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한 몸 - 6.죄악
음란한 몸 - 6.죄악
죄악
잠시 멎었던 비는 한 밤중이 되자 더 거세게 몰아쳤다. 장마비가 이렇게 거세게 내리는 것을 해원은 좀처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장마비가 어떤 식으로 내리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비가 아니다.
해원이 제 앞에서 창백한 얼굴로 덜덜 떨고 있는 유모를 쳐다봤다.
유모는 자신을 데리고 이곳까지 왔었다고 했다. 어려서 해원은 항상 그 말을 들었었다.
[남월에서 이곳 북여까지 오는 길이...아, 그러니까 남녕에서 이곳 도읍까지 오는 길이 얼마나 먼지, 공주마마는 강보에서 우시고, 젖을 먹여야 하는데 도중에 젖이 분 여인들을 찾아서 젖을 대신 물려달라고 하고 정말 난리도 아니었죠. 그랬던 공주마마가 이렇게 어른이 되셔서 저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한 주제에 유모는 [이 말을 한 것이 알려지면 전 죽습니다]라는 말을 했다.
“내 어머니에 대해 말해봐.”
“그, 그분은 마마를 낳으며 세상을 산후열로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건 나도 알아. 나는 내 어머니가 어떤 가문의 어떤 분이셨는지, 내 조부는 어떤 분이신지, 아직도 남녕에 내 외가가 남아있는지 그게 궁금해. 내 외가는 어떤 가문이었어?”
“그건...”
“내 조부님과 조모님은 아직 살아계셔? 외조부와 외조모 말이야.”
“돌아가셨습니다. 두분 모두요...”
“외숙부나 이모님들도 없었어?”
“마마의 모후께서는 독녀이셨습니다.”
“남자 형제도 없었어? 무남독녀였었어?”
“그, 그게, 그러니까...”
유모는 거짓말을 못한다. 해원은 그걸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을 워낙 못하는 성격이라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바로 표시가 난다. 거짓말인지 진실인지.
“형제가 있었구나. 내게 외숙부가 있었어.”
해원이 확신했다. 자신에게 또 다른 친척이 있다.
어머니의 형제. 그것이 오라비인지 남동생인지 알 수 없지만 형제가 있다.
“아직 살아계셔?”
유모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표정으로 미루어 아직 자신의 숙부가 살아있다는 것을 해원이 직감했다.
“남녕에 계시는 거야?”
“그건 아니고...”
“왜 날 보러 단 한 번도 오지 않으신 거지?”
“마마. 그러니까...에휴. 이걸 어찌 말씀드려야 할지...보러 오시지 않으신 것이 아니라...그러니까, 그러니까...”
“보러 오지 않으신 게 아니라면, 날 보러 오신 적이 있다는 거야? 내가 너무 어려서 기억을 못하는 거야?”
“에휴...에휴...”
유모는 얼굴이 시뻘개졌다 새파래졌다 하며 계속 한숨만 내쉬었다.
대체 자신의 생모에게 무슨 비밀이 있어서 이런 단 말인가.
그때 한 가지 생각이 해원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머니에 대해 비밀로 할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
“혹시 아바마마와 어머니가 불미스러운 관계였었어? 어머니가 이미 지아비가 있는 상황이었다거나...”
설마 다른 지아비를 두고 어머니는 부왕과 관계를 가져 자신을 낳았던 걸까?
그래서 다들 자신에게 어머니에 대해 말해주지 못하는 걸까.
“그런 거야? 그래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마마. 다른 지아비라니요...마마의 어머니께서는 절대로 그런...”
“그런데 왜 내 어머니는 황후가 되지 못했어?”
“네?”
“지금 황후께서 첫 번째 황후시잖아. 내 어머니는 황후의 자리에 올라간 적도 없어. 아바마마는 왜 어머니를, 돌아가셨다고 하지만 왜 황후에 추대하지 않으셨지?”
늘 이상했었다. 황후가 되기 전에 죽었다고 해도 죽은 후에라도 충분히 황후로 추대할 수 있었다.
