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22장(2)

짐승 계약 #22장(2)

M 망가조아 0 1372

짐승 계약 #22장(2) 

53b7fd7785acec62ebed0eb67e4acc65_1702683799_3791.jpg 

섬뜩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최 회장의 표정이 순간 바뀌었다.






자, 잠깐, 김지훈이라면 설마…….






최 회장의 머릿속에 예전에 놓친 아들의 대용품이 떠올랐다. 


신장이 떼이고 혈액이 뽑힌 상태에서 의사와 함께 사라져 버렸던 그 김지훈. 그 뒤로 오랜 시간 동안 추적했지만 끝내 찾지 못했던, 그래서 아마 죽은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아직도 찾고 있던 그 김지훈이 떠오르자 최 회장의 눈이 공포로 물들었다.






“서, 설마 너……!”






뜨악한 얼굴의 최 회장을 정혁이 미소로 마주했다.






“일부러 처음부터 그 이름으로 인사드렸는데 몰라봐 주시니 서운하던데요. 지금도 계속 찾고 계시지 않았습니까. 바로 앞에 두고도 못 알아보시면서.”




“기…… 김지…… 김지훈…….”






최 회장이 사색이 돼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그 이름을 되뇌며 부들부들 떠는 최 회장을 잠시 쳐다본 정혁이 몸을 돌려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그의 뒤로 비서들과 경호원들이 따라 나가는 동안 꼼짝도 못 하고 서 있던 지윤이 그제야 최 회장에게 달려갔다.






“아, 아빠. 김지훈이라니? 김지훈이 누군데? 저 사람이 대체 누군데!”






최 회장은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지윤의 말도 못 알아듣는 사람처럼 김지훈의 이름만 중얼거렸다.






“저 남자가 우리 집에 대체 왜……. 다, 당신들 뭐야?”






곧이어 회의실 안으로 수사관들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놀란 지윤이 당황한 얼굴로 몸을 일으키는데 그녀에게 느닷없이 수갑이 채워졌다.






“이건 뭐야? 감히 나한테 무슨……!”




“최지윤 씨. 한희민 씨 아시죠?”






이젠 끔찍해져 버린 그 이름 앞에 지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수사관은 수갑을 채운 상태로 빠르게 말하기 시작했다.






“당신을 무고죄와 뇌물 공여죄 및 부정 청탁 혐의로 체포합니다. 이 시간부로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고…….”






인생이 끝장난 순간임을 깨닫고 머릿속이 완전히 새하얘져 버린 상태라 더 이상의 말은 지윤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최 회장과 마찬가지로 지윤은 넋이 나간 얼굴로 양손이 포박된 채 회의장에서 끌려 나갔다.








***








AQ 국내 본사 건물 지하 주차장에서 차 실장이 캐리어를 넘겼다.






“수고 많았습니다. 약속한 대가니 확인해 보세요.”






최 회장의 심복이었던 김후연 비서실장이 빼돌려 준 정보가 없었다면 이번 일이 이렇게 수월하진 않았을 거였다.


큰 공로를 세운 김 실장은 캐리어를 열어 달러를 확인하고 입술을 말아 올렸다.






“확실하군요.”






차 실장은 만족스러움을 담은 김 실장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






최 회장의 오래된 심복인 김후연 실장을 매수하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는 너무나 쉽게 최 회장을 배신했다. 


그의 배신으로 모든 계획이 최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최 회장은 김지훈이 태원의 비리 자료를 모으듯 자신의 비서실장이 제 비리 자료를 모아 왔던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던 거였다.






“앞으론 최 회장 일가가 힘을 쓰지 못할 테니 국내에 있어도 문제는 없겠지만 일 처리가 끝날 때까진 밖에 나가 있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럴 계획입니다. 저도 한동안은 휴식이 필요해서.”






김후연 비서실장은 이미 해외로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최 회장은 김지훈의 해외 은닉 생활을 위해 마련해 준 자금을 자신을 배신한 비서실장이 누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테지만.






“그럼.”






정중히 고개를 숙인 김 실장은 차 뒷좌석에 캐리어를 싣고 운전석에 올라탔다.






“…….”






김 실장이 곧장 차를 몰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차 실장과 인영이 조용히 바라봤다. 잠시 그대로 서 있던 인영이 입을 열었다.






“다행이군요.”




“네?”






차 실장이 돌아보자 인영은 멀어진 차에 시선을 두고 말했다.






