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12장(3)

짐승 계약 #12장(3)

M 망가조아 0 1652

짐승 계약 #12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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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납득이 되지 않는 게 있어서요.”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는 표정으로 차 실장이 말을 꺼냈다.






“어떤 부분 말씀이십니까.”






정중하지만 채근하지 않는 말투였다. 조용히 칵테일을 한 잔 마신 차 실장이 인영을 바라봤다.






“조민아 씨 아시죠.”


“압니다. 실장님이 계속 찾던 분이지 않습니까.”






인영은 차 실장이 한희민과 계약한 이후로도 계속 다른 여자를 찾고 있던 걸 알고 있었다.


임신은 확률의 문제라 더 잘 맞는 상대가 있을지 모른다는 정 박사의 말 때문에 차 실장은 온갖 방법을 사용해서 특수한 유전자를 지닌 여자를 찾았다.


조민아는 한희민 이후에 찾게 된, 차 실장이 바라던 대로 더 정혁과 잘 맞는 상대라고 그도 알고 있었다.






차 실장이 칵테일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한희민 씨와 계약이 끝나기 전에 조민아 씨 최종 결과가 거의 나온 상황이었어요. 그때 회장님과 대화를 했었는데…….”






차 실장이 그날의 기억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최종 검사 단계에 진입한 여자가 있습니다. 검사가 마무리되면 결과가 나오겠지만 지금 상황으론 한희민 씨보다 더 회장님과 맞는 유전자를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나이도 더 어리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그래서, 계약을 종료한다?’






‘한희민 씨와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무의미한 시도는 그만두시고 새로운 계약을 체결하시는 게 낫습니다. 제가 준비하겠습니다.’








그 말을 했을 때 정혁이 한참 말없이 자신을 바라봤다. 


당연히 바로 그렇게 하자고 할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처음 보는 묘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자 내심 당황했었다.










‘회장님?’




‘……차 실장은 역시 나와 같은 부류군요.’








피식 웃는 정혁의 모습은 더 낯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오로지 계약만으로 한희민을 옆에 두고 있는 것 같습니까?’




‘계약이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 차 실장이 나와 같은 부류라는 겁니다.’








정혁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혼란이 왔다.






‘회장님. 제가 이해할 수 있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때 정혁이 웃음을 지우고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한희민에게 미쳐 돌아가는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차 실장은 나와 똑같은 감정 불능이란 말입니다.’




‘…….’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차갑다는 말도, 웃지 않는다는 말도, 속을 알 수 없다는 말도 그나 자신이나 아주 예전부터 들어 왔던 말 아닌가.






혼란스러움을 누르며 가만히 보고 있자 정혁이 소파에서 일어섰다.






‘하긴 우리가 똑같은 사람들인 건 맞겠죠. 그만 갑시다.’






먼저 일어난 그가 서재 문 쪽으로 향했다. 정혁의 뒷목 셔츠 깃 위로 붉게 드러난 손톱자국을 보다가 자신도 따라 일어섰다.






차 실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인영이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였다.






“그렇게 말했는데 회장님께서 갑자기 계약 종료 결정을 내린 게 이상하군요.”


“저도 이해가 가지 않아요.”






차 실장이 잔 위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분명 처음부터 정혁은 이상했다. 


한희민이 온 뒤로 그답지 않은 행동들을 수시로 보이고, 평소 저택에 오래 있는 사람이 아닌데 일정을 바꿔서라도 어떻게든 한희민과 지내려 하는 행동들이 그랬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차 실장으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때…….”






기억을 더듬던 차 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계약 종료되던 날이 조민아 씨의 유전자 검사 최종 결과가 나온 날이었어요.”






검사 결과지를 가지고 정혁의 저택으로 갔을 때 예상외로 그는 서재에 있었다. 


한희민이 온 뒤로 그가 서재에 있는 모습은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이상했다.






서재에서 기다리려고 하다가 거기서 정혁과 마주치자 의아함을 누르고 보고했다.






‘최종 결과가 나왔습니다.’






소파에 앉아 있던 그가 시선을 들어 올렸다. 표정이 평소와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가라앉아 있는 얼굴이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이번엔 다를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회장님과 더 잘 맞는 사람으로 찾았으니까요. 이 최종 검사 결과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 결과지를 내려놓았지만 그는 거기엔 눈길도 주지 않았다. 


테이블 위 어딘가에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었다.


완전히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정혁의 얼굴을 이상하게 보며 말을 이었다.






‘이 계약을 당장 종료하실 생각이 없으시더라도 개별적으로 인적 조사에 들어갈까 합니다.’




‘……왜 그래야 하죠.’






정혁이 테이블 위를 응시하며 물었다. 정혁은 그걸 모를 사람이 아니다. 그 질문이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대답했다.






‘그래야 언제든 새로운 계약이 실행될 수 있으니까요.’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텅 빈 듯한 그의 눈에서 순간 지독한 상실감이 느껴졌다. 


왜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했지만 자신이 물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 묻지 않았다. 


그의 사적인 부분은 지금까지 전혀 침범하지 않았다.


그건 그들 사이의 어떤 규율 같은 거였다. 


하지만 굳이 그런 규율 때문이 아니더라도 정혁의 어떤 행동이나 태도가 이상함을 느끼게 한 적은 없었다. 최근이 유일했다.






혼란스러움을 누르며 마주 보고 있는데 그가 말했다.






‘난 한희민 외엔 계약할 생각이 없는데.’


‘언제까지 기다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아시다시피 이 계약은 임신을 위한…….’




‘그 계약은 조금 전에 내가 종료시켰습니다.’


‘네?’






계약을 종료시키다니? 한희민 외에는 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계약을 종료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다. 서정혁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늘어놓는 사람이 아닌데.