이름 뿐인 황후라 하더라도 그 명예를 죽은 자에게 충분히 줄 수 있었지만 부왕은 그러지 않았다.
사랑하지 않아서?
중요하지 않아서?
아니다.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전부 말해줘. 나는 들을 자격이 있어. 나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싶지 않아.”
해원의 표정은 진지했다.
“말해주지 않으면 아바마마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어.”
어머니를 닮았다며 저를 만지던 부왕의 손길은 소름이 끼쳤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었다. 그러나 뭐가 달라졌는지 지금은 너무 소름이 돋는다.
제게서 어머니를 볼 정도로 부왕이 어머니를 소중하게 생각했고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면 부왕은 왜 어머니를 황후로 삼지 않았을까.
왜 그 먼 남녕에서 어머니 혼자 해산을 하다가 죽게 했을까.
“말해. 전부.”
“마마...”
유모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겁을 먹은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유모는 다시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마마, 마마를 낳으신 생모께서는...”
말하는 유모가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는 해원 자신의 숨이 넘어갈 지경이다.
대체 무슨 대단한 비밀이기에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속 시원히 말해버리면 될 것을 말이다.
“그 분의 존함은 주령으로, 주령 공주마마셨습니다.”
“공주? 내 어머니가 공주셨어? 어디의?”
“남월의 공주마마셨습니다.”
“하지만...아, 아바마마의 사촌이셨나?”
유모가 고개를 저었다.
“친 누이셨습니다. 폐하의...”
해원은 제가 뭔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친 누이? 그럴 리가...’
“친 누이였다니? 누가 누구와? 내 어머니와 아바마마가?”
“네, 마마...”
유모는 겁에 질려 자꾸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거짓말이 아니다. 지금 유모는 진실을 말하고 있다.
“두 분이, 그러니까 두 분이 친 남매간인데 서로 사랑하셔서 나를 낳았다는 거야?”
“아닙니다, 마마. 저는 주령 공주님을 몇 년이나 모셨습니다. 주령 공주님과 폐하가 각별한 남매 사이긴 했지만 공주 마마는 폐하를 혈육 그 이상으로는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면...”
“폐하께서 공주마마를 강제로 겁탈하시고, 그 이후에는 공주마마께서도 모든 것을 체념하시고 순순히 폐하의 뜻을 따랐을 뿐입니다.”
순간 해원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런 진실은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곳에 이런 것들이 숨겨져 있었을 줄은 미처 몰랐었다.
“마마, 괜찮으세요?”
해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지자 유모가 놀라 그녀에게로 다가오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유모를 향해 해원이 손을 내밀었다.
“괜찮아. 괜찮으니까 혼자 있게 해줘.”
다가오지 말라고 손짓한 다음 해원이 비틀거리며 보료 위에 몸을 기댔다.
유모가 나가자 해원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자신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절대로 태어나서는 안 되는 존재였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은 죄악의 씨다.
‘차라리 태어나지 말고 태중에서 죽었어야 했어...어머니가 숨을 거둘 때 나도 죽었어야 하는데 죽지 않아서 이런 저주가 내려진 거야...’
자신을 저주한 것은 북연의 신녀라고 했었다.
그러나 진짜 저주는 그 이전에 이미 시작되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이 무섭지 않았을까. 하늘이 무서웠다면 그런 짓을 저지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놓고 저를 보며 어머니를 닮았다는 말을 하는 부왕이 이제는 무섭다.
이곳에서 사람들이 대대로 섬기던 신의 신당을 불태우고, 사람들의 믿음을 금지하고 그 자리에 스스로의 동상을 세우고, 황궁을 황금으로 뒤덮고 그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저주받은 딸의 배필을 구하려는 부왕이 이제는 너무 무섭다.
‘꿈을 꾸고 싶어...’
이럴 때야 말로 무랑군의 꿈이 필요하다. 이럴 때야 말로, 그를 꿈에서 만나야 한다.
하지만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무랑군...’
