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남자 2

맛있는 남자 2

M 망가조아 0 1861

맛있는 남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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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서가 얼굴 가득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밥 위에 꽁치 살을 올려 한입 떠먹는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이 남자와 먹는 밥은 맛있다. 얼마 만에 이렇게 맛있는 밥을 먹는 건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저, 그런데 어제 그 과장이라는 놈은 어떻게 됐어요?”






이한이 은근히 걱정이 됐는지 물어온다. 분명 오늘 회사에서 은서에게 화풀이를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 인간이요? 오늘 병가 내고 안 나왔어요.”


“네?”






“술이 과해서 넘어지는 바람에 많이 다쳤다고 이삼 일 쉰다고 사무실에 연락 왔어요. 본인도 창피하겠죠. 그 꼴을 해서 사무실 나오기도 그렇고.”


“아.”






이한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어젯밤에 주먹에 힘을 실은 것이 사실이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코뼈가 주저앉고 이빨도 잘하면 한두 개가 나갔을 것이다. 이한의 주먹이 꽤 매섭기 때문이다.






“이한 씨, 어제 보니까 엄청 세던데, 무슨 운동했어요? 호신술?”






평소에 과장 윤기수 그 인간이 취미 삼아 복싱을 한다고 떠들고 다니던 것은 은서도 아는 사실이었다. 


아마추어 복싱이지만 그래도 꽤 오래 해서 제법 잘한다고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그런 과장을 한 번에 때려눕힌 것이다.






“전에 복싱 조금 했어요.”


“아, 복싱. 그 과장 인간도 복싱했다고 했는데.”






“선수로 뛰다가 그만뒀어요.”


“우와, 선수. 멋있네요.”






선수라는 말에 은서가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뭔가 세 보이긴 했지만 역시 전문가는 다르다는 그런 눈빛이다.






“프로 데뷔는 못 했고요, 도중에 그만뒀어요.”


“왜요? 계속 하지 그랬어요.”






“복싱은 돈이 안 되니까요.”


“좋아했죠? 복싱?”






“물론이죠. 좋아하니까 체급 때문에 굶어가면서도 했죠. 좋아하지 않으면 복싱은 못 해요.”


“좋아하는 걸 계속했으면 좋았을 텐데. 아깝네요.”




“좋아하는 것과 잘하는 것은 다르니까요. 좋아는 하는데 잘은 못했어요. 그래서 복싱으로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그만둔 거예요. 


더 늦기 전에 다른 일을 찾아보려고요. 그런데 막상 그만두고 나니까 다른 일도 할 게 없다는 게 우습더라고요.”




“아.”






웃고 있지만 이한의 눈이 쓸쓸하게 보여서 은서가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쓸쓸해 보이는 남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저 중졸이거든요. 중학교 졸업하고 바로 체육관으로 들어가서 몇 년 동안 계속 복싱만 하느라 다른 사람들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 가고, 자격증 따고 할 동안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어요. 자격증이라고 있는 건 운전면허 하나뿐이고요. 


그런데 막상 복싱 그만두고 세상으로 나오니까 정말 막막한 거 있죠.  내 두 손에 들려 있는 건 하나도 없는데 세상은 무섭게 돌아가고. 


가진 것은 몸뿐이라고 닥치는 대로 알바도 하고, 알바가 없을 때는 공사판에도 가지만 앞이 보이지 않는 느낌만 강해져요. 


이대로 시간이 가고, 아무것도 해놓은 것 없이 늙고, 늙으면 그땐 지금처럼 일도 못 할 거고.”






말하다 말고 목이 메는지 이한이 젓가락을 내려놓는다. 그러고는 물을 들이마셨다.






“미안해요. 밥 먹는데 이런 우울한 얘기를 해서.”


“애인 있어요?”


“네?”






뜬금없는 은서의 물음에 이한이 눈을 크게 떴다. 


조금 전까지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던 자신에게 갑자기 묻는 말이 애인 있냐는 말이다.






“없죠? 없어 보여요.”


“그, 그게.”






이한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도대체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이 여자, 상당히 이상하다. 처음 본 남자에게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지 않나, 점심 먹자고 그린 라이트를 켜대지 않나, 이제는 애인 있냐고 묻는다.






