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남자 4

맛있는 남자 4

M 망가조아 0 1665

맛있는 남자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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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넌 결정적인 한 방이 없어.






관장님은 늘 그렇게 말씀하셨다.






- 중요한 순간에 늘 주먹을 망설이잖아. 그러면 영원히 이길 수 없어. 시합은 한 방이야. 그 한 방에, 그 한 번의 주먹에 모든 것을 실어 날리는 거야. 체육관을 나올 때도 관장님은 말씀하셨다.






- 네 인생의 한 방은 뭐냐?






그 물음에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 내 인생의 한 방. 모든 것을 다 실어서 날리는 주먹. 나는 언제나 전력을 다해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 전력에 내 모든 것을 실어본 적이 있던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단 한 번의 기회에 모든 것을 실어서 날려본 적이 있던가.






없다. 한 번도 주저하지 않은 적은 없다. 전력을 다해 살아간다는 지금도 여전히 주저하며 앞으로 나아가길 두려워한다. 그렇게 늘 도망쳐왔다. 


그런데 도망치지 않는 여자를 만났다. 주저하지 않는 여자를 만났다. 이 여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 한 번에 모든 것을 실어서 날리고 있다. 




이 한 방의 스트레이트 앞에서 망설인다면 더 이상 변명의 여지도 없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도망쳐버린다면, 더 이상 어떤 기회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송골송골 땀이 맺힌 그녀의 손바닥에 이한의 손바닥이 미끄러졌다. 미끄러지는 손바닥을 손가락을 얽어 고정시킨다. 


두 사람의 손가락이 깍지 낀 것처럼 얽히며 서로의 땀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으응.”




“읏.”






한 치의 빈틈도 없이 맞물린 두 사람의 알몸이 꿈틀거렸다. 은서의 하얀 다리가 이한의 단단한 허벅지 아래에서 흔들렸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그녀가 눈을 감은 채로 숨만 헐떡였다.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도 몰랐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되는 것일까? 고민도 해보았지만 역시 답을 알 길이 없다. 


그녀의 몸을 열고 안으로 들어온 이한의 분신이 그녀의 안에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이 묵직하고 뜨거운 느낌이 그녀로 하여금 어쩔 줄을 모르게 만들었다.






“으응… 응.”






신음소리를 내는 것도 창피했다. 하지만 신음 소리를 내지 않으려니 또 괜한 염려가 든다. 신음 소리를 내면 야한 여자처럼 보일 것이라 창피하고, 내지 않으면 반응이 없는 것이라 생각할까 봐 걱정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은서가 그녀의 위에서 허리를 움직이고 있는 남자를 실눈을 뜨고 훔쳐본다. 


이런 상황에서 눈이 마주치면 무안할 것 같아서 그녀가 살짝 실눈을 뜨고 이한을 올려다봤다.






그 역시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그녀의 손을 깍지 낀 채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이 그녀의 가슴과 얼굴 위로 흘러 내렸다. 


그가 허리를 밀 때 마다 그녀가 아찔한 느낌에 소리를 지르려다 참는다. 


키스해주면 좋겠다, 고 그녀가 생각했지만 이한에게 그럴 여유는 없어 보였다.






“윽.”






작게 숨을 헐떡이며 이한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움직임을 멈추자 은서도 살며시 눈을 떴다.






“응.”






은서의 몸에서 이한이 빠져나갔다. 질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그의 분신이 빠져나가자 은서가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그것은 외로움과 비슷한 허전함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찍, 하고 그녀의 귓가에서 뭔가가 찢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살짝 고개를 돌린 은서가 그것이 콘돔의 겉포장이 찢어지는 소리라는 걸 알아차렸다. 


입술에 콘돔의 포장지를 문 이한이 한 손으로 그것을 찢어낸 것이다.






“아.”






그것을 본 순간 은서의 얼굴이 붉어졌다. 왜 콘돔을 본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인지 그녀도 알 수 없었다.






“다시 할게요.”






준비를 마친 이한이 다시 그녀의 위로 올라왔다.






“네.”






이런 경우에 대답이 필요한 것일까? 괜히 대답했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살며시 눈을 내렸다. 


그녀의 허벅지 안쪽에 미끈거리는 감촉이 닿고 있었다. 콘돔을 낀 그것은 미끈거림으로 닿아오고 있었다.








“읏.”






이미 부드럽게 풀어진 그녀의 입구 안으로 윤활유가 발려진 콘돔을 낀 이한의 분신이 미끄러지듯 파고 들어왔다.






“응…!”






은서가 저도 모르게 이한의 목에 팔을 둘렀다.






“괜찮아요?”






자기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나 싶어 이한이 허리의 움직임을 멈추자 은서가 고개를 젓는다.






“괜찮아요.”






그녀의 대답에 안심한 이한이 다시 그녀의 안으로 허리를 밀어 넣는다. 


그녀의 질 안 깊숙이 들어가는 이한의 분신을 그녀의 내벽이 수축하며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읏.”