“최 회장의 수족이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라 말입니다.”




“아아.”






인영의 말뜻을 알아챈 차 실장이 가볍게 웃었다.






“그만 올라가죠. 일을 마무리해야 하니.”




“네. 실장님.”






먼저 몸을 돌린 차 실장을 인영이 곧 뒤따랐다.






***






병원 주차장에 도착한 희민이 차에서 내리는데 갑자기 눈앞에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한희민 씨! 잠시 인터뷰 좀 부탁드립니다!”




“뉴스에 나온 것들이 전부 사실입니까?”






몰려드는 기자들을 보고 당황한 희민의 앞을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곧바로 막아섰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희민을 안전히 보호한 경호팀장이 병원 안까지 그녀를 안내한 뒤 엘리베이터에 태웠다.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올라가십시오.”






경황없이 인사한 희민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서희의 병실까지 올라왔다.






‘대체 무슨 일이지?’






자신에게 기자들이 달려들 일이 뭐가 있는지 떠올리며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엄마. 별…….”








“세양그룹의 파국에 이어 충격적인 뉴스가 또 하나 나왔습니다.”






희민이 별일 없었냐고 물으려는데 서희가 틀어 놓은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도 서희가 보고 있는 화면으로 향했다.








“SY뱅크 사장 최지윤 씨가 부사장 재임 시절 세양그룹에서 근무하던 직원을 상대로 회사 내부 기밀 유출 누명을 씌워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한 사건인데요. 세양가 재벌 3세 최지윤 씨는 당시 이른바 흙수저의 성공 신화로 인기를 끌던 한 모 씨를 시기해 이 같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수사관들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뉴스 화면에는 최지윤의 사진과 과거 잡지 인터뷰 당시에 찍었던 희민의 사진이 번갈아 나오고 있었다. 


희민의 사진엔 모자이크가 되어 있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최 씨는 각종 로비를 통해 한 모 씨를 재판에서 패소하게 만들고 집착적으로 한 개인의 인생을 망가뜨렸습니다. 재벌 3세의 광기에 가까운 이 범죄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당시 사건을 재구성한 화면 보시죠.”






“…….”






희민은 말없이 화면을 바라봤다. 이미 자세한 정황이 담긴 화면이 나오는 걸 보니 정혁이 계획한 대로 언론이 돌아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한동안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서희는 다음 뉴스로 넘어가고서야 입을 열었다.






“희민아. 이거…… 너니?”






시선은 여전히 TV에 향하고 있었지만 서희의 목소리가 작게 떨리고 있었다. 희민은 많이 놀랐을 서희에게 다가가 부드럽게 어깨를 감쌌다.






“……응. 나 맞아.”






서희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서희가 창백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해외 장기 출장 중이라며 병원에 못 온다고 했던 시기가 딸이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때라는 걸 깨닫자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이었다. 


그저 바쁘겠거니, 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그 시기에 희민이 혼자서 받았을 고통을 떠올리니 가슴이 미어졌다.






“저런 일이 있어서 그동안 엄마에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힘들었으면…….”






퇴사하고서도 한참 말을 하지 못했던 희민의 사정을 이제야 알게 된 서희가 눈물을 흘렸다. 


서러운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어깨를 희민이 가만히 안아 줬다.






“저땐 죽을 것 같았는데 이젠 괜찮아. 정말이야.”






희민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시엔 정말 모든 게 증오스러웠어. 할 수만 있다면 누군지 찾아내서 죽이고 싶었어. 아니면 나와 똑같이 만들어 주고 싶었어.”






작게 흐느끼는 서희를 그녀가 잔잔하게 달랬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그 일을 겪고 나니 내 삶이 넓어졌어. 사람에 대해서도 알게 되고……. 내가 집착하던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질 모래성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




“…….”






희민이 서희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가만히 마주 봤다.






“그 일을 겪은 게 다행이라는 건 아니야.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지금이 그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 엄마, 진심이야.”




“……많이 힘들었지.”






서희의 젖은 눈을 마주 보는 희민의 눈도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눈물이 맺힌 눈으로 미소를 지은 희민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척 힘들었어. 그래도 엄마라는 존재가 있어서 악착같이 버텼더니 오늘 같은 날이 오네. 엄마가 아니었으면 그때 다 포기해 버렸을 거야. ……내 삶까지 전부 다.”