‘한희민 놔주기로 했으니 나머지 금액 입금시켜요. 방에서 정리 중일 테니 차 대기시키고.’




‘잠깐만요. 회장님, 그럼 새로운 계약을 하실 생각으로 한희민 씨와 계약을 끝내신 겁니까?’




‘안 합니다.’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들을수록 혼란스러워지는 말에 답답함을 느끼는데 정혁이 불렀다.






‘차 실장.’






지독하게 낮은 위압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쳐다보는 그의 눈빛도 마찬가지로 낮아져 있었다.






‘내가 다른 여자를 안고 싶지 않다고 말해야 알겠습니까?’




‘…….’






그의 눈에 그렇게 많은 감정이 담긴 건 처음 봤다.


절망과 혼란이 뒤섞인 그 눈은 마치 지독한 상처를 입은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상처가 그 자신이 스스로에게 준 것인지 한희민이 준 것인지도 알 수가 없어 아무 말 하지 못하고 보고만 있었다.






‘한희민 말고는 계약할 생각도, 안을 생각도 없으니 그만 질문하고 내 말대로 해요. 지금 갑작스러울 테니까 그녀는 집으로 직접 데려다주고.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런 괴로워 보이는 회장님의 얼굴은 처음이었어요.”






그래서 그냥 고개를 숙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는 차 실장의 얼굴이 가라앉았다. 


인영은 맞은편에서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한참 생각하던 차 실장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감정 불능이라 이해를 못 한다고 하셨는데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네요. 난 정말 모르겠으니까.”






차 실장이 답답한 듯 안경을 벗어 테이블에 내려놓고 관자놀이 부근을 손으로 짚었다.






지금껏 정혁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한희민과 계약한 이후에는 매번 예상을 빗나갔다. 


정혁 말대로라면 그와 자신은 똑같은 사람인데 한희민이 그를 그렇게 변하게 만든 걸까.


그럼 그런 한희민을 정혁은 갑자기 왜 내보낸 걸까.








“실장님은 회장님과 비슷한 분입니다. 아마 회장님도 그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이마를 매만지던 차 실장이 시선을 들어 인영을 바라봤다.






“이 비서가 보기에도 그래요?”


“네.”






인영의 표정에선 그녀와 달리 혼란이 느껴지지 않았다. 차 실장이 눈을 가늘이고 그를 바라봤다.






“그럼 혹시 회장님이 왜 그러신지 알 수 있겠어요?”






그녀의 말에 인영이 가벼이 웃었다.






“네. 저는 너무나 잘 보이는데.”






그의 말에 차 실장은 답답함을 느꼈다. 


누구보다 정혁을 오랜 시간 보좌해 온 사람은 자신이다. 


그런데 자신은 이렇게 수수께끼 같은 혼란에 빠져 있는데 인영은 그걸 알고 있다니…….






“이유가 뭔데요?”


“사랑해서죠.”






너무나 당연하게 흘러나오는 말에 차 실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랑? 사랑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지금?”


“다른 이유가 뭐겠습니까. 다른 여자를 안고 싶지 않은 이유, 그 여자 단 하나만 안고 싶은 이유. 남자에게 그거 사랑밖에 없어요.”






고작 그런 이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정혁이 저렇게 힘들어하는 거라고?






차 실장이 고개를 흔들었다.






“회장님은 그런 분이 아니에요.”


“아니셨죠. 정확히는. 분명 제가 알기로도 한희민 씨를 만나기 전까진 회장님은 실장님과 비슷한 사람이었으니.”




“비슷하다니, 감정 불능 말하는 거예요?”


“네. 그게 아니라면 실장님께서 저에게 이런 당연한 일을 진지하게 상담해 오시지도 않았겠죠.”






인영이 정말 당연하다는 듯 웃는 얼굴에 차 실장은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맞을 거라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아니 생각할수록 그게 맞는다는 확신이 들고 있었다.






차 실장이 피곤한 얼굴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그럼 똑같이 감정 불능이었는데 회장님만 달라졌단 말이네요. 그래서 내가 지금 회장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거고.”


“회장님은 그런 상대를 만나서 바뀌신 거겠죠. 실장님도 마찬가지로 마음이 움직이는 상대가 생기면 달라지지 않을까요.”






인영이 빤히 바라보며 말하자 생각에 잠겼던 차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요.”






테이블 위에 놔둔 안경을 다시 낀 차 실장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셨다. 인영이 어두운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보며 말했다.






“많이 힘드십니까? 회장님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이런 중요한 시점에서 내가 어떻게 보좌해야 하는지를 잘 모르겠어서요.”






무거운 목소리에 인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담백하게 말했다.






“실장님께선 걱정되시겠지만 그건 회장님께서 잘하실 겁니다. 실장님도 아시잖습니까. 회장님이 어떤 분이신지.”




“…….”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최근엔 계속 혼동이 오고 있었다. 정말 서정혁을 자신이 잘 알고 있는 게 맞는 건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상황 보니 한희민 씨도 곧 다시 잡으시겠던데.”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가볍게 말하는 인영을 차 실장이 멈칫해선 쳐다봤다.






“이 비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제가 실장님 하는 일은 늘 관심 있게 보고 있거든요. 보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죠.”






차 실장이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봤다.






“거기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그러니 힘드시면 언제든 이렇게 상담해 주세요. 저 생각보다 능력 있습니다. 제가 실장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좋겠어요. 진심으로.”






위로하려는 말이겠지만 인영의 말이 정말로 퍽이나 위로가 됐다.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게 느껴졌고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을 잘 풀어 줬기 때문에 고마움도 있었다.






‘이럴 때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축복 같은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차 실장이 표정을 풀고 엷은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인영이 그녀의 미소를 마주하고는 싱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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