그에게 말하고 싶다. 자신의 이 몸은 병이 아니라고. 이건 저주라고.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가 어떤 죄의 피인지 말하고 싶다.
그 사내라면 분명 현명한 위로와 필요한 조언을 해줄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뭔지 아는 사내이니 말이다.
*
해원이 눈을 떴을 때는 벌써 밤의 어둠이 내린 후였다.
‘그대로 잠이 들었었구나...’
충격적인 진실을 알고 그대로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비가 그쳤나...’
빗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옷도 벗지 않고 잠이 들었었구나.’
아마 혼자 있고 싶다는 말에 유모도 다른 시녀들도 자신을 깨우러 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목이 말라...’
시녀를 부를까 하다가 해원이 포기했다.
‘옷을 벗고 그냥 자자...’
일어나 앉은 해원이 옷을 벗으려다 말고 문밖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바람 소리?’
빗소리가 아니라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부나?’
장마비가 거세게 내리던 것만 기억을 하는데 언제 비가 그치고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까.
‘나가 볼까...’
일어선 해원이 방문으로 걸어가 두 손으로 살며시 방문을 밀었다.
역시 비는 그쳐 있었다.
뜰로 내려가는 사이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유모도 시녀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벌써 자러 갔을까. 하지만 아무도 없는 경우는 없었는데...’
뜰에 내려 선 해원이 담 너머를 쳐다봤다.
서쪽에 그 별궁이 있다. 그리고 별궁을 넘어가면 대나무 숲이 나온다.
지금은 꿈을 꾸는 것이 아니니까 그 대나무 숲에 간다 한들 그 사내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발이 저절로 대나무 숲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지금 해원의 안에는 울음이 꽉 차 있다.
지르지 못한 억눌린 울음이 가득 차 있지만 그걸 소리내어 울 수는 없다.
그래서 대나무 숲으로 가고 싶다.
이렇게 바람이 부는 날 그 대나무 숲에서 그냥 통곡하며 오열하고 싶다.
그곳에서 울면 아무도 자신의 울음을 듣지 못할 테니까 오늘은 그냥 그곳에서 울고 싶다.
이대로 울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 죽을 것만 같으니까 말이다.
‘이쪽이었지...’
공주궁에서 별궁, 그리고 대나무 숲까지 이 밤에 혼자 걸어가는 건 처음이다.
게다가 오늘은 달이 그리 밝지 않다.
아마 조금 전까지 비가 내려 먹구름이 꼈기 때문이리라.
‘들키면 곤란한데...’
시녀들에게 들켜도 곤란하고 병사들에게 들키면 더 곤란하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해원은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별궁까지 갈 수 있었다.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불이 꺼진 별궁을 한번 쳐다본 해원이 별궁 뒤쪽의 대나무 숲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가 내린 직후의 대나무 숲은 또 낯선 느낌으로 다가왔다
.
‘물이 고여 있구나.’
대나무 잎사귀 끝에 매달린 물방울들이 해원의 옷자락이 스칠 때마다 아래로 후두둑 떨어졌다.
한참을 걸어 대나무 숲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간 해원이 주위를 둘러봤다.
당연한 것이지만 아무도 없다.
“하아...”
소리 내어 울고 싶어서 이곳까지 온 것이지만 막상 대나무 숲에 서자 눈물이 나지 않는다.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그러고 싶은 마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어쩌면 눈물은 잠들기 전에 다 흘려버린 걸까.
‘그래도 잘 왔어.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았으니까.’
만약 그대로 공주궁의 침전 안에 있었더라면 분명 지금까지, 혹은 내일도 모레도 내내 마음이 무거웠을 것이다.
자신이 알게 된 비밀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결해주는 문제가 아니다.
자신이 뭘 어떻게 한다고 해서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는 것 역시 아니다.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벌어진 일이고, 지금에 와서도 자신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국혼.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제는 부왕이 정해주는 국혼도 싫다.
‘황궁에서 나가고 싶어.’
황금으로 번쩍거리는 이 황궁도 싫다. 가능하다면 이 황궁에서 도망치고 싶다.