“나하고 연애할래요?”


“네엣?!”






이번에야말로 이한이 뒤로 넘어질 만큼 놀랐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은서는 뻔뻔하리만큼 담담했다.






“나 지금 엄청 외로워서 애인 구하고 있는 중인데, 이한 씨도 애인 없으니까 우리 연애 한번 해볼래요? 


어차피 이한 씨도 알바하느라 여자 만나기 힘들잖아요. 


그리고 난 같이 밥 먹어주고, 이야기 나눠주고, 그리고 가끔 과장처럼 나쁜 인간에게서 지켜줄 든든한 애인이 필요하고. 서로 좋지 않아요? 


결혼하자는 게 아니라 연애요, 연애. 결혼까지 갈 것 아니니까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 없잖아요. 


어차피 요즘은 다들 연애하다가 헤어지고 그러니까. 어때요?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전 내세울 게 별로 없고.”


“그런 게 중요해요?”






“그래도 난 가방끈도 짧고.”


“나 가방끈 길어요. 석사 졸업했어요.”






“가진 것도 없고.”


“나 가진 것 많아요. 생각보다 부자예요.”






“직업도 없고.”


“나 좋은 회사 다녀요. 물론 그만둘까 고민 중이긴 하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우리 둘이 합하면 평타는 치잖아요. 둘이 합쳐 평균이면 됐지 뭘 따져요? 그냥 대답해요. 연애 할래요? 말래요?”






“.....”


“고민은 나중에 결혼할 여자 만나면 하고, 결정해요. 연애할래요?”


“해, 볼까요?”






이한이 더듬거리며 대답하자 은서가 생긋 웃으며 테이블의 벨을 누른다. 종업원이 오자 은서가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소주 한 병이요!”






그리고 당황한 이한을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린다.






“첫 데이트 기념 축하주예요.”






이 속전속결의 놀라운 여자 앞에서 이한이 한마디도 못하고 입만 벌리고 있었다. 엉겁결에 애인이 생긴 것이다. 그것도 반 강제로.






“뭐지?”






걸레질을 하면서 이한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다. 점심식사를 끝내고 알바를 하는 빌딩의 화장실 청소를 하는 중이었다.






“뭐지?”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한 것이다. 뭔가 낚인 것 같은데, 자신이 그런 여자가 낚을 만한 건덕지가 있는 남자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누가 봐도 그 여자가 과분하리만큼 더 낫다. 






그 여자 말처럼 가방끈도, 직장도, 외모도, 그리고 확인은 안 해봤지만 일단 재산도 그 여자가 훨씬 더 낫다. 


이건 뭐 99:1도 아니고 모든 면에서 훨씬 나은 여자가 왜 자신을 낚은 것일까? 






‘고마워서?’라기엔 이상하다. 고맙다면 밥 한 끼면 된다. 첫눈에 반해서? 라는 느낌도 아니다. 


그리고 이한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자기가 첫눈에 반할 외모는 아니다. 


못생긴 건 아니지만 잘생긴 것도 아니다. 평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뭐지?”






이건 그린라이트가 아니라는 것만은 이한도 느끼고 있다. 


그린라이트가 아니라 뭔가 낚인 그런 기분. 기다리고 있다가 그물을 친 것에 확 낚인 그런 기분.






“허얼… 뭐지?”






닦은 데를 또 닦으며 변기가 윤이 반질반질 나게 닦으며 이한이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는 걸 또 고민해본다. 


일단 이한의 알바 시간 때문에 두 사람이 만나는 건 점심과 저녁 식사로 한정지었다.






빌딩 청소 알바가 시작하기 전에 만나 점심을 먹고 헤어졌다가 알바가 끝나고 저녁 배달 알바가 시작하기 전 만나 저녁을 먹고 헤어진다. 


빌딩 알바가 없는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조금 멀리까지 가서 점심을 먹기로 약속했다.






“왜 계속 먹기만 하지?”






그녀와의 모든 데이트 약속에는 반드시 밥이 끼어 있다. 보통 데이트라면 놀이동산도 가고, 영화관도 가고, 커피도 마시고 그러지 않던가? 


그런데 그녀는 약속을 무조건 밥으로 정했다.






“뭐지?”






