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희 - 6부

미희 - 6부

M 망가조아 0 1247

미희 - 6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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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야식을 먹고 다시 책상에 앉은 참이었다. 씻고 나온 지헌이 등 뒤에 다가왔다. 나는 모른 척 교과서로 시선을 내렸다.




“이거 마저 정리하고.”




“내일 내가 도와줄게.”




어깨의 뭉친 부분을 은근슬쩍 주물럭거린다. 어쩐지 끈적한 느낌이다. 나는 모른 척 지헌의 손길을 밀어냈다.




“네가 해 주면 무슨 소용이야. 내가 해야 공부가 되지.”




“지금까지 잘만 받아 와 놓고 왜 딴소리야.”




지헌은 뒤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몸을 치댔다. 나는 몸을 비틀며 지헌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아, 그만 좀 해.”




지헌은 교과서를 확 덮고 내게 눈을 맞추었다.




“이거 정리해 둔 거 있어.”




“뭐?”




며칠째 판례 정리한다고 개고생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냥 지켜봤단 말이야? 방심한 사이 지헌의 입술이 뺨에 닿았다. 나는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인상을 썼다.




“왜 진작 안 줬어?”




“네가 직접 해야 공부된다며.”




“지금 내놔.”




“하하. 이럴 줄 알고 안 줬지.”




뻔뻔스러운 대답에 약 오른 얼굴로 지헌을 노려보았다.




“그러지 말고 나랑 놀자니까. 편한 길 놔두고 뭐 하러 고생을 해.”




“언제는 고생하면서 공부한 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면서.”




아 그러셔? 지헌은 책상에 비스듬히 기대앉으며 중얼거렸다.




“이거 말고 강사가 준 자료도 있긴 한데….”




“…….”




멈칫 지헌을 돌아보았다. 지헌은 네가 이래도 안 넘어오냐는 듯 자신만만한 얼굴이었다.


나는 최대한 관심 없는 척 무덤덤하게 물었다.




“무슨 자료?”




“몰라. 이우철 강사님이 GS 3기 반에 뭐 뿌렸다던데.”




덥석 미끼를 물었다.




“A급 문제 벌써 돌았어?”




“그건 아닐걸.”




“모강 끝나고 유형별로 정리한 자료 말하는 거야?”




“글쎄? 잘 기억이 안 나네. 수업 끝나고 급히 받은 거라서.”




지헌은 고개를 기울이며 싱긋 웃고는 책장에 꽂힌 책을 빼서 파라락, 넘기며 딴청을 부렸다.




“문제가 조잡하다. 개정판도 아니고. 이건 대충 목차 잡는 연습만 하고 버려.”




“야, 대답해 보라고.”




답답해서 채근하는 말에 지헌은 삐딱하게 서서 얄밉게 중얼거렸다.




“말해 주면 뭐 좋은 거 있나.”




“…….”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다가 지헌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곤 스스럼없이 입 속에 혀를 넣었다. 지헌은 기다렸다는 듯이 내 혀를 빨아 댔다. 진하게 혀를 섞다가 지헌의 다리가 침대 기둥에 걸려 둘 다 침대 위로 쓰러졌다.




“나쁜 놈아.”




“응, 나도 사랑해.”




“너 때문에 오늘 공부도 다 망했어. 시험 떨어지면 네 탓이야.”




천장을 향해 누워서 중얼거렸다.




“이러다 너 혼자 시험 붙는 거 아냐?”




“…….”




“너 그럼 가만 안 둬.”




“…….”




“내 말 듣고 있어?”






고개를 내려 아래를 보았다. 원피스 잠옷 아래로 사람 머리통이 불룩이 솟아 있다. 치마 속에 머리를 처박은 지헌이 팬티를 벗겨 내고 젖은 입구를 파고든다.




“너도 내년에 2차 봐야 해.”




“…….”




“응? 알았냐고.”




말도 안 되는 생떼란 건 나도 안다. 그저 불안한 마음에 지헌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뿐이다.




내 닦달에 지헌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손에 든 팬티를 툭 침대 아래로 떨어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내가 말도 안 되는 투정을 부려도 지헌은 모두 받아 주었다. 거짓된 약속이라도 지헌의 대답을 듣고 나면 마음이 편했다.




“나 혼자 망할 순 없지.”




혼자 고개를 주억거리며 하는 말에 지헌이 툭 말을 던졌다.




“너나 지조 지켜라.”




“무슨 말이야? 내가 붙을 정도면 당연히 너도 붙겠지.”




“그딴 거 알 게 뭐야.”




지헌은 시선을 내게 박고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매일 계속되는 관계에 부풀어 오른 돌기는 빨갛게 충혈되었다. 그 부분을 지헌이 몇 번 문지르자 진하고 끈적한 애액이 흘러나왔다.




“시험 얘기가 아냐.”




“…뭐?”




