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외전 2

짐승 계약 #외전 2

M 망가조아 0 1250

짐승 계약 #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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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은 한결 밝아진 마음으로 병원에서 나와 작업실로 향했다. 






가위에 손이 베였던 날 잠시 쉬는 게 좋겠다는 원장의 조언에 따라 쉬는 중에 세양그룹 일이 터져 한동안 아예 작업실을 나오지 못했다.


원장에게는 미리 전화로 양해를 구해 두긴 했지만 클래스 사람들도 뉴스를 봐서 자신의 일에 대해 다 알거라 생각하니 조금 걱정이 됐다.






“그냥 그 전처럼 편하게 대해요. 별로 달라진 건 없잖아요?






원장은 정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 전과 전혀 변하지 않은 원장의 태도에 희민은 한편으로는 안도했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을 텐데.’






희민이 그렇게 생각하며 건물로 들어가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아.”






발소리에 고개를 돌린 여자는 윤미리였다. 


전에 세양그룹 다니던 사람 아니냐고 물어봤을 때 당황을 숨긴 희민이 아니라고 거짓말했던 회원이었다.


뉴스를 봤는지 놀란 듯 보고 있는 미리에게 희민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땐 본의 아니게 거짓말하게 되어 미안해요.”






희민의 사과에 미리는 빠르게 손을 저었다.






“어머, 아니에요. 이해해요. 저라도 그랬을 거 같으니까요.”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생각보다 자신을 밝게 대해 줘서 희민이 안심한 얼굴로 웃었다. 그러자 미리가 마주 웃으며 말했다.






“오히려 그런 일이 있었는데 이렇게 씩씩하게 지내는 모습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회사로는 안 돌아가세요?”




“……고민 중이에요.”






희민이 살짝 난처해하는 미소를 지었다.






“다시 들어가면 좋겠네요. 희민 씨 존재가 다른 여자들에게도 희망이 될 수있게.”




“희망이요?”






미리의 말에 희민이 의문스럽게 눈을 깜빡였다.






“그런 역경을 겪고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 자체가 어떤 여자들에게는 삶을 살아가는 힘을 주거든요. 희민 씨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희민 씨 기사 보고 저도 그랬어요.”






미리가 조금은 민망해하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실제로 희민 씨가 잘 지내고 있는 걸 아니까, 여기서 열심히 작업하는 모습을 아니까. 나보다 더 힘든 일을 겪고도 꺾이지 않고 살아가는 희민 씨 보고 저도 힘을 얻게 되더라고요.”




“…….”






희민은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잠시 표정이 어두웠던 미리가 고개를 들고 싱긋 웃어 보였다.






“희민 씨가 당당하게 회사로 복귀하는 모습 보면 더 멋질 것 같아요. 아, 제가 너무 주제넘게 말했죠. 죄송해요.”






미리가 허둥거리자 희민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정말 희민 씨가 예전 제 롤모델이었거든요. 그때도 진짜 오래 망설이다가 물어본 거였는데……. 지금 희민 씨가 그때보다 더 대단해 보여요.”






자신의 롤모델이 건재하다는 사실이 기쁘다는 듯 웃는 미리에게 희민은 조금멋쩍은 얼굴로 마주 웃었다.






“그만 올라갈까요?”




“네. 그래요.”






두 사람은 함께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작업실로 올라가는 동안 희민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떤 일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역시 꺾이고 싶은 힘든 순간에 그 뉴스를 봤던 모양이다.






예전에 한창 매스컴을 탈 때도 자신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성과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 없었다.






그런데 지금, 뜻밖에도 타인의 말이 자신의 결정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일은 성과에만 집착했던 과거의 삶보다 훨씬더 의미 있는 삶을 가져다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일을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나락에 떨어졌던 자신 같은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디잉―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미리가 먼저 내렸다. 그녀를 따라 내리는 희민의 표정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




오랜만에 싱그러운 초록의 기운을 담뿍 받고 온 희민은 오늘 만든 꽃다발을 들고 저택으로 돌아왔다. 


은은한 빛깔의 장미가 주재료라 말려 두면 예쁠 것 같아 조심스레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유리가 다가왔다.






“2층 테라스로 가 보세요.”




“정혁 씨 거기 있어요?”




“네. 기다리고 계세요.”






정혁이 자신을 기다린다는 소리에 희민은 2층 넓은 테라스에 조성해 놓은 야외 데크로 향했다.


깔끔하게 관리되어 있는 정원으로 나가자 조명이 밝혀진 곳에 정혁과 어떤 남자가 스툴에 앉아 있었다.






‘손님인가?’






이 집에서 정혁이 누군가와 같이 있는 건 처음 봐서 희민이 의외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남자는 상당히 멀끔한 외모였는데 나이는 중년을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누굴까 생각하며 다가가는데 정혁이 기척을 느끼고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희민.”






그가 미소를 지으며 일어나서 희민이 걸어오기도 전에 그녀 쪽으로 먼저 다가갔다.






“저분은 누구세요?”






뒤에 있는 남자를 살피며 희민이 작게 묻자 정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부드럽게 웃었다.






“마침 오늘 만나기로 한 날인데 당신 소개시켜 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남자가 앉아 있는 쪽으로 정혁이 희민의 손을 잡고 이끌자 앉아 있던 남자도 몸을 일으켰다.






“인사해. 날 미국으로 보내 주신 분.”






정혁의 말에 희민의 눈이 살짝 커졌다. 


그를 미국으로 보내 주신 분이라면 어릴 때 신장이 떼인 그를 미국으로 보내 준 최 회장의 주치의라는 소리였다.






“아…… 안녕하세요.”






예상치 못한 만남으로 조금 당황한 희민이 고개를 숙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 회장님 주치의를 맡고 있는 정병훈입니다.”