물론 모든 밥값은 그녀가 대기로 했다. 그럴 수는 없다는 이한에게 그녀는 당당하게 ‘내가 더 많이 버니까’라고 못 박아 말했다. 


그 말 앞에 이한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이한이 지금까지 여자를 많이 봐온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여자는 처음이었다. 그리하여 오늘 저녁 식사도 같이 하기로 한 것이다. 


뭔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휘리릭 일이 진행되는 느낌에 이한이 얼떨떨한 기분을 감출 수가 없다.






- 연애할래요?






하지만 그 말을 들었을 때 순간적으로 가슴이 뛰었다. 처음 들어본 말이었다.






- 나하고 연애할래요?






‘연애’라는 건 평생 자신과는 상관없는 말이라고, 남들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연애하자는 말을 듣는 순간 한 번도 뛰어본 적이 없는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복싱을 할 때, 시합을 앞두고도 그렇게 뛴 적이 없던 심장이다. 


강심장이라는 말을 들어왔다. 어떤 일 앞에서도 담담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 연애할래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한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리고 캘린더에 표시를 해놓는다. 5월 13일. 심장이 움직이다.






*






“뭐해?”






옆자리 혜주가 은서를 신기한 듯 쳐다봤다. 인터넷 맛집 기사만 쭉 늘어놓고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갑자기 또 미친 듯이 메모하는 그녀의 모습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여기, 여기 다 가보려고.”


“혼자서?”






“아니, 애인하고.”


“뭐어?! 은서 씨 애인 생겼어?!”






놀란 혜주를 향해 은서가 씩 웃는다.






“나도 이제 같이 밥 먹을 남자 생겼어.”






항상 애인과 이런 데를 갔다 왔다고 카스에 사진을 올리던 혜주가 늘 부러웠던 은서다. 애인이 부러웠던 것이 아니라 밥이 부러웠다. 


사진 속에서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연인은 관심 없었다. 두 사람 앞에 차려진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오로지 부러울 뿐이었다.






“어떻게 만났어? 뭐하는 사람이야?”






그동안 이런 저런 소개팅에서 만난 남자들을 전부 거절했던 은서가 오케이한 남자가 과연 어떤 남자인지 궁금해지는 혜주다. 


눈이 높은 것인지 괜찮은 스펙의 남자들을 소개해줘도 늘 한번 만나면 싫다고 애프터에 응하지 않던 은서의 첫 번째 애인. 대체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 궁금한 것이다.






“몇 살이야? 사진 있어?”


“나중에. 지금은 비밀.”






실실 웃으며 은서가 부대찌개가 맛있다는 집의 전화번호와 약도를 이한의 핸드폰으로 전송을 한다.






“어떤 남자냐고. 조금만 가르쳐줘, 응?”






자꾸 캐묻는 혜주를 향해 은서가 살짝 한마디만 던진다.






“맛있는 남자.”


“응?”






영문을 모르겠다는 혜주를 쳐다보는 은서의 얼굴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






“응? 이게 뭐예요?”






보글보글 끓어오르는 부대찌개를 사이에 두고 이한이 뭔가를 은서에게 내밀었다.






“아, 그, 별 것 아니고요, 사귀게 된 기념이랄까, 뭐… 그런 건데.”


“선물?”






은서가 이한이 건네주는 상자를 열어본다. 귀걸이 한 쌍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예쁘다.”






은서가 작은 귀걸이가 든 상자를 들여다보다 이한을 향해 생긋 웃어준다.






“고마워요. 잘 쓸게요.”






귀걸이 상자를 핸드백 안에 넣는 은서를 보며 이한이 머리를 긁적인다.






“싼 거예요. 나중에 월급 받으면 좋은 거 해줄게요.”






약속 장소로 오던 중에 좌판을 지나치다 눈에 들어온 것을 사온 이한이다. 


싼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이한의 눈에는 예쁘게 보였다. 


여자들의 물건은 잘 모르지만 자기 눈에 예쁘게 보이니까 은서도 좋아해줄지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은서가 좋아하는 모습에 이한이 마음을 놓았다. 




내심 걱정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싸구려 선물을 싫어하면 어쩌나, 그런 마음이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






“네?”