가장 깊은 곳에서 그를 느끼며 은서가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 은서의 두 팔이 이한의 단단한 등을 꼭 끌어안았다. 


땀으로 젖은 그의 등의 느낌이 좋아 그녀가 더 바짝 그를 끌어안았다. 살며시 올려다본 이한의 이마에 땀이 배어나고 있었다. 






지금 그는 그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다른 곳에 전혀 신경 쓸 여력도 없이 오롯이 그녀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한눈 팔지 않는 남자.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에게 더 힘껏 끌어안기고 싶은 은서였다. 절대로 자신을 외롭게 내버려두지 않을 남자.






“으응.”






그가 나가고 다시 들어올 때마다 그녀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의 등을 힘껏 껴안았다. 


그런 그녀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이한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






“오늘, 어디 가고 싶어요?”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채로 이한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한의 품에 안긴 채로 은서가 감았던 눈을 뜬다. 


그가 그녀의 뒤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가고 싶은데 데려다줄 거예요?”






침대 옆의 휴지통에는 뭉쳐진 티슈와 끝이 묶인 콘돔이 버려져 있다. 뭉쳐진 채로 버려진 티슈에 살짝 붉은 핏물이 묻어 있었다.






“그럴게요. 어디 가고 싶어요?”


“약속했어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데려다 주기로.”


“말해봐요, 어디에 가고 싶은지.”






이한이 예상한 대답은 바다나 공원, 혹은 놀이공원쯤이었다. 바다가 보고 싶다고 하면 영종도 쪽으로 가면 된다. 


그렇게 예상하고 있던 이한의 귀에 들려온 은서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간 것이었다.






“이한 씨 다니던 체육관에 가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일순간, 이한이 멍해져 버렸다.






*






“으응.”






은서가 잠에서 깬 것은 아직도 실내가 어두컴컴할 때였다. 날이 밝았겠지만 집안의 커튼을 닫아놓은 탓에 어두운 것이다. 


머리 맡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여다보자 오전 10시 하고도 30분이 넘어가고 있었다. 세 시간 정도 잔 것이다. 세 시간이면 충분히 잤다고는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이한 씨?”






은서가 등이 허전해서 뒤를 돌아봤다. 침대에 누워 있는 것은 그녀 한 사람뿐이었다. 분명히 그녀를 끌어안고 같이 잠이 들었던 이한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갔지?”






졸린 눈을 비비며 은서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앗.”






가슴에 피어 있는 붉은 꽃에 은서의 뺨이 빨개진다. 그녀가 벗었던 옷은 가지런히 개어져 침대 아래에 놓여 있었다. 


그 남자가 이렇게 곱게 개어놓은 것이리라. 부지런히 옷을 입은 은서가 침실을 나섰다. 


체육관에 데려가 달라고 해서 도망친 것일까? 괜한 부탁을 한 것일까? 하지만 그녀는 꼭 보고 싶었던 것이다, 링 위에서 서 있는 그 남자를.






“응?”






침실을 나서는 그녀의 코에 맛있는 냄새가 흘러 들어왔다. 그녀의 집에서는 정말 오랜만에 풍기는 냄새였다. 바로 밥 짓는 냄새. 


그녀가 혼자 살게 된 후부터 이 집에서 밥을 지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의 밥은 언제나 햇반. 밥솥은 있지만 사용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집 안에 밥 짓는 냄새가 가득한 것이다.






‘냄새 좋다.’






밥이 되는 냄새가 이렇게 좋았던가 생각하며 은서가 부엌으로 걸어갔다.






‘쌀이 있었나?’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재료는 거의 사지 않았다. 쌀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밥을 짓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이한 씨?”






부엌을 그녀가 살짝 들여다봤다. 그녀의 부엌인데 왠지 낯선 것이다. 꼭 손님이 들여다보는 것처럼 그녀가 부엌 안을 들여다봤다.


이한이 부엌에서 소매를 걷어 붙이고 뭔가를 만들고 있었다.






“일어났어요? 아침 다 됐으니까 와서 앉아요. 미안해요, 내가 멋대로 부엌을 썼어요.”


“아니요, 그런데 뭐 만들어요?”






냄새가 좋다. 밥 짓는 냄새도 좋지만 냄비에서 끓고 있는 것의 냄새가 좋다.






“달걀찜 좋아해요?”


“우와, 달걀찜.”






뚝배기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는 것은 달걀찜이요 냄비에서 끓고 있는 것은 콩나물국이다.






‘응? 집에 뚝배기가 있었나?’






쓰지 않으니 있어도 모른다. 은서가 머리를 긁적이며 식탁에 앉았다. 한 일이 없으니 수저라도 놓으려는 것이다.






“그런데 냉장고 텅텅 비었는데 어떻게 한 거예요?”


“잠깐 나갔다 왔어요. 요 앞에 마트에요.”


“잠 안 잤어요?”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겨우 세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다. 


자신이 쿨쿨 자고 있는 동안에 이한이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와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반찬을 준비한 것이다. 


밤새 알바를 하고 와서, 그리고 또 그녀와 그, 응, 뭐, 하여간에 그런 걸 하고 나서 곧바로 일어났다는 뜻이다.