‘도망치면 내가 갈 곳이 있을까. 이런 저주 받은 몸으로 내가 어디로 갈 수 있을까...’
황궁에서 도망치는 것은 차라리 쉽다.
하지만 문제는 황궁 밖으로 나갔을 때 자신을 지켜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다.
발정기의 단내 뿐만 아니라 평소에 풍기는 미미한 단내가 어떤 문제를 일으킬지는 명백하다.
결국 자신을 얽어매고 있는 것은 황궁의 높은 담도 아니고, 부왕의 황명도 아니고 자신의 저주받은 몸이다.
황궁 문을 활짝 열어놓고 나가라고 해도 자신이 나갈 수 없는 이유다.
“하아...”
해원이 다시 한 번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해원?”
해원이 제 귀를 의심했다.
‘이 목소리는...’
이건 무랑군의 목소리다.
‘난 지금 꿈을 꾸는 것이 아닌데...’
꿈도 아닌데 왜 그 사내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까. 너무 듣고 싶었던 나머지 환청이라도 듣는 걸까.
“무랑군?”
반신반의하며 돌아선 해원의 눈에 대나무 뒤에 서 있는 사내의 모습이 들어왔다.
틀림없는 그 사내였다.
“무랑군, 여긴 어떻게...”
“어떻게 된 것이냐. 그날 이후로 계속 오지 않아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했었다.”
‘그날 이후? 아, 달거리가 끝난 그날 이후...’
꿈속에서도 시간이 흐르는 걸까.
‘이건 정말 꿈일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얼굴이 말이 아니구나.”
다가온 사내가 해원의 눈가에 말라붙어 있는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울었느냐?”
“조금이요...”
실은 많이 울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걱정할 것이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면 대답을 해주겠느냐?”
해원이 고개를 저었다. 대답하는 대신 해원이 무랑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눈물이 이제는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소리내어 울고 싶어서 이 대나무 숲으로 왔는데 정작 울음소리도, 눈물도 나지 않아서 이제 가라앉았다고 생각했었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무랑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는 순간 해원의 안에서 눈물이 터졌다.
걷잡을 수 없는 뜨거운 눈물이 터져나와 해원이 사내의 옷자락을 손으로 꽉 쥐고 어깨만 떨어가며 흐느꼈다.
어린 아이처럼 저를 붙들고 엉엉 우는 해원을 잠시 바라보던 사내가 손을 들어 그녀의 등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제 등을 쓸어내리는 손이 다정해서 해원이 더 크게 울었다.
아무리 크게 울어도 사내의 가슴이 울음소리를 전부 삼켜줘서 대나무 숲에는 그녀의 울음소리가 퍼지지도 않았다.
“다 울었느냐?”
해원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기다려준 사내가 그렇게 묻자 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울어서 다리가 풀려버린 해원을 위해 사내는 그의 다리를 내주었다.
대나무 옆에 앉은 사내의 다리 위에 앉은 해원이 촉촉하게 젖은 눈가를 손끝으로 닦으며 숨을 가늘게 쉬었다.
“오늘은 단내가 심하지 않구나.”
“발정기가...아니라서요...”
“그렇구나.”
사내는 그 말을 하고 잠시 침묵했다. 아마 해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잠시 후, 해줄 말을 찾았는지 사내가 해원의 손을 쥐고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있는 곳으로 오지 않겠느냐.”
이 사내가 있는 곳? 그곳이 어디일까.
‘꿈 속으로 오라는 걸까. 아니면 죽은 자의 나라로 오라는 걸까.’
“이건 꿈이잖아요...”
“꿈?”
“꿈이요. 꿈이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으니까요.”
“왜 이게 꿈이라는 거지?”
“여긴 당신이 올 수 없는 곳인데 당신은 여기에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꿈이에요.”
“왜 내가 여기에 올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냐? 나는 내가 원하면 얼마든지 이곳에 올 수 있단다. 밤이든 낮이든.”
“하지만 여긴 황궁인걸요.”