은서의 말에 이한이 당황해버렸다. 이 여자는 정말 사람 당황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옆 자리에 얌전하게 앉아만 있을게요. 싫어요?”






이한이 배달할 동안 조수석에 앉아서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은서가 말했기 때문이다. 


저녁식사 마치고 바래다준다는 이한의 말에 은서가 집에 돌아가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배달하는 이한의 옆에 얌전히, 아주 얌전히 앉아 있겠다는 말에 이한이 할 말이 없어졌다.






“몇 시간 걸려요.”


“알아요.”






“그때까지 차 안에서 뭐하려고요?”


“핸드폰으로 게임하죠, 뭐.”






“게임은 집에 가서.”


“이한 씨 옆에 있고 싶어서요. 그럼 안 돼요?”




“.....”


“집에 가도 아무도 없어서 심심해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한 씨 배달하는 것도 구경하고, 드라이브도 하고 그러고 싶어요.”






맛있는 부대찌개를 먹고 이한과 헤어지려고 하니 막상 집으로 돌아가기 싫어진 은서였다. 


또 다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서 누구도 대답해주지 않는 ‘다녀왔습니다’를 말하기는 싫었다. 


썰렁하다 못해 쓸쓸하기까지 한 집으로 돌아가서 또 혼자라는 것을 실감하기보다는 차라리 이한의 옆에 있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슬퍼진다. 


조용하고 사람의 온기라고는 없는 그곳에서 혼자 잠들고 혼자 깨어나는 일상은 이제 슬프게 싫다. 


온기를 알면 알수록, 누군가와 함께 먹는 밥이 맛있다는 걸 알면 알수록 혼자인 공간으로는 더 가기 싫어지는 것이다.






“부탁해요.”






부탁한다고 말하는 은서의 왠지 쓸쓸해 보이는 눈매에 이한이 더 이상 거절은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날 밤의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






“누구야?”






차의 짐칸에 술 상자를 싣는 것을 도와주던 남자가 이한에게 슬쩍 눈짓했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은서를 발견한 것이다.






“여, 여자 친구요.”






여자 친구라고 말하는 이한의 얼굴이 벌게진다. 뭔가 좋으면서도 뭔가 쑥스러운 것이다.






“여자 친구? 뭐야? 그러면 나한테 소개를 했어야지.”


“아, 형. 나중에요. 아직 사귄 지 얼마 안 돼서.”






“언제부터 사귀었는데?”


“오, 오늘이요.”






“어?”


“오늘부터 사귀기로 했어요.”


“예쁜데? 뭐하는 여자야?”






남자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계속 차 안을 힐끗 힐끗 쳐다보자 이한이 남자의 등을 떠밀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그냥 직장 다니고 그래요. 자꾸 묻지 마세요.”


“야, 너 능력 좋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오늘부터 사귀었어도 만난 건 이전부터지?”


“네.”






어제부터 만났다. 하지만 그건 말하지 말자, 하고 이한이 생각했다.






“그럼 둘이 모텔 가려면 좀 더 있어야겠네?”


“네?”






남자의 말에 이한의 눈이 둥그레졌다.






“어딜 가요?”


“모텔.”


“거길 왜 가요?”






“바보냐? 첫 만남, 밥, 커피, 영화, 맥주, 그다음엔 모텔이잖아, 데이트 순서가. 애가 숙맥이라서 아무것도 모르네.”






“아, 형 쫌-!”






얼굴을 붉히며 가게에서 나가려는 이한의 바지 뒷주머니에 남자가 지갑에서 꺼낸 뭔가를 쑥 넣어준다.






“이거 줄게. 나중에 형한테 감사하며 사용해.”


“네? 뭔데요?”






주머니에 들어간 게 뭔지 확인하려는 이한을 남자가 등을 떠민다.






“배달 늦었어, 빨리 가.”


“네, 다녀올게요.”






이한이 뭔가 찝찝한 채로 가게를 나선다. 차 안에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은서가 이한을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다.






- 커피, 영화, 맥주 그다음에 모텔.






“아, 저 형 미쳤나 봐.”






이한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조금 전 형이라는 남자의 목소리를 마구마구 지워버린다. 그리고 운전석으로 올라타는 것이다.






*






“감사합니다!”