“몸 하나는 튼튼해요.”


“그래도.”






“맛이 없을지도 몰라요. 나 요리 잘 못해요.”


“냄새는 좋은데요?”


“자, 뜨거워요, 뜨거워.”






이한이 뚝배기를 들어서 식탁 위로 옮긴다. 보글보글 끓는 뚝배기 안의 달걀찜을 보며 은서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러고 있으니까 꼭 신혼 부부 같다.”


“앗! 뜨거!”






갑작스런 은서의 발언에 국을 뜨던 이한이 소리를 질렀다. 놀라서 그만 손등에 국을 떨어뜨린 것이다.






*






“음… 맛있어요.”






오랜만에 집에서 만든 아침밥을 먹으며 은서가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다. 


몇 년 만에 먹는 집 밥인지 모른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로 처음 먹는 집 밥이었다. 


밥이, 갓 지은 따뜻한 밥이 이런 맛이었다는 걸 은서가 새삼 깨달았다. 


많은 반찬이 없어도, 그저 따뜻한 국과 달걀찜 하나만 있어도 세상의 그 어떤 진수성찬보다도 꿀맛이었다.






“짜지 않아요?”






이한이 아무래도 자신 없는 듯 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은서가 생긋 웃는다. 


이 남자가 너무 좋아졌다. 어제도 이 남자가 좋았지만 오늘은 이 남자가 더 좋아졌다. 






잠들기 전에도 이 남자가 좋았지만 잠에서 깨어난 후로는 몇 배나 더 좋아졌다. 


그리고 내일은 또 얼마나 이 남자가 좋아질지 모른다. 






이 남자가 그녀의 첫 남자였다. 


따뜻한 달걀찜을 입안에 넣으며 은서가 이 남자에 대해 더 알고 싶다고 생각했다. 


더 많은 것을, 더 깊은 것을 알고 싶었다. 알면 알수록 더 좋아질 것 같아서.






*






<미래 체육관>






간판이 붙은 건물로 이한이 은서를 안내해 들어간 것은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였다.


이 시간대의 체육관이 가장 한가하다고 설명하며 이한이 체육관의 문을 열었다. 


그의 말대로 넓은 체육관 안은 몇 명의 사람 외에는 없었다. 


샌드백을 치던 남자 한 명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한을 보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며 걸어온다.






“오랜만이네? 웬 일이야?”


“근처에 지나가다가 잠시 들렀어요. 별일 없으시죠?”






이한이 쑥스러운 듯 머리를 긁적이며 인사를 한다.






이한의 또래, 혹은 한두 살이 많아 보이는 남자였다.






“별일이야 있을 게 있냐? 그런데 이 분은.”






이한의 옆에 서 있는 은서에게 남자의 시선이 멎는다.






“아, 이쪽은.”


“안녕하세요, 이한 씨 여자 친구입니다.”






이한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은서가 얼른 대신 대답했다. 


그녀의 씩씩한 대답에 이한도, 그 남자도 잠시 당황했지만 은서 혼자만 싱글벙글이다. 마냥 좋은 것이다.






“어, 음, 이쪽은 트레이닝 담당하시는 코치님이에요.”


“엄청 젊으신데요?”






젊다는 은서의 말에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젊어 보인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이지 않은가.






“벌써 서른 중반인데 다 늙었어요.”






남자가 손사래를 치다가 은서에게 손을 내민다.






“강선호입니다. 이한이 여자 친구면 앞으로 자주 뵙겠네요. 이한이하고 저하고 친형제처럼 지내거든요.”


“잘 부탁드립니다.”






싹싹하게 인사하는 은서의 모습에 선호가 엄지손가락을 이한에게 들어 보인다. 여자 친구가 최고라는 뜻이다.






“오랜만에 왔는데 스파링 한번 할래?”


“아니요. 몸도 다 굳었고.”






사양하는 이한의 말보다 은서의 말이 앞섰다.






“보고 싶어요. 이한 씨 글러브 낀 모습.”


“.....”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두 손을 가슴으로 꼭 모으는 은서의 모습에 이한이 할 말을 잃고 그녀를 쳐다봤다.


마치 크리스마스 날 아침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의 눈동자와 똑같은 눈동자를 한 그녀의 말을 그가 절대로 거절하지 못한 것은 안 봐도 뻔한 것. 


이리하여 변이한 씨, 한동안 손에서 놓았던 글러브를 끼게 됐다.






*






“뭐야? 이한이하고 코치님하고 하는 거야?”






구석에서 미트를 치고 있거나 샌드백을 치고 있던 남자들이 링 위에 오르는 두 사람을 보고 하던 일을 멈추고 링 주위로 모여 들었다. 


턱걸이를 하고 있던 남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체육관 안에 있던 모든 남자들이 링 주위로 몰려들어 저마다 한마디씩 던진다.






“야, 이한아. 선호 형 늙었다. 살살 봐주면서 해라.”


“이한이 오랜만인데 다리 굳어서 스텝이나 제대로 밟겠어?”






