께 씻는 유쾌한 상상을 하며 은서가 발랄하게 걸음을 옮겼다.






*






“.....”






두 사람이 돌아가고 나자 서진이 구석에 놓인 케이크 봉투를 발견했다.






“뭐, 저거 없어도 충분히 달달하겠네.”






저건 달달하지 못한 자신이나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서진이 케이크 봉투를 들려다말고 핸드폰을 꺼낸다.


어느새 시계는 열한 시가 넘어가 있었다. 망설임 끝에 서진이 핸드폰을 누른다. 


잠시 신호가 가고 수화기 너머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난데.”






서진의 목소리에 여자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진다.






“학교에, 언제 가야 해?”






새카만 유리창에 ‘세나’라는 두 글자를 쓰고 그 앞에 ‘우’ 자를 덧붙이며 서진이 가만히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선물을 뭘로 사가지고 갈까 하고. 초등학생에게 필요한 것이 뭘까, 하고.






*






“그래서 케이크를 한 입도 먹지 않았다고요?”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여운 표정을 한 이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을 바라는 그런 아이의 표정과도 비슷했다.






“케이크 가게에서, 케이크 만드는 일을 배울 사람이, 그걸 한 입도 먹지 않았다는 게 말이 돼요?”


“그래도, 단 걸 많이 먹어서 살이 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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