큰 소리로 인사하고 이한이 차로 돌아왔다. 이제 마지막 배달을 마친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끝나서 다음 알바 가기까지 시간의 여유가 있었다. 


은서를 집까지 바래다줄 시간이 넉넉하겠다 싶어 이한이 기분 좋게 차 문을 열었다.






“은서 씨… 어?”






조수석에서 열심히 핸드폰을 잡고 게임을 하고 있던 은서가 어느새 잠들어 있었다. 


등받이를 세운 딱딱한 의자에 목을 90도로 꺾어 잠이 든 은서의 모습에 이한이 잠시 망설였다. 깨워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자게 내버려 둘 것인지.


많이 피곤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직장에서 일하고 퇴근도 하지 않고 이한 자신과 저녁을 먹고 배달에 따라 나섰다.


옆에서 차만 타고 있다 해도 피곤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곯아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이한이 조용히 차에 올라타 문을 닫는다.


이대로 은서의 아파트까지 간 다음에 그녀를 깨워도 늦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왕 잠든 거 조금 더 오래 자게 해주자 싶어서 사이드 브레이크를 풀려던 이한이 옆을 힐끔 쳐다 본다. 


아무래도 90도로 꺾인 그녀의 목이 불편해 보이는 것이다. 저렇게 잠이 들면 분명히 깼을 때 목이 아플 것이다.






“자, 똑바로 누워서 자요.”






이한이 의자 레버를 살짝 당기며 손으로 의자를 뒤로 밀었다. 더블캡이라 웬만큼 등받이가 뒤로 넘어가는 차라서 다행이었다.






“으응.”






등받이를 뒤로 넘겨주는데도 은서가 깨지 않는다. 참 깊이도 잠들었다 생각하며 이한이 그녀를 의자와 함께 뒤로 눕혀줬다. 


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지는 이한이었다.


전혀 경계심이 없이, 자기 같은 남자 뭘 믿고 이렇게 무방비로 잠든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남자는 다 늑대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아니면 자기만큼은 늑대가 아닐 거라고 믿어주는 것일까. 이한이 씩 웃으며 액셀러레이터를 밟는다. 


믿어주면 믿어주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것이다. 






살짝 틀어놓은 카오디오에서 조용한 팝송이 흘러나온다. 오래 전 팝송이다. 이한이 좋아하는 “Sound of Silence”다. 


예전에 아직 운동을 하고 있을 때 러닝을 할 때면 귀에 이어폰을 뀌고 이 노래를 들으며 뛰곤 했었다. 






조용한 음악과 서늘한 새벽 공기, 그리고 숨 가쁘게 오르던 언덕길. 이 언밸런스한 조화를 좋아했었다. 


귓가를 울리는 기타의 선율을 들으며 이한이 저도 모르게 노래를 따라 흥얼거린다. 


그의 옆에서 은서가 기분 좋은 꿈을 꾸는 것처럼 살며시 웃으며 잠이 들어 있었다.






*






“.....”






은서가 살며시 실눈을 뜨고 옆을 올려다봤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르지만 잠이 들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의자를 눕힌 채로 누워 있는데, 아무리 머리를 뒤져봐도 자기가 의자를 눕히지는 않았다. 그러면 옆의 이 남자가 그렇게 해줬다는 뜻이다. 






지금 이한은 운전을 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카 오디오에서 나오는 팝송을 따라 부르는 것이다. 


재미있는 남자라고 은서가 생각했다. 이런 올드한 팝송을 따라 부르는 남자, 흔하지 않은 케이스다. 






가방끈도 짧다면서 저 영어 가사는 언제 외워 저렇게 부르는 것일까. 수십 수백 번을 들었던 것일까? 이런 팝송이 이 남자의 취향인 것일까. 


은서가 문득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 선 이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아마 멋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남자라면 분명 멋있을 것이다.






다정한 복서. 이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이 또 어디 있겠냐만은, 이 남자를 보고 있으면 그 단어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벌써 잠은 깨었지만 그녀가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이대로 조금 더 이 남자의 노래 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대로 조금 더 이 남자의 어린아이같이 다정한 모습을, 노래를 흥얼거리는 괜찮은 그림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흔들거리는 차 안에서 편안한 얼굴로 노래하는 남자를 올려다보는 은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함께 있으면 행복한 느낌이 드는 남자. 세상에 이런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따뜻한 느낌을 주는 사람이.