흐릿한 눈동자로 물었다. 지헌은 부어오른 구멍 속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이미 촉촉하게 젖은 틈새는 지헌의 손가락을 무리 없이 삼켰다.




“여기 말이야.”




그곳으로 느릿느릿 손가락을 넣었다 뺐다 반복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지조를 지키라는 건, 앞으로 평생 여기에 내 것만 넣으라는 거야.”




“…….”




“그러면 나도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손가락이 좁은 구멍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흐릿하게 신음했다.




“흐읍… 흐으응.”




“평생 내 앞에서만 옷을 벗고 내 좆만 품으라고.”




지헌은 내 귀에 입을 대고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곤 뱀 같은 혓바닥으로 내 볼을 길게 핥아 올리고 축축한 혀를 귓속에 집어넣었다. 왠지 모르게 음험한 기운이 느껴져 소름이 돋았다.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대답 안 해?”




길어진 침묵에 얼굴을 찌푸리며 물어 온다.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그러고 있잖아. 네가 없으면 곤란한 건 나야. 알잖아.”




네가 없으면 나는 정말로 곤란하다고. 속으로 조용히 되뇌었다. 지헌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양쪽 입가를 쭉 끌어 올렸다. 참 웃는 것도 께름칙했다.




“고마워. 네 선택 후회하지 않게 앞으로 내가 잘할게.”




지헌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나는 어색하게 마주 웃었다.


미래를 말할 때마다 나는 말을 흐리고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지헌도 그걸 알아챘는지 벌을 주듯 내 귓불을 이로 아프지 않게 깨물었다.




“내가 너 많이 봐주는 거 알지? 그러니까 앞으로는 나 걱정시키지 마.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마.”




“…….”




“난 그거면 돼.”




부담스러운 눈빛이 쏟아진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서 지헌의 눈빛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저런 시선을 마주하면 마음이 갑갑해진다.


나는 시선을 피하며 지헌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붙였다. 자연스럽게 내 위에 올라타는 지헌을 잡으며 문득 제안했다.




“뒤로 할래?”




이런 순간에도 가능한 빨리 끝내고 자료를 받아야겠다고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뒤로 하는 건 너무 부담되는 자세지만, 최대한 빨리 지헌을 사정으로 이끌 수 있었다.


지헌은 멈칫하고 나를 보았다. ‘그럴래?’ 하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지만 내심 바라 왔다는 걸 안다.




나는 지헌의 앞에 엉덩이를 내밀고 엎드렸다. 보지 않아도 뒤에서 몸 구석구석을 핥아 대는 집요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시선만으로 애무당하는 기분이었다. 다리 사이가 두근두근 맥박 치면서 끈적이는 액체가 실처럼 흘러내렸다.




“벌써 넘쳐흐르네.”




지헌은 천진하게 중얼거리며 가운데 구멍을 만지작거렸다. 구멍 주위는 이미 애액으로 흥건했다. 지헌은 애액이 묻은 손가락을 혀로 할짝이며 나를 보았다. 음욕에 찬 눈동자가 번들거린다.




놀라서 흠칫 한 발 움직이는 나를 붙잡고, 지헌은 어깨를 지그시 누르며 상체를 더욱 낮게 만들었다. 덕분에 엉덩이는 더욱 높이 추켜올려져 지헌의 성기와 자연스레 맞닿았다. 지헌의 성기는 잔뜩 독이 올라 금방이라도 뚫고 들어올 듯 아래를 찔러 댔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 기대감과 긴장감으로 손바닥에 땀이 고여 이불에 쓱 닦아 내고 단단히 움켜잡았다.


지헌의 성기가 갈라진 틈새를 묵직하게 파고든다.




“으응, 으….”




밀려드는 압박감에 저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반쯤 들어왔다가 느리게 빠져나간 지헌은 다시 묵직하게 밀고 들어왔다. 부풀어 오른 성기가 구멍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가 다시 반쯤 드러나기를 몇 번. 점점 속도를 높여 갔다.


탁탁, 온몸이 뒤흔들릴 정도로 속도가 빨라졌다. 지헌은 그의 무게까지 합쳐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듯 강하게 내리쳤다.




“흐읍… 흡… 흣.”




그때마다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도 모르게 한 발 앞으로 기어가자 지헌은 허리를 단단히 틀어쥐고 주르륵 끌어당겨 사납게 파고들었다. 시야가 마구 흔들려 어지러웠다.




평상시 그는 내게 더없이 자상하지만 가장 솔직한 순간에 못된 본성이 튀어나왔다. 


가끔은 내게 화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마지못해 지헌에게 온 것을 그도 잘 알고 있다. 나를 좋아하는 만큼 꼬여서 뒤틀린 그의 애증.




동정은 참을 수 없지만, 증오는 참을 수 있다. 나는 엉덩이를 높이 치켜들어 지헌이 더 깊이 들어오도록 했다. 


지헌이 나를 괴롭힐수록 미치도록 흥분되면서 지헌이 짓이기는 대로 망가지고 싶은 충동이 불쑥 솟구쳤다.