“황궁?”
그제야 사내가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곳이 황궁이라는 말을 믿는 표정이 아니다.
“황궁이라니. 이곳은 내 집 뒤쪽의 대나무 숲이란다.”
집 뒤쪽의 대나무 숲?
“아니에요. 여긴 황궁의 별궁 뒤에 있는 대나무 숲이에요. 남월의 황궁이요. 예전에 북악신을 섬기던 신당이 있던 곳의 그 대나무 숲.”
“황궁의 대나무 숲...”
“예전에 당신의 어머니께서 신을 섬겼던 그곳이요. 당신이 기억하고 있는 그곳.”
자신에 대해 전부 말하면 이 사내의 미움을 받을 수도 있다. 결국 부왕 때문에 이 사내의 어머니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이 사내는 자신을 미워할 자격이 충분하다. 미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진실을 말하고 싶다.
부왕이 제게 진실을 감춘 것처럼 자신도 이 사내에게 진실을 감추고 싶지는 않다.
“나는 남월 황제의 딸이에요. 당신의 어머니가 죽어가며 저주를 내린 그 딸이 바로 나예요.”
“어머니가 저주를 내렸다고?”
사내의 목소리가 아주 낮게 떨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내 부왕께서 이곳 북연을 점령하시고 이 나라에서 섬기던 신의 신당들을 전부 불살랐다고 들었어요.
신당을 불사르고 신녀들을 죽이고, 그때 당신의 어머니도 돌아가셨고 그분이 돌아가시며 내 부왕께 내린 저주가 바로 나예요.”
그런데 그녀의 아들인 이 사내가 자신을 저주의 고통에서 조금은 편안하게 해줬다.
이건 어떤 운명의 장난인 것일까.
그랬던 그녀의 아들이 지금 자신에게 그가 있는 곳으로 오라 말한다.
그러나 이제 진실을 알았으니까, 그래도 제게 오라고 할까.
그래도 제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줄까.
“네가 태어나기 전의 일이겠지.”
“그럴 거예요.”
“너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렇겠죠.”
22년 전에 벌어진 일은 태어나지 않았던 자신이나 고작 여섯 살에 불과했던 이 사내, 둘 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사내의 말처럼.
“네 탓도 아니고 내 탓도 아닌 일을 가지고 너와 내가 서로를 외면해서야 되겠느냐.”
사내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그건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막을 수 있는 일을 외면한 것이었다면 너도 나도 책임을 져야 하지만, 너는 태어나지 않았고 나는 어렸으니 우리는 그 일과는 상관이 없지 않을까.”
“날 탓해도 괜찮아요.”
“나는 누구도 탓할 마음이 없단다.”
“내 부왕을 탓하지 않는 건가요?”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을 왜 원망하겠느냐. 만나본 적도 없고 만날 일도 없는 사람을 원망하는 것처럼 바보같은 짓은 없겠지.”
“나는...부왕이 미워요.”
이 사내는 바람이다. 어디에도 매이지 않고, 과거에도, 상처에도 매이지 않고 흐르는 바람이다.
그리고 이 사내는 달빛이다.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고루 비치는 달빛이다.
이 사내는, 꿈이다.
현실에는 없는 그런 사내니까 이 사내는 꿈이다.
“나는...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정으로 태어났어요...”
해원이 뒤에서 저를 끌어안은 사내의 손을 꽉 쥐었다.
제 이야기를 들으면 이 사내가 저를 여기에 두고 사라져 이제 영영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원이 사내의 손을 꽉 쥐었다.
“내 어머니는 부왕의 누이였대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누이를 겁탈해서 그 죄의 결과로 내가 태어났어요.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악의 덩어리였고, 태어난 후에도 그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저주를 받았겠지요.”
“말했다시피, 그건 네가 책임져야 하는 일이 아니란다.”
해원의 손에서 제 손을 빼낸 사내가 대신 그 손으로 해원의 두 손을 감쌌다.
“누가 그걸 네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무지하기 때문이니까 그 사람의 무지를 용서하려무나.