*






- 그만둔다고?


- 네. 죄송합니다.




- 너 이거 그만둬서 뭐 하려고? 너 이거 하려고 고등학교도 안 갔잖아. 요즘 중졸이 할 수 있는 게 뭐 있는 줄 알아?


- 찾아봐야죠.




- 이유가 뭔데?


- 그냥, 집안일 때문에요.




- 너 가족 없다며. 고아원 출신이라며.


- 그렇게 됐어요. 죄송합니다.






앞 유리에 한 방울 두 방울 물기가 맺혀지고 있었다.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말은 없었는데 약한 빗줄기가 떨어지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와이퍼의 소리와 카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올드 팝송의 선율, 그리고 텅텅거리며 떨어지는 빗소리. 


문득 떠오른 기억에 이한이 쓴웃음을 지었다. 






음악이 기억을 불러일으킨다. 열정적이었던 때의 기억이 다시 살아나 꿈을 버린 현실이 씁쓸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새벽같이 일어나 모래주머니를 차고 언덕길을 뛰어오르던 그 푸른 새벽의 열정은 짐을 정리해서 체육관을 나서며 가슴 속 깊이 묻어두었었다. 


하지만 아무리 꼭꼭 묻어둔 기억이라고 해도 이렇게 불현 듯 머리를 쳐들고 마는 것이다.






“아함.”






옆에서 은서가 기지개를 펴는 소리가 들린다. 곤히 잠들어 있더니 깬 것이다. 아니, 진즉에 깨어 있었지만 이한만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잘 잤어요?”




“덜컹덜컹거려서 잠이 잘 오네요. 이상하죠? 차가 덜컹거리면 잠이 왜 그리 잘 오는지.”






은서가 지금 막 일어난 것처럼 약간 오버하며 하품을 한다. 일찌감치 깨서 옆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는 말을 하기는 좀 그렇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 남자의 옆모습을 아주 세심하게 뜯어볼 수 있었다. 






잘생긴 건 아닌데 하나씩 뜯어보니 못난 구석이 없는 남자다.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얼굴인데 하나하나 놓고 보면 참 예쁘게 생긴 남자다.






신기했다. 전체를 볼 때와 하나하나를 볼 때가 이렇게 다를 수도 있구나 싶어 은서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다. 그리고 입술도 예쁜데 하나로 모아 놓으면 평범한 인상이 된다.






평범한 인상. 이내 은서가 그 단어를 정정한다. 선한 인상. 편안한 인상. 그래, 평범한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선한 얼굴이다. 


이 남자는. 그래서 함께 있으면 이렇게 마음이 편한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늑한 느낌이 드는 건지도 모른다. 






이렇게 편안하게 잠이 들어본 것이 얼마만일까. 


누군가의 옆에서,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옆에서 이렇게 편안하게 골아 떨어져 본 적이 대체 얼마만일까. 


잠이 들었을 때 누군가 옆에 있어준다는 것은 이렇게나 아늑하고 편안한 느낌인데. 그녀는 꽤 오래 이 느낌을 잃어버렸다.






“다 왔어요. 우산 안 가지고 있죠? 이거 가져가요.”






이한이 시트 밑에서 우산 하나를 꺼낸다. 준비성도 좋은 남자다. 항상 시트 밑에 우산을 예비해놓는 것일까.






“이거 나 주면 이한 씨는 어떻게 하려고요?”


“곧바로 편의점으로 갈 거니까 괜찮아요. 새벽이면 비 그치겠죠. 아니면 편의점에 비치된 우산 빌려도 되고요.”


“흐응.”






잠깐 생각을 하던 은서가 생긋 웃는다.






“그러지 말고 집까지 이한 씨가 우산 씌워줘요. 현관까지 나 바래다주고 우산 가지고 돌아가면 되잖아요.”


“네?”


“그럴 거죠?”






은서의 말에 이한이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합리적인 것이다. 


그녀를 바래다주고 우산을 가지고 돌아오면 번거롭게 편의점 우산을 빌릴 이유도 없다.