거기에 자극받은 듯 지헌의 움직임도 더욱 격렬해졌다. 허리를 들쳐 올리며 입매를 꾹 다문 채 쾅쾅 거칠게 몸을 부딪쳐 왔다.




“흐으… 으응… 읏.”




헐떡이는 신음이 더욱 높아졌다. 살 부딪히는 소리와 내 교성으로 방 안이 후끈 달아올랐다.


어느 순간 지헌은 내 허리를 바짝 움켜잡고 더 깊이 결합하지 못해 안달 난 몸짓으로 내게 파고들었다. 그 순간에 맞춰 나도 몸을 경직시켰다.




“하아… 미희, 미희야.”




지헌은 거칠게 숨을 내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내게 집중한 채 미간을 찌푸리며 사정하는 얼굴이 꽤 섹시했다.


나도 입을 벌린 채 가쁘게 숨을 내쉬며 쾌락의 여운으로 몸을 떨었다. 온몸이 나른하면서 비정상적으로 예민했다. 지헌은 홀린 듯 나를 보더니 입 속에 손을 넣고 물컹한 혀를 만졌다.




판타지라고 해야 하나, 이게 지헌을 미치도록 흥분시킨다는 걸 안다. 뒤에서 깊이 삽입한 상태로 사정하면서 내 입 속에 손을 넣어 물컹한 혀를 만지는 것. 


어떤 포인트에서 흥분하는지 알 듯도 하다.


나는 살짝 눈을 내리뜨고 지헌의 손가락을 끈적하게 빨아들였다. 부드러운 손길이 머리를 쓰다듬는다.




“넌 이럴 거면서 꼭 빼더라.”




“…….”




“나 안달 나게 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지?”




지헌의 손에 막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벌어진 입가로 끈적한 침이 흘러내렸다. 젖은 눈으로 지헌을 올려다보았다.




빨리 자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잊혔다. 가끔은 내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의 괴리에서 머뭇대다가 지헌과 몸을 섞으면 몸이 마음대로 제어가 안 되었다.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는 걸 알면서도 자극적인 흥분을 쉽게 놓을 수 없었다. 시험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정지헌과의 섹스에 매달렸다.




지헌은 나를 일으켜 세워서 마주 보게 앉혔다. 여전히 깊이 결합한 채였다. 그 상태로 느리게 허리를 회전하며 성기로 안쪽을 문질렀다.




“으응… 응.”




나는 여전히 쾌락에 빠진 몽롱한 얼굴로 허리를 들썩였다. 욕망의 잔재가 몸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나른하면서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 감각에 몸이 떨렸다. 지헌은 작게 경련하는 등허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안정시켰다.




“비 와서 그런가. 오늘 유독 뜨겁네.”




멍한 눈으로 지헌을 보았다.




“몰랐어? 우리 집에 처음 온 날도 그렇고, 술 먹고 와서 잔 날도 그렇고. 난 비 올 때마다 네가 그런 기분이 드나 했지.”




“…….”




“너 잘 때도 보면 비 오는 날에는 유독 내 품에 파고들던데.”




내가 그랬던가?




생각해 보니 처음 지헌의 집에 온 날도 그리고 술 먹고 지헌의 집에서 외박한 날도 비 오는 날이었다. 더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엄마가 나를 두고 도망간 날, 엄마와 야반도주한 날에도 비가 왔었다.


나도 모르는 나를 지헌은 꽤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널 비 올 때 내보낼 수 있겠어? 아무 놈이나 붙잡고 끼 부릴 텐데.”




“…….”




지헌은 부풀어 오른 가슴을 만지며 웃었다. 달아오른 몸이 천천히 식는다. 멍한 눈동자가 현실로 돌아와 차분히 가라앉았다.






지헌이 나를 찾아 집에 데리고 들어온 날 밤, 지헌은 밤새 내 손을 잡고 안아 주었다. 답답했지만 많이 외로웠던지, 안정감 있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그냥 이렇게 안주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래서 잊고 있었다. 정지헌은 좋다가도 한 번씩 이렇게 사람 신경을 건드린다는 걸. 어디 얼마나 고분고분해졌나 볼까, 시험하는 것처럼 일부러 내게 자극적인 말을 던지고 반응을 지켜보았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내 미소에 지헌은 더 환하게 웃으며 달아오른 젖꼭지를 꼭 누르고 튕기며 장난스럽게 가지고 놀았다.


나는 손을 뻗어 지헌의 목을 끌어안고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허리는 여전히 위아래로 들썩이며 느릿하게 움직였다.




“그러네. 생각해 보니 첫 경험도 비 올 때 했던 것 같아.”




“…….”




“여름 장마철, 딱 이 시기에.”




지헌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지헌은 쓱 시선을 들었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듯 차가운 눈빛에 순간 웃음이 터질 것 같아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왜 이렇게 얼굴이 굳었어. 표정 풀어. 무섭잖아.”