“선호 형 오늘도 허리에 파스 붙이고 나왔다. 노인 공경 제대로 해라~”


“그래도 선호 형은 미들급이고 이한이는 밴텀급인데 아무렴 선호 형이 밀리겠냐?”


“이한이는 키가 크잖아. 팔이 길어서 훅 한 방이 크니까.”






남자들이 주고받는 말을 은서가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복싱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그녀인 것이다. 


일요일 텔레비전에서 복싱 경기가 나오면 당연하다는 듯이 채널을 돌려 버리는 그녀다.






남자들이 장갑을 끼고 서로 피터지게 싸우는 게 왜 재미있는지 이해를 못 하는 것이다. 


그 시간이면 차라리 드라마를 보겠다고 생각해온 은서였기 때문에 지금 옆에서 미들이 어떻고 훅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를 마치 외계어처럼 듣고 있는 것이다.






“시작한다.”






그 말에 은서가 링 위를 쳐다봤다. 헤드기어를 머리에 쓴 두 남자가 링 위에서 글러브를 낀 채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은서로서는 처음 보는 이한의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얇은 티셔츠 한 장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머리에 헤드기어를 쓴 이한이 그녀의 눈에 낯설었다. 






누군가가 분 호루라기가 울리자 두 남자가 링 위에서 가볍게 발을 움직인다. 


양말도 신지 않은 맨발이 링 위에서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은서가 감탄하며 바라봤다. 


사람의 몸이 저렇게 가벼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안 것이다.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가볍게, 그리고 경쾌하게 발이 움직이고 있었다.






링 위의 두 사람이 서로를 경계하며 천천히 링 위를 돌기 시작한다. 


글러브를 낀 손으로 가드를 올린 이한이 가벼운 스텝을 유지하며 선호를 노려봤다. 


선호 역시 눈가에 적당한 긴장감이 떠올라 있었다.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것은 선호였다.






“그렇지! 밀어붙여, 선호 형! 레프트! 레프트!”






선호의 주먹이 거세어지자 링 아래의 남자들이 주먹을 쥐고 흔들며 응원하는 열기도 덩달아 거세어진다. 


선호의 왼팔이 뻗어 나오자 이한이 그 주먹을 받아친다. 


선호의 주먹을 피한 이한이 선호의 주먹이 원위치로 돌아가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어퍼컷을 날린다. 


하지만 선호 역시 날랜 몸놀림으로 피해버린다.






“우와~”


“잘한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모습에 링 아래서 구경하던 이들이 환호와 박수를 보낸다.


작렬하는 주먹과 예리한 눈빛, 그리고 가벼운 발이 춤을 추는 링 위의 공간을 은서가 뚫어져라 바라봤다.






“스텝 하나도 안 굳었네?”






이한의 주먹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선호가 가볍게 풋워크를 하며 노련하게 잽과 스트레이트를 연이어 날린다. 


글러브로 가드를 올린 채 선호의 주먹을 피하는 이한의 발끝이 가볍다. 이런 느낌이 좋은 이한이었다. 


복싱을 하며 가장 좋아하는 느낌이었다. 




가볍게 바닥을 딛고 차는 느낌. 치고 빠지고, 리듬에 몸을 맡겨 발로 바닥을 차며 가볍게 날리는 잽. 주위에서 던지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과 상대방의 숨소리만 들리는 이 작은 링 안의 공간. 이 사각의 공간 안에서 느낄 수 있는 기묘한 긴장과 가벼운 짜릿함. 이 느낌이 좋아 십대의 절반을 미친 듯이 링 위에서 보냈다. 






감량하기 위해 굶고 달리고 주먹을 휘두르고 또 달리면서도 행복했었다. 


이 사각의 링 안에 있으면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었다. 


쏟아지는 선호의 잽을 피하던 이한이 어느 순간 허리를 들어 올려 라이트 훅을 올려붙인다.






“윽!”






선호가 주춤하는 사이 연타로 레프트 잽을 날린 이한의 주먹이 그대로 선호의 얼굴에 먹혀들었다. 


주먹이 먹혀드는 순간 선호의 다리가 휘청거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한의 주먹이 짧게 끊어 치는 레프트 잽으로 선호의 턱에 연타로 날아들었다.






“라이트 크로스!”






은서의 옆에 서 있던 남자가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와우.”






잘은 모르지만 이한이 이기고 있다는 생각에 은서가 작게 소리를 질렀다. 


링 위에 선 이한의 모습이 보고 싶다는 생각은 했지만 저런 모습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은서였다. 






링 위의 이한은 은서의 상상보다 훨씬 멋있고, 훨씬 잘 어울렸다. 어디에 있는 것보다 잘 어울렸다. 


그를 만났던 그 어느 장소보다도 지금 서 있는 사각의 작은 링 안이 그에게 어울리는 그림으로 은서의 눈에 들어오고 있었다.






“이한이는 아웃복싱 스타일이라서 보는 사람이 시원시원 하죠?”


“아웃복싱?”