“그래……. 그래. 잘 버텼어……. 정말 장하게 잘 버텼어.”






이번엔 서희가 희민의 등을 두드려 주며 위로했다. 토닥이는 그 손길에 희민의 코끝이 붉어졌다. 또르륵 흘러내리는 눈물을 서희가 다정하게 닦아 줬다.






“대견해. 우리 딸.”






서희의 말에 희민이 눈물 번진 얼굴로 말갛게 웃었다. 


그 힘든 시간을 지내 온 자신을 엄마인 서희가 알아주고 잘 버텼다고 해 주니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밀려 나왔다.






“엄마 앞에선 안 울려고 했는데…….”






속절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희민이 두 손으로 가리자 서희가 그녀를 품에 안아 줬다.






“울어도 돼. 희민아 펑펑 울어도 돼. 괜찮아. 다 괜찮아.”






등을 쓸어 주며 하는 말에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눈물이 쏟아졌다. 


흐느끼는 딸을 안고 있는 서희의 붉어진 눈에도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그동안 희민이 겪었던 고통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이렇게 전부 이겨 내고 강하게 살아가는 제 딸이 대견하면서도 안쓰러웠다.






똑똑.






희민이 진정되어 갈 때쯤 노크 소리가 들렸다.






“네.”






서희가 고개를 들자 문이 열리고 정혁이 방으로 들어왔다. 정중히 고개를 숙인 그가 희민에게 시선을 옮겼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는 희민을 본 그의 표정이 굳었다.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간 정혁이 허리를 굽혀 시선을 낮췄다.






“괜찮아?”




“……괜찮아요.”






얼른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아 낸 희민이 애써 웃어 보였다. 눈물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는 그녀의 얼굴을 본 정혁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희민이 데리고 나가서 위로해 줘요. 맛있는 것도 좀 먹이고.”






서희의 목소리에 정혁이 고개를 돌렸다.






“어머님도 놀라셨을 텐데, 괜찮으십니까?”






정혁이 뉴스를 봤을 서희를 걱정해 묻는 말에 그녀가 흐리게 미소 지었다.






“나는 괜찮으니 희민이 잘 챙겨 줘요. 부탁할게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정혁이 희민을 부축하며 일으켰다. 그가 보지 않는 사이 희민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얼른 정돈하는데 정혁이 서희에게 말했다.








“이쪽에도 당분간 취재 기자가 상주할 것 같습니다. 병실 밖에 경호원을 배치해 뒀으니 혹여 놀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까지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정혁이 깊이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어서 가 봐요.”






서희가 어서 나가 보라고 채근하자 정혁이 희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 얼굴을 살폈다.






“나가도 되겠어?”




“응. 이제 괜찮아요.”






발개진 눈이 조금 민망해 시선을 떨군 희민이 서희를 바라봤다. 서희의 눈가도 아직 붉어져 있는 것을 보자 콧등이 또 시큰거렸다.






“상황 진정된 뒤에 다시 올게, 엄마. 전화할게.”




“고개 당당히 들고 다녀.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까. 알았지?”




“……그럴게.”






희미한 미소를 지은 희민이 정혁의 품에 반쯤 가려진 채 문을 나섰다. 


나가기 전 서희에게 그가 다시 고개를 숙이자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줬다.




방금 전 희민의 얼굴을 살피는 모습이나, 이 병실에 들어섰을 때부터 긴장이 맺혀 있는 그의 얼굴에선 희민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나 있었다.






함께 있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관계가 정확이 어떤지는 알지 못했는데 방금 전 그 모습으로 충분히 가늠이 됐다.


희민이 무척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 서희가 깊이 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강해진 거구나…… 내 딸이.”






뉴스를 보고 가슴이 미어질 것 같았는데 저런 듬직한 남자가 옆에 있어 준다면 딸도 분명 잘 이겨 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희민이 강해진 이유가 무엇인지도 확실히 알게 되어 마음이 조금쯤은 편해졌다. 


늘 병원에 갇혀 있어야 하는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 미안한 마음이 컸는데 그나마 한결 안심하게 된 서희가 조용히 눈물을 닦아 냈다.






***






희민은 정혁의 차를 타고 몰려 있는 기자들의 눈을 피해 병원을 빠져나왔다. 


그는 희민의 집이 아닌 자신의 저택으로 차를 몰았다.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풍경에 그녀가 의아하게 그를 바라봤다.