지헌의 두 볼을 손으로 감싸 안고 눈을 맞추었다.




“응?”




장난스럽게 웃으며 지헌의 귓불을 깨물었다. 뒤로 몸을 피한 지헌은 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말없이 서랍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얼굴에는 강한 불쾌감이 실려 있다.




나는 쟤 저럴 때가 제일 귀엽더라. 자극 주면 주는 대로 즉각 반응할 때. 물론 나도 그걸 뻔히 알면서 속을 긁는 거지만.




“우리 콘돔 없이 한번 해 볼래?”




경쾌하게 제안했다. 순간 지헌이 멈칫했다.




“…진심이야?”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라이터를 찾으며 서랍을 뒤적이다가 돌아보는 얼굴이 어처구니없어 보였다.




“응.”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발목을 까닥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헌은 팔짱을 끼고 탁자에 몸을 기대었다. 이건 또 무슨 꿍꿍이인가, 가늠하듯이 나를 보았다. 나는 지헌의 하체를 턱짓했다. 얼굴은 냉랭한 주제에 아래쪽 성기는 한껏 부풀어 있었다.




“맨살에 닿는 느낌이 궁금해. 지금보다 더 죽이겠지?”




“싫어.”




좋다고 달려들 줄 알았더니 지헌은 의외로 단칼에 거절했다. 그런 제안을 한 것은 장난 반 진심 반이었다.




지헌의 신경을 긁으려고 호기롭게 던진 말이기는 하지만 은근히 궁금하기도 했다. 맨살에 비벼지는 느낌은 어떨까. 잠자리 궁합은 서로 꽤 잘 맞는 편인 것 같으니 맨살로 하면 훨씬 더 좋겠지.




“오늘 안전한 날인데? 안에 사정만 안 하면 되지. 이런 기회 다신 없어. 오늘 비 와서 특별히 제안하는 거야.”




“갑자기 왜 이래.”




“네 말대로 비 와서 유독 몸이 달아오르나 보지.”




지헌은 노련하게 나를 흥분시킬 수 있고, 나는 지헌의 기분을 순식간에 시궁창에 처박을 수 있는 재주가 있다. 유치한 짓이란 건 알지만, 이렇게라도 해야 기분이 풀렸다.




“그만해.”




지헌은 이 주제로 더는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대화를 끊었다.




“왜, 이전에 실수한 적 있어서?”




부지불식간에 말이 튀어나왔다. 공공연히 떠돌던 소문을 당사자 면전에 대고 물은 꼴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지헌의 얼굴을 보고 뒤늦게 아차, 싶은 생각이 들긴 했는데, 뭐 아예 없는 말을 지어낸 건 아니니까. 솔직히 대답이 궁금하기도 하고.




나는 얄팍한 호기심을 담아 지헌을 보았다.




“후….”




짧게 숨을 내쉬며 얼핏 입술을 비틀어 웃는 지헌을 본 것 같다. 불길해 보이는 미소였다. 


지헌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툭 책상 위로 던지고 성큼성큼 내게 다가와 손을 뻗었다.




“뭐, 뭐야…!”




순식간에 커다란 체격이 나를 덮쳤다. 놀라서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지헌이 우악스러운 아귀힘으로 내 뒷덜미를 움켜잡고 바짝 끌어당겼다. 


밀착한 채로 강렬한 눈동자가 내게 부딪쳐 왔다.




“…….”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나는 꿀꺽 긴장된 침을 삼켰다. 생각보다 예민하게 나오시는데. 아킬레스건은 고학번 선배가 아니라 오은성이었나. 지헌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손등으로 내 볼을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어쩐지 사람을 움찔하게 했다.


나는 슬쩍 눈을 내리깔아 볼을 쓰다듬는 지헌의 손을 보고 다시 시선을 올려 지헌을 경계했다.




“너 임신해도 난 괜찮아. 근데 네가 괜찮지 않으니까.”




대답은 묘하게 비껴갔다. 난 과거를 물은 것이지, 우리의 관계에 대해 질문한 것이 아니었다.




“내 말이 틀려?”




“글쎄, 그건 좀 다른 문제 같은데.”




임신해도 괜찮다니, 뻥치시네. 허세라고 생각했다. 정작 사고 치면 자기도 곤란해할 거면서.




애매하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말에 지헌이 뒷덜미를 힘주어 잡아 흔들며 억지로 시선을 고정했다.




“읏.”




“대답해. 내 말이 틀려?”




정색하는 반응에 나는 천천히 얼굴에서 웃음기를 거뒀다. 지헌의 눈동자는 격렬하게 타올랐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짧은 침묵 후 순순히 인정했다.




“난 안 괜찮아. 임신이라니… 상상만 해도 끔찍해. 괜히 한번 객기 부려 본 거야. 정신 차리게 해 줘서 고마워.”