은서의 옆에 있던 남자가 슬며시 말을 걸어온다. 계속 이 예쁜 여성에게 말을 걸고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이한이가 키가 크고 팔 다리가 길잖아요. 저렇게 리치가 긴 선수들이 치고 빠지는 걸 아웃복싱이라고 해요.”


“아.”






“저 녀석이 아마 복싱에서는 체급 타이틀도 가지고 있었는걸요.”


“그거, 대단한 거죠?”






잘은 몰라도 대단한 거라는 느낌이 들어 은서가 묻는다.






“프로 데뷔 직전에 그만뒀으니까, 지금도 관장님이 아쉬워해요. 프로 데뷔했으면 타이틀 전 노려볼 만했는데.”


“왜 그만 뒀나요?”






은서가 봐도 저 남자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어울리는 공간은 저 곳이다. 그런데 왜 그만두고 밤낮으로 알바를 하는 것일까. 


편의점과 빌딩 청소, 그리고 술 배달 알바.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닐까? 


자신의 삶에 치열하게 성실한 모습이 보기 좋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왜 저렇게 어울리는 것을 그만 뒀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다.






“모르죠. 자세한 건 관장님만 아시니까, 가정 문제 때문이라고 들었어요.”


“가정 문제.”






그러고 보니 이한의 가족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은서다. 물어볼 시간도 없었고 그걸 물을 정도로 허울이 없어진 사이가 아직은 아닌 것이다. 






무엇보다 은서 자신도 아직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 이한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는 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상처일 수도 있는 그 일은 조금 더 나중으로 미루자고. 아직은 상처를 끄집어내서 드러내 보일 용기가 없어서.






‘가정 문제.’






이한도 어쩌면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에게도 아직은 꺼내 보일 수 없는 상처가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가 먼저 말하기 전에 묻지 말자고 은서가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그가 묻기 전에 말해주자, 하고.






링 위에서 두 남자가 주먹을 내리고 있었다. 헤드기어를 벗고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터는 이한의 모습이, 땀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로 환하게 웃는 이한의 모습이 은서의 눈 안에, 그리고 가슴 안에 선명하게 파고들고 있었다.






*






“괜찮아요?”






이한이 미안한 표정으로 은서를 바라봤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게 하는 게 미안했기 때문이다. 


체육관 식구들이 오랜만에 왔는데 그냥 가면 안 된다고 붙잡는 바람에 체육관에서 같이 짜장면을 먹게 된 것이다. 


휴게실의 테이블 위에 랩 포장을 벗긴 짜장면 그릇이 쫙 늘어져 있다. 다른 이들의 그릇은 모두 곱빼기 그릇인데 은서의 그릇만 보통.






“저 짜장면 좋아해요.”






은서가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갈라 면을 섞는다. 빈 말이 아니라 정말 짜장면을 좋아했다. 


다만 중국집에 가서 혼자 먹기도 나쁘고, 시켜 먹자니 혼자 집에서 짜장면을 먹고 있는 것만큼 처량한 것이 없어서 시켜먹지도 못했던 것이다. 


거의 2년 만에 맡는 짜장의 고소한 기름 냄새에 은서가 침을 꿀꺽 삼켰다.






“막 묻히고 먹어도 흉보기 없기예요.”






짜장면의 최대 단점. 먹을 때 입가에 묻히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걸 아는 은서가 미리 이한에게 다짐을 받는다. 


물론 이 남자라면 그런 걸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말이다.






“가위로 잘라드려요?”


“끊어 먹어야 제 맛이죠.”






이 알콩달콩한 한 쌍의 바퀴벌레가 이렇게 짜장면 그릇을 앞에 두고 열심히 하트를 날리고 있는 사이 짜장면이 속에서 올라올 것 같은 사람들이 있었으니.






“여친 생긴 거 자랑하러 온 것 같아.”


“맞아. 솔로들 염장 지르려고 일부러 온 거야.”


“사악한 놈. 형님들 옆구리 시리다는 거 뻔히 알면서.”






사랑이 뚝뚝 떨어지는 두 사람의 모습을 다른 체육관 식구들이 부러움 반 시샘 반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중이다. 


얼마나 부럽게 쳐다보는지 면을 집어 올린 젓가락에서 면이 툭툭 떨어져도 모르고, 면이 코로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부러운 눈으로 그렇게 쳐다보는 것이다.






“그런데 너 운동 쉰 놈 같지 않게 몸이 왜 그렇게 좋냐?”






이한의 옆에서 면을 폭풍 흡입하던 선호가 힐끗 쳐다보며 묻는다. 운동 쉰 놈에게 진 것이 분한 얼굴이었다.






“금방 그렇게 변하나요. 가끔 집에서 움직이고 그래요.”


“이왕 움직일 거면 집에서 그러지 말고 주말에 한 번씩이라도 체육관 나와. 아무도 뭐라 안 그래. 다들 반가워하지.”




“제가 조금 그래요.”


“뭐가 그런데?”




“여기 공기 들이마시면 계속 있고 싶어져서요. 그리운 공기가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쉽게 올 수가 없네요.”