“기자들 때문에 집에 있기 위험해. 당분간 여기 있어.”




“……그게 낫겠네요.”






뉴스가 그렇게 크게 났으니 집 앞에도 분명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였다. 


희민은 그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차분해진 눈으로 창밖을 바라봤다.






처음 정혁을 만났던 저택의 풍경은 여전히 압도적인 규모였다. 


끝도 없이 이어진 담벼락도, 멀리 보이는 대저택의 독특한 외관도 그때와 같았지만 희민 자신의 마음은 달라져 있었다.






“그땐 그 소문들 때문에 정말 늙은 변태를 만날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희민이 작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알아들은 듯 정혁이 가볍게 웃으며 한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실망이었겠군. 그 대단한 소문들이 다 거짓이었으니.”




“농담이라도 그런 끔찍한 소리는 말아요.”






희민이 살짝 인상을 쓰고는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 그때 내 반응 보는 게 재밌었죠? 바짝 긴장해 있는 모습 다 봤잖아요.”




“전혀 긴장하는 모습으로 보이지 않던데.”






정혁이 엄지로 희민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드라이브 웨이를 지나는 동안 대저택은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택이 가까워질수록 첫날 이곳을 왔던 기억이 점점 더 선명해졌다. 


그날의 기억은 긴장으로 전체적으로 흐릿하긴 했지만 이곳을 지날 때는 또렷이 기억나는 편이었다.






“얼마나 긴장했는데요. ……아닌 척했을 뿐이지. 자존심 때문에.”






그때를 떠올리는 희민의 목소리가 조용히 잦아들었다. 그녀를 힐긋 본 정혁이 손깍지를 끼며 말했다.






“난 그날 당신에게 여러 번 반했는데.”




“그날요?”






희민이 처음 듣는 말에 눈을 둥글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조각 같은 그의 옆모습에 입술 끝이 부드럽게 휘어 올라가 있었다.






“당신 말대로 바짝 얼었으면서도 아닌 척 날 주시하며 파악하려는 그 도도한 눈동자에도 반했고,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긴장했으면서 권하는 술 거부하지 않고 달라고 할 때 날 쳐다보는 시선에도 반했고.”






정혁이 그날을 무수히 떠올렸던 사람처럼 어렵지 않게 하나하나 되짚으며 말을 이어 갔다.


자신은 긴장하여 잘 기억나지 않는 그때 일을 이렇게 세세하게 설명하는 걸 보니 희민은 잊혔던 그날이 조금씩 떠올랐다.






끼익.






저택 앞에 정혁이 차를 세웠다. 창밖을 보니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차를 차고에 넣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희민이 시선으로 기사를 보고 있는데 정혁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술잔 내려놓고 대범하게 먼저 침실로 걸어가는 모습에도 반했고.”






‘그만 시작하죠.’






“아, 그땐…….”






왠지 부끄러워진 그녀의 뺨이 살짝 발그레해졌다.






“대범한 게 아니라 긴장한 걸 숨기고 싶었을 뿐이에요. 들키고 싶지 않았으니까.”






빠르게 말한 희민이 도망치듯 얼른 차에서 먼저 내렸다. 그런 그녀를 진한 시선으로 보며 정혁도 운전석에서 내렸다.


저택 입구 앞에는 유리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유리 씨.”




“오랜만입니다.”






유리가 그때보다 정중한 태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정혁과는 그저 계약 관계였던 그때와 지금의 상황이 달라졌다는 걸 유리의 태도 변화로 다시 체감할 수 있었다.






“그때처럼 편하게 대해 줘요. 고마웠거든요.”






다정한 성정은 아니었지만 그때의 유리가 말없이 챙겨 줬던 일들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급작스럽게 계약이 파기되고 이 저택에서 나오게 됐을 때 유리와의 헤어짐이 헛헛함을 남겼었다.






“노력하겠습니다. 코트 주시겠습니까.”




“부탁해요.”






미소를 지으며 말한 희민이 코트를 벗어 건네자 정혁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안쪽으로 향한 그는 당연하게 그녀를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이젠 그 방으로 숨지 못해. 당신 방은 여기야.”






침실에 들어온 뒤 희민을 뒤에서 가만히 안으며 정혁이 귓가에 속삭였다. 


희민은 두 사람의 추억이 가득한 침실을 둘러보며 입술 끝을 둥글게 말아 올렸다.