임신이라니, 상상하기조차 싫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지헌의 얼굴에는 더욱 강한 불쾌감이 드러났다.




“뒤로 엎드려.”




단호히 명령을 내리고 내가 움직일 새도 없이 억지로 몸을 뒤집었다. 그러곤 한 손은 허리에 두르고 나머지 한 손은 앞으로 돌려 도톰한 돌기를 짓눌렀다. 


아래쪽이 음란하게 젖어 가고 야릇한 감각이 온몸에 퍼져 나갔다.




“하아… 흐읍.”




질퍽하게 무르익은 구멍 안으로 지헌의 손가락이 들어왔다. 나는 지헌의 손짓에 맞추어 엉덩이를 들썩였다. 몸과 마음이 급속도로 무너져 내려 쾌락만이 내 정신을 지배했다.




지헌은 손가락을 빼내고 그가 집요하게 괴롭히던 젖은 입구에 대고 굵은 성기를 끈적하게 문질렀다.




“흐읏… 흡.”




나는 미열에 들떠 흐느꼈다. 구멍에서 애액을 흘리며 도톰한 유두는 침대에 문지르고 부풀어 오른 음부는 지헌의 성기를 향해 들썩이는 모습이 얼마나 음탕하고 자극적인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헌의 귀두 끝에서 투명한 분비물이 흘러 내 엉덩이 골 사이로 뚝뚝 흘렀다. 끈적한 액체는 갈라진 틈새를 따라 흘러 허벅지 아래로 묵직하게 떨어졌다. 그 감촉이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다.




“응, 빨리, 빨리.”




나는 이성을 잃고 손을 뒤로 돌려 지헌의 허벅지를 잡아당겼다.




“제대로 느꼈나 보네.”




지헌은 중얼거리며 허리를 움켜잡고 단숨에 나를 꿰뚫었다. 숨이 멎는 것 같다. 


흐드러지게 만개한 그곳으로 지헌은 거칠게 짓누르듯 파고들었다. 젖은 마찰음이 울리고 침대가 거칠게 삐걱댔다.




“으응… 으읏… 흣.”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고 억제할 수 없는 흥분이 나를 몰아갔다. 나는 연신 젖은 신음을 내며 흐느꼈다. 어느 순간 내가 경련을 일으키듯 자지러졌다.




“왜, 아파?”




지헌은 능청스럽게 중얼거리며 내가 반응하는 곳을 반복적으로 찔러 올렸다. 일부러 알고 하는 짓이 분명했다. 한계를 넘는 쾌락에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았다. 강한 자극에 주체하지 못하고 흐느끼다가 앞으로 기어갔다.




“아니면 좋아 죽겠어?”




지헌은 골반을 잡고 쭉 끌어당겨서 퍽 하고 몸을 부딪쳐 왔다.




“으응, 으흐.”




팔다리가 후들거려 앞으로 무너지는 몸을 지헌은 뒤에서 단단히 껴안았다.




“응? 말 좀 해 봐. 네 목소리 듣고 싶어 죽겠으니까.”




손은 앞으로 돌려 도톰하게 발기한 음핵을 거침없이 뭉개며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때마다 질이 수축해 희고 끈적이는 액체가 다리 사이로 흘러내렸다. 


나는 바들바들 몸을 떨며 불규칙한 호흡을 토해 냈다.


그때였다.




“실수한 적 없어.”




지헌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이어서 소름 끼치도록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너한텐 실수하고 싶은데.”




“……!”




쾌락에 푹 젖어서 흐물거리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실수하고 싶다는 의미가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기도 전에 지헌은 무심히 말을 이었다.




“너 왜 나 모르는 척했어.”




“…뭐?”




멍해서 되물었다.




“너 카드 쓰면 나한테 메시지 오는 거 몰랐어? 오은성이랑 나 놀이터에서 봤잖아.”




이를 악물고 말끝에 힘을 실으며 다시 퍽, 하고 내게 몸을 부딪쳤다. 지헌은 깊이 박힌 채로 무언가를 참아 내듯 후,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지헌의 말과 완전히 맞물려서 맥박 치는 아래쪽의 느낌이 뒤섞여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채 해석하고 정리하기도 전에 지헌이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밀착시켰다.




“오은성은, 나랑 사귈 때부터 집착이 심했어. 아마 내가 외롭게 만들어서 그런 걸 테지만. 그러다 다들 아는 이야기대로 야구 선수하고 양다리를 걸쳤고, 휴학했던 이유는 자살 시도 때문이었어.”




“…….”




“또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다 말해 줄게.”




“…….”




“더 솔직하게 말해 볼까? 너 처음 이 집에 온 날. 행정법 자료, 사실 내 가방 안에 있었어. 너 꼬시려고 없다고 한 거야. 수업 전에는 늘 너 만나기 전에 자위하고 갔어. 학원 가기 전에 항상 씻었던 이유? 결벽증 있는 너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지 않고는 널 보면 늘 이 상태였다고!”