“일하는 건 어때?”




“좋아요.”


“그런데 언제까지 알바만 할 수는 없잖아. 이제 슬슬 진짜 직장을 얻어야지?”




“쉽지 않네요.”


“알바 틈틈이 자격증이라도 따놔. 그러면 내가 자리 좀 알아봐줄게.”




“지원이 대학 졸업하면요.”


“몇 학년이야?”




“이제 일학년이요. 올 해 들어갔으니까 아직 4년 남았어요.”


“하여간에 너도 참.”




“짜장면 불어 터진다, 빨리 먹어라.”


“네.”






열심히 짜장면을 먹으면서도 은서의 귀가 이한과 선호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동생이 있었구나.’






은서가 단무지를 집어 든다. 천애 고아가 아닌 이상 가족이 있는 것이 당연하다. 은서처럼 혈혈단신이 아닌 것이다.


가족. 한때 은서에게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그것.






‘응? 동생이 대학교 1학년이면 지금 이한 씨가 몇 살이라는 거지? 군대는 다녀왔나?’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서로 나이를 한 번도 말해주지도 묻지도 않았다는 것이 생각나는 은서였다.






웃기는 일이다. 사귀고, 같이 잠도 잤으면서 서로 나이를 모른다니. 나이만 모르는 것이 아니다. 동생이 있다는 것도 남의 입을 통해서 지금 알았다.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그런데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더 좋아진다. 


어떤 이들은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실망하는 것이 하나씩 는다고 하는데, 이 남자는 하나씩 알아갈 때마다 점점 더 좋아진다. 




언젠가, 이 남자에 대해 전부 알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이 남자가 얼마나 좋아져 있을까. 


문득 은서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어느 멋진 날, 이 남자에 대해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그런 멋진 날이 오면, 자신은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






“동생이 대학 다녀요?”






체육관을 나와 거리를 걸으며 은서가 옆에서 걷는 이한을 슬쩍 쳐다봤다. 근처에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이한이 은서를 데려가는 중이었다. 


짜장면과 카페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꼭 데려가고 싶다는 이한의 말에 은서가 흔쾌히 승낙한 것이다.






“네, 지원이라고, 올해 들어갔어요.”






이 남자는 중졸이라고 했다. 그런데 동생은 대학생. 듣자 하니 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위해 이 남자가 알바를 그렇게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운동을 그만둔 것도 그것 때문일까? 처음 만났을 때, 그때 틀림없이 ‘복싱은 돈이 되지 않아서’ 그만뒀다고 말했었다.






“변지원?






이름이 참 그렇다고 은서가 생각할 때 이한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한다.






“안지원이요.”


“네?”


“성이 달라요, 나하고는.”






뭔가 충격적인 말을 들은 기분에 은서가 이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형제간에 성이 다른 경우가 뭐가 있을까? 


부모님의 재혼으로 형제가 갈라졌다던가 하면 성이 달라지던가?






“저기.”






지금 묻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은서가 용기를 냈다.






“이한 씨 몇 살이어요?”






알아가려 한다면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머뭇거리다가는 때를 놓치고 말 것이다.






“아, 말씀 안 드렸구나. 왜 그랬을까.”






그제야 이한도 자기가 나이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고 은서의 나이를 묻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모양이다.






“스물여섯이요. 그러는 은서 씨는.”


“오마나.”






은서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그녀의 눈이 또 초롱초롱하게 빛난다.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하게 빛날 때면 불안해지는 이한이다.






“난 스물아홉인데.”






세 살이나 어린 남자와 연애를 시작한 것이다, 자그마치 세 살이나. 뭔가 어리게 보이긴 했지만 동안이려니 했는데, 진짜 연하인 것이다.






“누나라고 부를 생각하지 말아요.”






이한이 무슨 생각하는 지 다 안다는 듯 은서가 미리 선수를 친다. 사귀는 남자에게 ‘누나’라는 말을 들으면 죽고 싶어질 것이다. 누나는 절대로 안 된다. 네버!






*






“오랜만이네? 이한 씨?”






물 컵을 내려놓으며 서글서글한 눈매의 남자가 웃는다.






“네, 형. 오랜만에 왔어요. 잘 계셨죠?”


“그럼. 이쪽은.”






이한이 은서를 데리고 온 카페는 주택가 골목 한쪽에 자리 잡은 작은 카페였다. 


한쪽 벽에 책이 가득 꽂혀 있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나른한 오후의 티타임 하기 좋은 그런 분위기의 편안한 카페. 


테이블에 겨우 네 개 밖에 되지 않아서 이렇게 장사해서 수익이 날까 걱정이 될 정도로 작고 조용한 카페였다. 




게다가 카페 입구에는 떡하니 ‘테이크 아웃 안 됩니다’라고 써 붙여 놓았다. 


그냥 커피를 마음껏 마시기 위해서 카페를 차리지 않은 이상 이렇게 영업하는 집은 없을 것이다.






“여자 친구예요. 채은서 씨라고. 은서 씨, 이쪽은 카페 사장님.”