“그럼 지금 정혁 씨 주치의를 맡고 계신 분이…….”




“정 박사님이셔.”




“아아, 그랬군요.”






상황을 파악한 희민이 조심스럽게 정 박사를 바라봤다. 


그녀가 상상한 이미지 보다는 훨씬 더 말쑥하고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뵙게 될 줄 몰랐는데, 어떻게 정혁 씨 주치의로 오시게 된 거예요?”






희민이 감동받은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자 정혁이 대답했다.






“내가 자리 잡은 뒤에 모셔 왔어.”




“먼 땅에서 떠돌아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태원 총수로 나타나서 정말 놀라지 않았겠습니까. 그 어린아이가 다 커선. 게다가 날 이상한 병원장으로 만들어서 감금시키고 말입니다.”




“세양의 표적 생활을 하는 것보단 갇힌 생활이 낫지 않았습니까. 박사님.”






정혁이 입술 끝을 늘이고 하는 말에 정 박사가 씩 웃었다.






“종종 바깥 생활도 했으니 갇힌 생활도 썩 나쁘진 않았지. 경호원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니 내가 꼭 회장인 거 같고 말이지. 앞으로는 자유롭게 다닐 수 있으니 그건 좀 아쉽게 됐군.”




“원하시면 계속 경호원 붙여 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어.”






희민이 웃음기 섞어 대화하는 두 사람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봤다.






둘의 대화를 들으니 상당히 친밀한 관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엇보다 정혁이 다른 사람과 이런 식으로 편안하게 대화하는 걸 처음 봤기에 희민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정 박사가 두 사람을 관찰하는 희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은 제가 희민 씨를 보고 싶어서 소개시켜 달라고 해서 기다린 겁니다.대체 어떤 분이시기에 이 감정 없는 인간을 이렇게 뜨겁게 만들어 놨나 무척궁금해서 말입니다.”




“아…….”






희민이 조금 민망한 얼굴로 웃었다. 그런 그녀를 정 박사는 따스한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한희민 씨 덕분에 제 마음의 짐이 많이 가벼워졌습니다.”




“저야말로 감사드려요. 그때 정혁 씨 구해 주셨다는 말 들었거든요. 언젠가 기회가 생긴다면 꼭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가까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그녀가 깊이 고개를 숙이자 정 박사가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건 그저 인간으로서의 최후의 도리 같은 거였어요.”




“그래도 감사드려요. 당시엔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셨을 텐데…….”






그때 정 박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의 정혁도 없었을 거고, 자신도 그와 만나지 못했을 거였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너무나 두려워지고는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 정혁을 구출해 준 정 박사에게 고마웠다.






그 뒤로 자신 역시 세양그룹의 감시를 피해 평생 떠돌아다녀야 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그가 말하는 최후의 인간적 도리를 선택했다. 


자신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해 보면 쉽게 결정내리지 못할 정도로 힘든 결정을 정 박사는 해 준 거였다. 정혁을 위해서.






여러 감정이 떠올라 있는 희민의 얼굴을 보던 정 박사가 빙그레 웃음 지었다.






“앞으로 주치의 생활은 계속할 거니 종종 보게 될 겁니다. 워낙 고액 연봉이라.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간단히 인사를 마친 정 박사가 정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야외 데크를 나갔다. 


테라스를 지나 저택 안쪽으로 멀어지는 그를 희민이 가만히 보고 있었다. 


정혁이 그녀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자 희민이 정신을 차린 듯 그에게 고개를 돌렸다.






“많이 놀란 건가?”




“네. 그런데…… 정말 뵙고 싶었는데 당신 주치의였다니, 놀랐어요.”






희민이 스툴에 앉으며 말하자 정혁이 자신이 입고 있던 긴 카디건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덮어 줬다.






“괜찮은데.”




“덮고 있어. 아직 밤은 쌀쌀해.”






그가 당부하듯 시선을 맞추자 희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살짝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정혁도 그녀 옆의 스툴에 앉았다.






“정 박사님께는 언제쯤 연락한 거예요?”




“자리 잡자마자 바로 모셔 왔어. 미국에서 돌봐 주신 분들이 계속 연락을 하고 계셔서 다행히 찾기 쉬웠지.”






정혁이 희민에게 시선을 향한 채 말했다. 그 눈을 들여다보며 희민이 작게 속삭였다.






“정 박사님도 많이 놀라셨겠어요. 갑자기 당신이 찾아온 거잖아요. 좀 전에도 많이 놀라셨다고 하시던데…….”




“그러셨지.”






그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그때의 기억이 정혁에게 나쁘지 않은 기억인 것 같아 희민은 내심 안심했다.






“그럼…… 주기적으로 당신 혈액 채취하고 그런 것도 전부 정 박사님이 담당하신 일이었겠네요?”






예전에 그가 수혈받던 것이 떠올라 그녀가 묻자 정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체질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셔. 어릴 때부터 내 몸의 모든 데이 터를 알고 계신 분이니까.”




“……그렇구나.”






희민이 안도한 표정을 짓자 정혁이 그녀의 얼굴을 깊이 들여다봤다.






“내 몸이 걱정돼?”




“걱정되죠. 수혈이 안 된다니까.”






그녀가 살짝 미간을 좁혔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그가 다칠까 봐 늘 불안했다.


평소에는 숨기고 있던 근심을 희민이 드러내자 그가 입술 끝을 말아 올렸다.






“당신 몸을 걱정하는 게 좋을 텐데. 이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을 하면 내가 오늘 밤도 밤새 붙잡고 놔주질 못해.”






근사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그가 상체를 기울여 희민의 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 


아랫입술을 한 번 빨아 낸 뒤 놔 준 정혁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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