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9장(3)

짐승 계약 #9장(3)

M 망가조아 0 1623

짐승 계약 #9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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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방해한 겁니까?”






근사한 슈트 차림을 한 정혁은 건조한 질문과는 달리 은밀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다가왔다.






다시 한국에 온 뒤로 며칠씩 집을 비우는 경우는 없었지만 정혁은 매일같이 외출을 했다. 


그가 나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 뉴욕에 있던 그 회사와 태원이 무슨 관계인지도 희민은 여전히 몰랐다.


다만 그때 들었던 이름인 김지훈으로 대외적 활동을 하고 있을 거란 짐작만 할 뿐이다.






‘물어봐도 말해 주지 않겠지.’






희민은 익숙한 열기가 담긴 눈동자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그는 그녀에게 똑바로 시선을 박은 채 우아한 동작으로 재킷을 벗었다.






스륵.






한 손으로 타이를 느슨히 당기며 셔츠 윗단추를 풀자 관능 어린 분위기가 공간을 긴장시켰다. 


희민이 조용히 숨을 삼키는데 바로 앞에 선 정혁이 그녀의 귓가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아침에 한 건 어땠어?”






낮은 목소리가 은밀하게 희민의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






오늘 아침 나가기 전 했던 평소보다 거칠었던 관계를 말하는 거라는 걸 눈치챈 희민이 시선을 살짝 떨어뜨렸다. 


그 얼굴을 본 그의 눈빛이 더 위험한 빛으로 일렁였다.






“나는 너무 좋았거든.”






귓가에 느릿하게 말한 정혁이 희민의 목덜미에 높은 콧날을 묻었다. 체취를 들이마시듯 깊이 빨아들이는 숨결에 희민은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지그시 억눌렀다.






“그래서 잊히지가 않아서, 잠깐 온 거야.”






연한 목덜미 살을 야릇하게 잘근거리며 그가 말했다.






“할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지는데 오늘은 특히 더해. 아침부터 계속 발기한 상태로 있었어.”






더운 숨결이 목의 피부를 간질이자 희민의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아…… 잠깐만요.”






희민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정혁을 제지하려 했지만 예민한 피부를 삼키는 입술의 감촉이 자꾸만 힘이 빠지게 했다.


이 남자 앞에서는 한없이 무력해져만 간다는 사실이 이 순간 열기로 더워지는 피부로 느껴졌다.






“말해.”






희민의 셔츠 단추를 풀며 점차 아래로 내려가는 입술이 쇄골을 진하게 빨았다. 희민은 자꾸만 아찔해지는 열기를 참아 누르며 입을 열었다.






“난…… 당신에 대해 아무것도 알면 안 되는 거예요?”




“말했을 텐데. 그 부분은.”






쇄골 아래 말캉한 살을 빨아들이며 정혁이 말했다. 


흔적을 남기려는 듯 세게 빨다가 이로 가볍게 깨물자 타액에 번들거리는 보얀 살에 붉은 자국이 남았다.






“……말했죠. 위험하다고.”




“그래. 알고 있잖아.”






자신이 남긴 흔적을 느른하게 바라보며 정혁이 말했다. 


셔츠를 더 풀자 브래지어에 감싸인 가슴이 드러났다. 


보기 좋게 풍만해진 젖가슴을 커다란 손으로 잡은 그가 브래지어 라인 바로 위쪽의 보드라운 살로 입술을 내렸다.






“그래도 알고 싶다면요?”






정혁이 움직임을 멈췄다.






“…….”






잠시 말없이 가만히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무슨 뜻이지?”






바로 앞에서 올려다보는 눈동자에는 이성이 배제된 듯 성적인 흥분만이 보였다. 그 눈을 마주 보며 희민이 입술을 열었다.






“내가 위험해진다고 해도…… 그래도 당신에 대해 알고 싶다면요.”






그의 눈에서 일렁이던 열기가 빠르게 식어 가는 것이 보였다.






‘지금 이 남자는 이 질문을 원하지 않아.’






차가워지는 눈을 보며 그 사실을 절감하자 희민은 공포감을 느꼈다. 이 질문이 정혁을 곤란하게 하고 있었다.






멈춰야 할까?






여기서 입을 다물면 그는 평소처럼 자신을 안을 거였다. 


저 서늘해진 눈도 금방 다시 뜨거워져선 자신을 원할 거였다. 


하지만 여기서 더 가면 저 눈이 영영 저렇게 식어 버릴 것 같아서 희민은 턱 끝까지 불안함이 차올랐다.






“…….”






어쩌면 정혁은 그걸 기다리는 것 같기도 했다. 희민은 침을 삼켰다.






“그럼 말해 줄 수 있어요?”






희민은 진심을 담아 시선을 마주했다. 


이런 자신의 감정에 혼란스러웠지만 굳이 그 혼란을 숨기지 않고 투명한 눈동자에 그대로 드러냈다.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로 제 감정이 간파당하는 걸 각오해야 했다.






‘그래도, 알아야 해.’