“안녕하세요.”






은서가 살짝 눈인사를 한다.






“안녕하세요, 우서진이라고 합니다. 별일이네요, 이한 씨가 연애도 다 하고.”






서글서글하게 웃는데 이상하게 은서에게는 그 웃음이 호감으로 비치지는 않는다. 여자의 감이라고나 할까. 


이 남자는 분명 평소에도 잘 웃는 남자일 것이다. 눈가에 주름이 그걸 알려준다. 


그리고 요란스럽게 웃는 것도 아니고 늘 이렇게 서글서글하게, 보는 사람이 기분 좋을 정도로 웃을 것이다. 




그 웃음을 보며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은서의 기분은 그렇지 못하다. 미묘하게 뭔가 마음에 거슬리는 것이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이상하게 기분이 별로라는 것도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은서가 칠판에 백묵으로 써놓은 메뉴를 쳐다본다.






“전 더치 아이스로 주세요.”


“형, 은서 씨는 더치 아이스, 그리고 저는.”


“에스프레소.”






안 들어도 안다는 듯 그 남자 서진이 미리 말해버린다.






“아직 커피 취향 안 변했지?”


“네, 기억해주셔서 고마워요.”


“유일한 단골인데 잊어버리면 쓰나.”






서진이 돌아서서 카운터로 가는 모습을 은서가 힐끗 쳐다본다. 이한과는 친해 보이는 데 그녀는 저 남자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자, 얘기 계속해요. 왜 동생하고 성이 달라요?”






걸으면서 하던 이야기를 계속 듣고 싶은 은서가 이한을 재촉했다. 나이 때문에 이야기가 끊어진 것이다.






“저 군대 안 갔다 왔어요.”






동생 이야기를 해달라니까 왜 뜬금없이 군대 이야기를 꺼내는지 은서가 이해하지 못한다.






“군대는 나중에 가도 되니까, 동생하고 성이 왜 다른지 말 안 해줄 거예요?”


“그거 알아요? 고아는 군대 안 간다는 거?”


“네?”






처음 듣는 말에 은서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이한이 조금 쓸쓸하게 웃고 있었다.






“저 고아원 출신이에요. 중학교 졸업할 때까지 고아원에 있었어요. 그리고 중학교 졸업하고 체육관에 들어가면서부터 고아원에서 나왔어요.”


“그러면 동생은.”


“그러다가 작년 연말에 체육관에서 나왔어요. 12월 며칠이었는데 눈이 많이 오던 날이었어요.”






뭔가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을 은서가 느낄 수 있었다. 그냥 동생이 성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중요한 이야기, 이한 자신에 대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꺼내고 있다는 걸 은서가 느꼈다. 




앞으로 이 남자와 자신이 계속 연애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고 가야 하는 이야기라는 것을. 이 이야기를 듣고 나면 은서 자신도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 것일까?






“작년 11월 말에, 고아원 원장님이 전화하셨어요. 평소에 거의 연락 안 하시던 분이셨는데 무슨 일인지 전화 하셨더라고요. 잠깐 시간 내서 들르라고. 그래서 갔죠. 갔더니.”






이한의 손가락이 물 컵을 달그락거리면서 움직인다.






“저 버려진 거 아니었어요. 어머니가 더 이상 절 키우시지 못하겠다고 고아원에 아주 맡기고 가신 거죠.”






그게 버려진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은서가 꾹 참았다.






“그런데 고아원으로 연락이 왔더래요.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절 고아원에 두고 한 번도 찾아오시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원장님과는 가끔 연락하셨나 보더라고요. 


그 사이에 재혼도 하시고 그러셨는데, 재혼하신 분도 사고로 돌아가셨다고 하고, 어머니가 재혼한 분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 낳고 사시다가 돌아가셨대요. 암이었는데 너무 늦게 발견해서 수술도 못하셨대요. 


그래서 원장님이 장례식에는 가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제 생각에도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장례식에 갔었어요. 거기서, 지원이를 봤어요.”






슬픈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한의 목소리에 은서가 부럽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이 남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이렇게 담담하게 풀어낼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녀는 이 남자처럼 이렇게 담담하게 말하지는 못할 것이다. 아마, 말하면서 울어버릴지도 모른다.






“검은 양복을 입고 조문객들을 맞고 있는 지원이를 보는데 할 말이 없더라고요. 내 동생이라고 하는데, 그때 처음 봤거든요. 솔직히 말하자면 영정 사진 속의 엄마 얼굴도 낯설고.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엄마와 동생이라는 게 실감도 나지 않고 믿기지도 않았는데.”






물 컵을 만지작거리는 이한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밤에, 조문객들이 다 돌아가고 지원이 혼자 빈소를 지키는 게 너무 안돼 보여서 내가 대신 자리 지키고 있을 테니까 눈 좀 붙이라고 말을 거는데 지원이가 갑자기 우는 거예요. 


갑자기 울음을 터트리니까 나도 당황해서 어떻게 해줘야 할지도 모르고.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나도 덩달아 눈물이 나와 버려서 같이 울었어요. 