‘이 상태’에서 지헌은 부풀어 오른 성기를 과시하듯 허리를 회전했다. 질 안이 허리를 돌리는 그에 의해 넓혀졌다. 질끈 눈을 감고 진저리 쳤다. 느긋한 말투였지만 어쩐지 악의가 느껴졌다.




“그러고도 학원에서 새침하게 앉아 있는 널 보는 게 어찌나 곤혹스럽던지. 수업 가기 전에 혼자 샤워하면서 널 두고 무슨 상상 했는지 알면 넌 나를 죽여 버리고 싶을걸.”




“…뭐?”




상당히 놀라웠다.


난 정지헌도 나와 같이 충동적으로 유희를 즐긴 줄 알았다. 그렇게까지 내게 욕망을 품었을 줄이야….




수업 들어와서 더러운 눈으로 날 보며 속으로 온갖 더러운 상상을 했겠지. 그런데 내가 제 발로 걸어 들어와 오히려 적극적으로 즐기기까지 했으니 속으로 얼마나 신이 났을까.


그런 줄 알았다면 그날 밤, 자료를 찾는다는 핑계로 그렇게 쉽게 정지헌 집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함정을 파 놓고 기다리는 정지헌에게 속은 기분마저 들었다.




“너 놀이터에서 나 뻔히 봐 놓고 왜 모르는 척해! 왜 안 물어봐!”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지헌은 쉴 틈을 주지 않고 퍽퍽 몸을 부딪치며 다시 공격해 왔다. 나는 손을 뒤로 돌려 단단한 허벅지를 밀어내며 소리쳤다.




“그만, 그만해! 물어봐야 하는지 몰랐어. 그냥… 그냥 사생활이잖아.”




“사생활?”




지헌이 되물으며 쿡 웃었다. 같잖다는 웃음이었다.




“이런 사이에 사생활? 하여간 말은 잘해요.”




허리를 노골적으로 앞뒤로 움직이며 내가 느끼는 부위를 질겅질겅 찔러 댔다. 그때마다 물에 젖은 질퍽질퍽한 소리가 났다. 


나는 본능적으로 지헌이 나갈 때마다 아래를 움찔거리며 조이고 있었다. 지헌도 그걸 알고 나를 비웃었다.




“이렇게 꽉꽉 물어 대면서 무슨 사생활이야. 사생활 같은 소리 한다. 너 진짜 내가 실수해 줘?”




어? 어! 일부러 되물으며 위에서 강하게 허리를 내려쳤다. 어지러울 정도로 흥분과 분노가 몰려왔다.




“그거 알아? 넌 역시 뒤로 먹는 게 제일 맛있어. 이렇게 물을 많이 흘리는 걸 보면 너도 분명 날 좋아하는 것 같은데 말이지.”




일부러 내게 수치심 주는 말을 쏟아 내며 허리로 몸을 부딪쳐 오고 손으로는 결합한 곳을 노골적으로 더듬었다.


지헌이 부딪힐 때마다 시야가 어지럽고 머릿속이 빙글거렸다. 귓가에 악마 같은 지헌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악스럽게 내게 파고들던 지헌은 어느 순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곤 다급히 내 턱을 틀어쥐고 입술을 찾아 깊숙이 혀를 집어넣었다. 사정할 때 버릇이었다. 내 입 속에 손을 넣든 혀를 넣든 뭔가를 처넣어야 흥분이 돋워지는 모양이었다.




지헌을 밀어낼 기운도 없었다. 그저 머릿속이 하얬다. 가만히 입을 벌린 채 지헌에게 혀를 빨리며 가쁘게 숨만 내쉬었다.


짧고 강하게 혀를 빨아 댄 지헌은 이윽고 입술을 떼어 내고 축축한 혀를 내 귀에 밀어 넣고 속삭였다.




“아 참, 나 콘돔 안 했어. 안에다 해도 되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기겁하며 지헌을 밀어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너 진짜 안 돼, 죽여 버릴 거야.”




버둥거리는 날 지헌은 무지막지한 힘으로 단단히 옭아매었다. 그러곤 이미 깊숙이 결합된 상태에서 더 깊이 파고들지 못해 안달하듯 내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그의 하체를 콱콱 거세게 밀어붙였다.




완전히 맞물린 느낌이 너무 공포스러웠다. 나는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 쳤다. 


나의 거부가 지헌의 욕망을 한층 더 들끓게 하는 듯했다. 지헌의 움직임이 한층 더 그악스러워졌다. 눈빛을 번들거리고 짐승처럼 헉헉대며 포악한 본성을 드러냈다.


나는 기겁해서 도리질 쳤다.




“아, 안 돼. 하지 마! 진짜 장난 아냐! 하지 말라고!”




“흐읏. 흡.”