그리고 누가 네게 손가락질을 한다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도 너그러운 관용을 받아보지 못해서 그런 것이니 그 역시 너그러이 용서해주려무나. 그러면 네 삶은 훨씬 더 가벼워질 테니까.”
“당신이 그렇게 살았었군요...”
어린 나이에 혼자가 되어 이곳저곳을 정처없이 떠돌았을 아이가 겪었을 아픔을 떠올려보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그건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절대로 모를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이 사내는 전부 다 용서하고, 후련해진 것이다.
원망이나 독기 같은 건 조금도 가슴에 담지 않고 전부 털어내 버려서 지금처럼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해원도 안다.
쉽다면 누구나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이 더 많다. 자신도 거기에 속한다.
이 미움이 쉽게 사라질까.
이 원망을 쉽게 날려버릴 수 있을까.
“이곳이 정말 황궁이라면 내가 어떻게 너와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네가 있는 이곳에도 대나무 숲이, 내가 있는 이곳에도 대나무 숲이 있으니 어쩌면 이 대나무 숲이 우리를 이어주는 걸지도 모르지.”
“당신은 정말...실제하는 사람인가요?”
내내 이 사내가 꿈이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지금 이 사내는 그가 꿈이 아니라고 말한다.
어딘가의 땅에 살고 있고, 그가 사는 곳에 이런 대나무 숲이 있고, 대나무 숲을 매개로 이 사내와 자신은 만나고 있다. 기적처럼, 꿈결처럼.
“당연하지. 너는 내가 귀신인줄 알았던 거냐?”
“꿈인줄 알았어요.”
“나는 네가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밤에 너를 만나고 아침에 깨어나 다시 이 대나무 숲으로 오면 어디에서도 네 흔적을 찾아낼 수 없었단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사는 근방에 너처럼 고운 아이는 없으니까, 나는 네가 꿈이라고 생각했었다. 꿈이 아니라면 여우에게 홀렸다거나.”
사내의 입술이 해원의 귓가에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이 제 귓불을 물자 해원이 눈을 감았다.
“내가 있는 이곳은 바다가 있고, 대나무 숲이 있고...”
바다가 있고 대나무 숲이 있다.
“서쪽이란다. 북연의 도읍에서 서쪽으로...”
“무랑군?”
해원이 사내를 불렀다. 그러나 홀연이 꿈에서 깬 것처럼 사내는 흔적도 없다.
제 손을 감싸고 있던 사내의 손도, 저를 끌어안고 있던 사내의 몸도, 그리고 제 귓가에 닿아오던 사내의 숨결도 전부 꿈결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다.
대신 바람에 흔들리는 대나무 만이 남았다.
“서쪽으로, 바다가 있고 대나무가 있는 곳.”
사내는 틀림없이ㅣ 그가 있는 곳을 가르쳐주려고 했었다. 그곳이 어딘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그곳에 그 사내가 있다.
“갈까...”
문득 용기가 생겼다. 지금까지는 낼 수 없었던 용기가 지금 아주 조금 싹을 틔웠다.
‘이번 달거리를 끝내면 그때 떠나자.’
머잖아 달거리가 시작한다. 그때는 위험하다.
그러니까 달거리가 끝나는 날 황궁을 나가 그곳을 찾아가자.
어딘지는 모르지만 서쪽으로 가다보면 바다가 나올 것이고, 대나무 숲이 있는 바다를 찾아보자.
그러던 중에 다시 달거리가 시작되면 그때는 민가가 없는 산중에 몸을 숨기고 괴로움을 견뎌보자.
그러다보면 그 사내가 있는 곳까지 닿지 않을까.
그러는 중에 한 번은 그 사내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내일 또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때는 그곳이 어딘지 물어보자.
적어도 지명이라도 물어보자.
그리고 말하자. 이제 곧 갈 테니까 그곳의 대나무 숲을 보여달라고. 그를 만나러 갈 테니까 기다려 달라고.
“갈게요...”
중얼거리는 해원의 머리 위에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다시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