“방도 많은데 하나 내어 주면 안 돼요? 치사해.”






장난스럽게 하는 말에 정혁이 그녀의 허리를 더 꽉 안았다.






“치사해도 좋아. 안 돼.”






그가 희민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결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녀가 그의 팔을 풀고 천천히 몸을 돌려 시선을 맞췄다.






“뉴스 화면 신경 써서 만들었던데…… 고마워요. 날 위해 그런 거 알아요.”






희민이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자 정혁이 그녀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췄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었어. 마음에 들어?”




“……크리스마스 선물치고 너무 거창한 거 아니에요?”




“기대해도 좋다고 했잖아.”






속삭이듯 말한 그가 그녀의 이마에서 입술을 내려 두 눈에도 번갈아 입을 맞췄다. 


아직 운 흔적이 남아 있는 불그스름한 눈을 진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자 희민이 말했다.






“그래도 무척…… 마음에 들었어요.”




“다행이군.”






그의 입술 끝이 유려하게 휘어 올라갔다. 엷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마주 본 희민이 작게 숨을 내쉬었다.






“똑같은 방식으로 복수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막상 내 누명이 밝혀지니까 너무 통쾌해요. 복수란 게 이렇게 카타르시스를 주는지 몰랐어요.”






최지윤과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건 싫었지만 그건 어쩌면 복수하지 못할 거란 두려움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스스로를 방어하는 방어 기제가 작동해서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여전히 도망치는 버릇 때문에.






“난 내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사람을 조건 없이 용서할 수 있을 정도로 선한 사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어요.”




“그건 선한 게 아니야.”






정혁이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다시 눈을 바라봤다.






“이제 시작이야. 아직 그 여자는 자신이 한 짓의 일부의 죗값도 받지 못했어.”






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최지윤의 인생을 완벽히 짓밟아 놓기 전엔 절대 만족할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냉기 흐르는 그의 서늘한 눈을 보다가 희민이 물었다.






“당신 복수는 잘된 거예요? 아까 뉴스 내용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잘 끝났어. 이제 마무리만 남았으니.”






정혁의 미소 띤 얼굴을 보니 희민은 안심이 됐다.






“……다행이다.”






자신은 정말 선한 사람은 되지 못할 거라고 희민은 생각했다.


정혁의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그 집안이 처절하게 몰락하길 내심 늘 바라 왔으니까. 






사람으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을 그에게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속에서 천불이 났다.


만약 정혁이 그대로 그 집에서 최 회장 아들의 대체품으로 살아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할 때가 있었다. 


그랬다면 지금쯤 온몸의 피와 장기가 다 뽑힌 채 식물인간처럼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에 도달할 때마다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끔찍해져 공포로 심장이 조여들었다.






희민의 어두워진 얼굴을 들여다보던 정혁이 두 손으로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제 두려울 건 아무것도 없어. 그 사람들은 죗값을 받을 거고, 위험해질 일도 없어. 앞으로는 그저 우리 두 사람만 생각하면 돼.”




“…….”






안심시키듯 하는 말에 희민이 그를 가만히 올려다봤다. 그의 눈동자가 한층 깊어져 있었다. 그 눈을 가만히 보던 그녀가 정혁의 눈가로 손을 뻗었다.






“이 눈동자도 당신 체질 때문이죠?”




“맞아.”






희민이 색소가 부족한 듯한 다크 올리브 빛깔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신비롭다는 듯 쳐다봤다.






“처음 봤을 때부터 신기했는데…… 혼혈인가 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어릴 때는 이 정도는 아니었어. 커 가면서 점점 더 연해지더군.”




“그랬구나.”






어릴 때부터 이랬다면 최 회장이 그를 몰라볼 리는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볼수록 빠져드는 듯한 매혹적인 그 눈을 희민이 응시하고 있는데 정혁이 낮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이 희귀 체질이라는 것만 받아들여 줘.”






희민이 멈칫거렸다.






“그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아요. 오히려 지금은 당신의 그 희귀 체질 때문에 우리가 만날 수 있었다는 데에 감사한데요?”




“…….”






그녀의 말에도 그의 눈엔 걱정이 어려 있었다. 말없이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을 희민이 두 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그러고는 똑바로 시선을 맞췄다.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었으면 그렇게 오랫동안 날 찾고, 지켜봐 오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의 눈동자가 더 짙게 물들었다.

, , , , , , , , , , ,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