극렬하게 몸부림치는 나를 끌어안고 지헌은 내 안에 욕망을 풀어내며 후으, 후으, 흥분한 듯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 안쪽에서 잔뜩 부풀어 올라 뜨겁게 박동하는 존재가 느껴졌다. 폭력적이고 야만스러운 삽입이었다.




“하아… 하아.”




나는 흐릿한 신음을 내며 침대에 이마를 대고 숨을 헐떡였다.


지헌은 그의 성기가 들어 있는 위치를 가늠하듯 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목덜미를 느긋하게 핥아 올렸다. 역겨움과 굴욕감에 부들부들 몸이 떨렸다.




“아, 이런. 실수로 안에 해 버렸네. 너랑 있으면 늘 자제가 안 돼.”




나를 품에 끌어안으며 지헌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러곤 위로하듯이 다정히 내 등을 토닥였다.




“네가 너무 예뻐서 그래, 예뻐서.”




안쪽의 성기는 다시금 부풀고 있었다. 동물적인 자세로 깊이 결합한 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 뻔뻔스러움에 머리가 뜨겁고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당장 꺼져.”




이를 악물고 중얼거리는 말에 그는 무심히 답했다.




“한 번만 더 빼고.”




머릿속에서 불이 터졌다. 나는 발작적으로 울부짖으며 몸부림쳤다. 


지헌은 강한 힘으로 나를 포박하듯 껴안고 쐐기를 박듯 허리를 밀어 올렸다. 굵은 것이 아래를 벌리고 드나드는 느낌이 생생했다. 참을 수 없는 치욕감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지헌은 기어코 한 번 더 안쪽에 분출하고 내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러곤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헐떡이는 내게 느긋이 말했다.




“오늘 안전하다며. 설마 임신이 되겠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밀려왔다. 거칠게 울부짖으며 지헌의 얼굴을 후려쳤다. 지헌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제대로 얻어맞았는지 코에서 후드득, 피가 쏟아졌다. 그 상태로 잠시 멈칫하더니 천천히 원위치로 돌아왔다.




“…….”




서슬 퍼런 시선이 나를 향한다.


사람을 때려 본 건 처음이었다. 이렇게 머리가 뜨거울 정도로 화가 난 적도 처음이었다. 분노로 들쭉날쭉 거칠게 숨을 내쉬며 지헌을 노려보았다.




“…….”




무슨 일이라도 저지를 것처럼 잔뜩 날이 선 시선으로 나를 응시하던 그는 순순히 내게서 떨어졌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눈을 크게 떴다. 지헌은 콘돔을 착용하고 있었다. 내 시선이 향한 곳을 알고 지헌이 피식 웃었다. 눈빛에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이제 좀 안심이 돼?”




“…….”




나는 말없이 지헌에게 다가가 온 힘을 실어 얼굴을 갈겼다. 퍽, 살갗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연이어 맞은 부위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나는 침을 뱉듯 말했다.




“죽어 버려.”




지헌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오은성과 정지헌을 놀이터에서 본 날, 그날의 관계를 기점으로 우리는 서로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어떤 선을 넘어 버린 듯했다. 보지 말아야 할, 서로의 바닥을 봐 버린 기분이었다.




그해 여름 내내, 우리는 같이 공부하다가 별것 아닌 일로 격렬하게 싸우고 미친 듯이 몸을 섞었다. 그럴 때의 관계는 유독 더 자극적이고 뜨거웠다.


내 도발에 지헌은 안달 나서 달려들었다. 관계 중 격한 흥분을 이기지 못해 내 머리채를 잡거나, 움켜잡는 힘 조절을 못 해 멍 자국을 남길 때도 있었다.




우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고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갔다. 잘못된 관계라고 생각했지만 빠져나오기 어려웠다. 나에 대한 지헌의 집착도, 내 정신 상태도 위험 수위였다.


우리는 서로를 갉아먹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4일에 걸친 시험을 버텨 냈다는 자체가 대단했다. 


나는 살벌한 시험장 공기만 느끼다 오는 수준이었고 지헌은 잘 모르겠다. 우리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험 내내 냉전 중이었다.




여름이 지나가고 공기가 선선해질 무렵, 시험 결과가 발표되었다. 예상대로 내 이름은 명단에 없었다. 딱히 기대하지도 않아서 실망할 것도 없었다.


편하게 턱을 괴고 앉아서 스크롤을 내리며, 아는 동기들 이름이 있나, 누구 선배는 이번에도 이름이 없네, 대중없이 생각하며 둘러볼 때였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으로 명단을 확인하던 지헌이 당혹스러운 듯 턱을 매만졌다.




설마….




재빨리 아래쪽을 살펴보았다. 정지헌. 세 글자가 보였다.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뒤에 다가온 지헌이 위로하듯 내 어깨를 짚었다. 나는 돌아보지 않았다.




“형사소송법 구매하신다는 분 맞으시죠?”




나는 남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큰 대로변 앞에서 남자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뻘쭘하게 서 있었다.




“아, 네.”