그게 자신의 진심이니까. 진심으로, 서정혁이라는 남자가 궁금해졌으니까. 숨죽인 채 얽히는 시선 속에 희민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때 정혁의 매끈한 미간이 좁혀 들었다.






“곤란하군.”




……곤란하다고?






희민의 눈이 커졌다. 그녀의 몸에서 손을 떼어 낸 정혁이 똑바로 상체를 세우고 서늘하게 내려다봤다.






“왜 쓸데없는 감정을 만든 겁니까. 그건 계약상의 조건이 아닐 텐데.”






방금 전과 전혀 다른 차가운 목소리에 희민은 순간 할 말을 잃은 채 정혁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될 수도 있다는 걸 조금 전 직감했지만 정말로 눈앞에서 그가 냉담해진 모습을 보자 생각 이상으로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당혹스러움이 고스란히 담긴 그녀의 얼굴을 미간을 좁힌 채 보고 있던 정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을 종료하는 게 낫겠군요.”




“뭐라고요?”






희민이 눈을 치켜뜨는데 정혁이 그녀에게서 몸을 돌렸다.






“파기하는 건 내 쪽이니까 나머지 금액은 오늘 중으로 전부 입금될 겁니다. 그렇게 알고 돌아갈 준비 해요.”




“잠깐, 잠깐만요.”






그대로 방을 나가 버리려는 듯한 정혁을 희민이 급히 불렀다. 


무감한 얼굴이 다시 그녀에게 향하자 희민은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갑자기 계약 종료를 말하면서도 아무런 표정이 없는 남자의 얼굴은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뭐라고…… 해야…… 하지?






희민은 찰나의 시간 동안 어지러운 머릿속을 헤집으며 할 말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머릿속이 완전히 엉켜 버린 듯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정신 차려.’






혼란스러운 머릿속에서 희민은 당장 떠오르는 걸 입 밖으로 냈다.






“임신이 계약 조건 아니었나요? 아직 임신하지 않았는데 그 돈을 다 주겠다고 하면,”




“임신은 처음부터 가능성이 낮았던 일이니 여기서 더 시도해 봐야 무의미합니다. 당신 감정도 그렇고.”






희민이 멈칫거렸다.






“…….”






말문을 잃은 듯 잠시 그를 보고 있던 희민이 말했다.






“내 감정이…… 무의미하단 말이에요?”






정혁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건조하게 자신을 보고 있는 그를 보니 희민은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당신과 나 사이에 있던 모든 건 전부 임신만을 위한 거였고?”




“그게 계약 조건이었습니다.”






뭐가 문제냐는 듯 서늘한 시선에 희민은 입을 다물었다.






……이런 남자였구나.






아니 이런 남자였기에 그런 계약을 하는 거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멋대로 이 남자에 대한 환상을 키워 버린 걸까.


희민이 스스로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사이 정혁은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도 희민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 기분은 뭐야? 배신감?’






분노처럼 끓어오르는 이 감정의 정체가 뭔지를 떠올리다가 희민은 입술을 짓씹었다. 배신감을 느낀 이유가 뭔데. 저딴 남자한테.






‘아니, 차라리 잘됐어. 어차피 돈이 목적이었으니.’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희민이 빠르게 걸어가 드레스룸에 넣어 놨던 자신의 캐리어를 빼냈다.






맞아. 잘못한 건 나야. 그 남자는 충실히 계약대로 한 거였고 계약 이상의 걸 요구한 건 나야.


처음부터 연애를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결혼을 하자고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임신만을 위한 계약이었으니까. 


게다가 그 계약의 끝을 생각하면 더 확실했다. 


임신한 순간 저 남자는 모르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게 조건이었으니까.






하지만…….






입매에 힘을 주고 짐을 싸던 희민이 벌떡 일어났다.






“왜 버림받은 기분이 드는 거냐고! 왜!”






얼굴을 일그러뜨린 희민이 어깨를 크게 들썩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방금 전 자신을 보는 눈이 완전히 차가워진 것을 봤을 때 이미 심장은 날카로운 것으로 잘려 나간 것만 같았다.






눈물이 붉게 차오른 눈으로 입술을 깨문 희민이 문밖으로 나갔다. 


빠른 걸음으로 정혁이 있는 곳을 찾아 서재로 향했다. 


그는 분명 거기 있을 것 같았다.






‘가서 뭘 말하려고?’






거의 서재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우뚝 멈춰 섰다. 설마 매달리려는 건 아니겠지.


희민은 자신이 이런 격한 감정으로 그 남자를 찾아가서 무슨 말을 할지 스스로도 알지 못했다.






……가지 않는 게 맞아.






망설이던 희민이 성마르게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몸을 돌리려는데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최종 결과가 나왔습니다.”






익숙한 목소리에 희민이 멈칫거리며 서재를 돌아봤다. 문이 한 뼘 정도 열린 상태였다.






‘차 실장님?’






지금 저택에 차 실장이 있다는 걸 몰랐기에 희민이 당황하며 물러서려는데 안에서 다른 목소리도 들렸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정혁의 목소리에 희민이 움직임을 멈췄다.




“…….”






희민이 문 쪽으로 조용히 걸어갔다. 