지원이도 울고 나도 울고. 지원이는 세상에 혼자 남겨져서 울고 나는 두 번 버려진 기분에 울고, 둘 다 그렇게 실컷 울었어요. 


그리고 생각했어요. 내가 지원이 형이라고. 피가 반 밖에 섞이지는 않았지만 내가 지원이 형이니까 이제 내가 지원이를 돌봐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동안 형으로서 아무것도 못해줬으니까 지금부터라도 지원이에게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고 싶어졌어요.”






“그래서, 복싱 그만뒀어요? 지원이 대학 보내려고요?”




“지원이 똑똑해요. 공부도 잘하고. 그런데 엄마가 병원에 있을 때 밀린 병원비 때문에 전셋집 있던 거 전세금 빼고, 부의금 다 써버렸어요. 


지원이가 갈 곳이 없어져서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지원이와 함께 살고, 지원이가 아무 걱정 없이 학교 다닐 수 있게 해주려면.”




“이한 씨 바보네요.”






그녀가 그 이상의 어울리는 말을 찾지 못해 그 말을 할 때 서진이 커피를 가지고 왔다.






“에스프레소와 더치 아이스.”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서진이 은서를 살며시 쳐다본다. 역시 그 눈동자에 호의가 담겨져 있지 않다는 것을 은서가 느끼는 순간이었다.






*






“안 써요?”


“써요.”






보기만 해도 쓴 커피를 마시는 이한을 은서가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다. 은서는 딱 한번 에스프레소를 마신 기억이 있다. 


대학에 막 들어갔을 때 친구들과 간 카페에서 우아함을 한번 떨어보겠다고 에스프레소를 시켰다가 그날 죽는 줄 알았던 것이다. 


마셔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진땀을 뻘뻘 흘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은서가 작은 잔에 담겨진 그 새카만 커피를 마시는 이한을 쳐다봤다.






“그 쓴 걸 왜 마셔요? 라떼 드세요. 단 거 좋아하잖아요.”






그렇다. 아주 자연스럽게 맥심 밀크를 찾는 이 남자를 위해서 원두에 시럽까지 탄 그녀가 아니던가.






“단 거 좋아하는데 마시면 안 되던 때가 있었어요. 감량해야 하는데 자꾸 단 게 생각나고, 그때 정말 빵집 앞에서 침 흘리며 서 있을 때도 있었어요. 


가장 유혹이 컸던데 밀크 커피였어요. 엄청 달달한데 그거 마시면 그날 땀 흘린 게 다 수포로 돌아가거든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어요. 나중에 감량 안 해도 되는 날이 오면 마음껏 밀크 커피 마시자고.”






“그래서 그 쓴 걸 마셔요? 차라리 아메리카노 마셔요. 시럽 넣지 말고.”






은서의 말에 이한이 카운터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서진을 힐끗 쳐다본다.






“이건 비밀인데요.”






이한의 목소리가 낮아진다. 뭔가 비밀스러운 분위기에 은서가 덩달아 몸을 낮췄다.






“저 형은 제가 에스프레소를 좋아하는 줄 알아요. 그런 형한테 차마 써서 못 마시겠다는 말을 못하겠어요.”


“풉.”






은서가 손으로 입을 가린다. 웃음이 나오는데 웃으면 안 된다.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부들 부들 떨고 있는 모습을 카운터에 앉아 있던 서진이 힐끗 쳐다본다. 왜 저러나? 하는 눈빛이다.






“여기 카페 생긴 지 이 년 지났거든요. 이 년 전에 카페 공사할 때 제가 아침저녁으로 이 앞을 계속 뛰어 다녔어요. 


땀 뻘뻘 흘리고 뛰어다니는 게 불쌍하게 보였는지 저 형이 얼음물을 주더라고요. 그때는 형도 여기 인테리어 하느라 완전히 잡부 수준이었거든요. 


여기 가게, 저 형이 혼자서 다 리모델링한 거예요. 토목과 나왔대요. 


그렇게 물 받아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고, 또 아침저녁으로 다니며 인사하다가 친해졌는데 카페 다 완성되고 첫 손님으로 절 초대했거든요. 




그런데 거기서 형이 묻는 거예요. 뭐 마시고 싶으냐고. 


그런데 저 그때까지 이런 카페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서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는 거예요. 


막 원두 이름 쓰여 있고, 그때까지 내가 아는 커피는 맥심뿐이었는데 뭘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리고 있으니까 저 형이 단 거 마시겠냐고 묻잖아요? 그래서 단 거는 싫다고 했더니 가져다 준 게.”






“에스프레소.”


“어울린대요. 내가 에스프레소 좋아하게 생겼데요. 그 말에 한 모금 마셨는데.”




“죽을 맛이었죠?”


“지옥 가는 줄 알았어요.”


“그 기분 알아요.”






은서가 심하게 동감했다.






“그런데 타준 형 생각해서 뱉지도 못하고, 맛없다고 하지도 못하고, 맛있냐고, 입에 맞느냐고 묻는데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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