남자는 어색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중고 거래 초짜인가. 나는 능숙하게 가방 안에서 책을 꺼내 남자에게 내밀었다.




“여기 책 있어요. 한번 확인해 보세요.”




“네, 뭐.”




남자는 책을 건네받아 파라락 건성으로 넘겨보더니 ‘말씀하신 대로 정말 깨끗하네요’ 하며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바지 뒷주머니에서 미적미적 지갑을 꺼내며 나를 흘끔거렸다.




“이번에 2차 보신 거예요?”




“네.”




남자의 지갑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빨리 거래를 마무리하고 제 갈 길 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남자는 천천히 돈을 세면서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았다.




“형소 되게 어렵지 않았어요? 올해 유독 과락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전 그나마 모교 교수님이 출제 위원이시라 선방한 편인데, 의외로 생각지도 못한 민소에서 불의타 맞아서요. 혹시 필요하시면 형소 자료 좀 드릴까요? 공부한 지 몇 년 되셨어요? 전 이번에 2차만 세 번째예요. 올해는 유예라 내년에는 1차부터 다시 봐야 하지만요.”




남자는 2차만 세 번째라면서 은근히 자랑하는 기색이었다. 줄 하나 없이 새 책처럼 깨끗한 내 책을 보고 초짜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저기, 제가 좀 바빠서요.”




남자의 말을 끊어 내고 흘끔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그 말에 남자가 조금 빨개진 얼굴로 돈을 건네주었다.




“아, 네. 바쁘신 분을 제가 너무 붙잡았네요.”




나는 남자의 눈앞에서 돈을 확인하고 깔끔하게 인사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저기, 잠깐 커피라도….”




돌아서는 나를 남자가 급히 잡았다. 이대로 헤어지기 아쉬운 얼굴이었다. 나는 남자가 움켜쥔 손목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땀에 끈적이는 감촉이 무척 불쾌했다.




“어디 들어가서 커피라도 마시면서 잠깐 얘기 나누지 않을래요? 보아하니 제가 수험 연차가 길어서 도움 드릴 게 많을 것 같은데요.”




자신이 거절당하리라는 걸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자신감에 찬 목소리였다. 나는 단호히 남자의 손을 털어 냈다.




“괜찮아요. 그리고 저 커피 알레르기 있어요.”




이래서 중고 거래는 남자들과 잘 하지 않는데.




남자와 접촉한 손목을 다른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끈적이는 감촉을 지우려 노력했다. ATM 기계에 들러 돈을 입금하고 서점으로 향했다. 


딸랑,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익숙한 주인아저씨가 눈빛으로 알은척을 해 왔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높다란 책장 앞에 섰다.




지헌은 절대 내게 현금을 쥐여 주지 않는다. 무조건 카드로 결제해야 했고, 결제 내역은 지헌의 휴대 전화로 실시간으로 전해졌다.


지헌의 눈을 피해 몰래 돈을 모으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었다. 


서점에서의 결제 내역이라 지헌은 의심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그렇게 모은 책을 다시 중고로 되팔았다. 다행히 수험용 서적은 환금성이 좋았다.


그래 봤자 푼돈이고, 이 돈으로 뭘 어쩌자는 건지 아무 계획도, 당장은 지헌을 떠날 용기도 없었다.




드르륵 주머니 안의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무시하고 계속 책을 넘겨 보았다. 드르륵드르륵, 휴대 전화는 끊이지 않고 울렸다. 


조용한 서점에서 진동음이 더욱 크게 들렸다. 주위에서 흘끗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시생들은 작은 소음에도 민감했다.


대충 손 닿는 대로 책을 집어 들어 값을 치르고 서점을 나섰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휴대 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 댔다. 울컥 짜증이 나서 휴대 전화 전원을 아예 꺼 버렸다. 진동음이 사라지자 한껏 곤두선 신경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고 충동적으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가능한 지헌이 있는 동네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기사 아저씨께 입에 밴 동네 이름을 말하고 나서야 아차 했다.




“아니, 그게 아니라….”




미터기를 켠 기사님이 의문 어린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니에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좌석에 몸을 기대었다.




드르륵드르륵, 이명음처럼 진동음은 계속 따라붙었다. 얼굴을 찡그리며 주머니에 손을 넣어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손안의 휴대 전화는 조용했다.


이러다 노이로제에 걸리겠어. 피곤함에 지쳐 눈을 감았다.




“도착했습니다.”




기사님의 목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창밖으로 익숙한 동네가 보였다. 저 길을 쭉 따라서 올라가면 새아버지의 가게가 나왔다. 


여기까지 오고서야 내게 남은 선택지는 정지헌밖에 없다는 걸 절감한다.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렸다.




“죄송해요. 아까 왔던 동네로 다시 가 주세요.”




기사님은 희한하다는 듯 백미러로 흘끔거렸지만 아무 말 없이 다시 차를 돌렸다.


오피스텔 현관에 들어서며 무심코 위를 올려다보았다.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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