열린 문틈 안으로 소파에 앉아 있는 정혁과 그 앞에 서 있는 차 실장의 모습이 보였다. 


차 실장이 의심이 담긴 그의 얼굴을 보며 확실한 어조로 말했다.






“이번엔 다를 겁니다. 말씀드린 대로, 회장님과 더 잘 맞는 사람으로 찾았으니까요. 이 최종 검사 결과가 그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희민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계속…… 다른 사람을 찾고 있던 거였어?’ㅜ그래서 이렇게 미련 없이 버리는 거고?'






생각해 보면 몇 달 동안 임신이 되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다. 


그녀도 이상함을 느낀 부분을 정혁이라고 느끼지 않았을 리가 없고. 그래서 다른 사람을 찾고 있던 거구나. 임신이 가능한…….






사실을 깨달은 희민은 다리 힘이 쭉 빠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자신은 이곳에서 철저히 임신만을 위해 쓰이고 버려지는 일회용품 같은 거였다.


그 주제에 사랑이니 뭐니 느꼈던 거고.






희민은 목구멍까지 치미는 모멸감을 억지로 삼키며 몸을 돌렸다.








처음 왔던 날처럼 유리가 캐리어를 들고 현관 바깥까지 따라나섰다. 


급작스럽게 저택을 나오게 된 거였는데도 유리는 놀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예상했던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희민은 대기하고 있던 차로 걸어갔다. 


차 앞에는 차 실장이 서 있었다.






다른 남자 직원이 트렁크에 캐리어를 넣어 줬다.




“…….”






조용히 그걸 보던 희민이 유리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희민의 말에 유리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처음부터 이별은 예정되어 있던 일이고 계획대로 임신이 됐다면 더 빨리 이 저택을 나왔을 거였다.






씁쓸한 기분으로 유리를 보던 희민이 저택을 올려다봤다. 


독특한 외형의 건물에 불 켜진 창을 잠시 바라본 희민이 고개를 돌려 차 문을 열었다.






탁.






차 문을 닫자 대기하고 있던 차 실장도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출발할게요.”




“네.”








차 실장의 말에 담담히 대답한 희민은 헤드레스트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서정혁은 나오지 않았다.






한동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오랜만에 동네로 돌아오니 조금 낯선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거의 1년 반 만에 돌아오는 거니 그럴 만도 했다. 


감옥에서 나와 그 저택에 들어갈 때 잠깐 들르긴 했지만 차 실장과 함께 짐만 챙기러 왔던 거라 돌아왔다는 실감은 들지 않았다.






끼익.






주차장 앞에서 차가 멈추고 차 실장이 캐리어를 빼내 줬다. 희민에게 캐리어를 넘겨준 차 실장이 말했다.






“그동안 수고 많았어요.”




“……네.”






희민이 대답하자 차 실장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표정이 생각보다 좋아 보이지 않네요. 임신까지 가지 않고 끝났으니 한희민 씨 입장에선 최상의 결과인 것 같은데.”






최상의 결과.






차 실장의 말을 곱씹던 희민이 억지로 입술 끝을 휘어 올렸다.






“맞네요. 최상의 결과.”






희민의 기분을 알 리 없는 차 실장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듯 당부의 말을 남겼다.






“계약 내용 기억하시겠지만 계약 사실을 포함한 회장님과 있던 모든 일들은 어디에도 말하면 안 됩니다.”




“알고 있어요.”






담담한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차 실장이 시계를 바라봤다.






“혹 차후에 연락할 일이 생기면 저에게 전화 주시면 됩니다. 그럼.”






차 실장이 명함을 넘기고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지체 없이 차를 출발시키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희민은 천천히 몸을 돌렸다.






팟.






캐리어를 끌고 올라와 집에 불을 켜고 보니 더 낯선 기분이었다. 


구치소로 수감되던 날 아침, 그날을 기점으로 인생이 완전히 변해 버릴 것을 전혀 모른 채 회사로 출근했던 게 마지막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아무리 깔끔해 보여도 묘한 이질감을 준다. 지금 이 집이 그랬다.


오히려 고작 4개월 있던 서정혁의 저택이 익숙하게 느껴지다니…….






드르륵거리며 소파 쪽으로 캐리어를 끌고 간 희민은 짐 정리를 할 생각도 없이 소파에 털썩 앉았다. 


조용한 집 안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 실연당한 기분이 들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희민이 긴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왠지 지금 자신은 용도 폐기 된 고장 난 기계가 된 것 같았다. 원하는 걸 다 얻었는데. 


차 실장 말대로 오히려 임신이나 출산 같은 힘든 일을 겪지 않고 거액을 받게 됐는데.






“그런데 왜 하나도 기쁘질 않아.”






희민은 가슴이 막힌 듯 답답해졌다. 목구멍에 무언가가 콱 박힌 느낌이었다.






그곳에 있던 넉 달의 시간 동안 자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결코 그 전의 한희민으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불안이 가슴을 치고 올라왔다.


희민은 두려움을 삼키며 답답해진 가슴 부근을 지그시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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