*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보며 이한이 약간 당황했다. 


다시 생각을 해보니 엘리베이터를 탈 이유가 없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들여보내고 자신은 차로 돌아오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것이다. 손에는 빗물이 떨어지는 우산을 들고 옆에는 은서가 서 있다.






‘나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이한이 눈만 껌뻑거린다. 지금이라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지 않고 잘 가라고 손 흔들고 바로 엘리베이터 닫고 내려가면 된다. 


그래야겠다고 생각하며 이한이 먼저 내리는 은서를 향해 잘 가라고 말하려 할 때.






“안 내려요?”






은서가 이상하다는 듯 돌아봤다.






“네? 아, 내려요.”






그 말에 이한이 당황해서 얼른 내린다. 그리고 또 당황하는 것이다.






‘나 왜 내렸지?’


“편의점 몇 시까지 가야 해요?”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며 은서가 묻는다.






“오늘 일찍 끝나서 한 시간 반 정도 여유 있어요.”


“와, 그러면 들어와서 차 한 잔 하고 가요.”


“네?”






현관문을 열며 들어오라고 고갯짓 하는 은서의 행동에 이한이 그 자리에 딱 굳어버린다. 


이 밤에 남자를 집안에 들어오라고 하는 의도가 뭘까? 머릿속에 엄청나게 불순한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올랐지만 이한이 애써 다 지워버린다. 


믿어주는 여자에게 이 무슨 불량한 상상이란 말인가. 


아직 자기는 인간이 덜 됐다고 생각하며 이한이 빗물 떨어지는 우산을 가지고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혼자 살아요?”






집안으로 들어온 이한이 집을 둘러보며 물어본다. 집이 조용했다. 가족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혼자 사는 집 치고는 넓다.






“여자 혼자 살아서 이상해요?”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집이 지저분해요. 흉보지 말아요.”






손님을 데려오리라고는 은서 자신도 상상도 못했다. 혼자서 살다보니 적당히 지저분한 것이 익숙해져 집안은 엉망이었다. 


음식을 해먹지 않으니 싱크대에 설거지가 쌓여 있지는 않지만 일회용 음식 용기들이 쓰레기통에 수북 쌓여 있다거나, 어제 벗어놓고 세탁기에 넣지 않은 옷들이 돌아다닌다거나, 읽고 던져놓은 책이 바닥에 굴러다닌다거나 하는 정도다. 


아, 골인에 실패해서 쓰레기통 옆에 구르는 맥주캔은 애교.






“커피 좋아해요?”




“아, 네.”






핸드백을 아무렇게나 소파에 던져놓은 은서가 선반을 뒤적인다. 집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집에서 커피향이 나겠다고 생각하며 은서가 부지런히 뭔가를 준비한다.






“커피 어떤 거 좋아해요?”


“네? 전 맥심 밀크.”


“네?”






냉동실에 넣어뒀던 원두를 꺼내던 은서가 슬쩍 돌아본다. 거실에 어색하게 서서 이한이 순진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아마 앉으라고 말하지 않아서 소파에 앉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고 은서가 생각했다. 


저 순진함의 끝은 과연 어디란 말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집에 맥심 밀크는 없다.






‘시럽에 우유 뿌리면 비슷하려나? 아, 그런데 우유 없다.’






은서의 손에 들린 원두 팩이 민망스럽게 흔들렸다.






*






“.....”






이한이 슬쩍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가 다시 가지런히 모은 무릎 위로 시선을 되돌린다.






“.....”






하지만 저도 모르게 시선이 다시 옆으로 슬쩍 옮겨 간다. 소파 구석에 살짝 삐져나온 그것은 틀림없는 그것이다. 그것. 여자들이 가슴에 하는 그것.






“.....”




보면 실례라고 생각하며 이한이 다시 무릎 위에 올린 손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다시 슬그머니 시선이 소파 구석으로 향한다. 


핑크빛 브래지어. 대충 벗어 박아둔 것이리라. 여자 속옷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이한의 뺨으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보면 안 되는데 자동으로 시선이 그쪽으로, 마치 자석이 끌리듯이 끌려가버린다.








‘미쳤어, 음흉해, 저런 건 보는 게 아니야. 예의가 아니야, 예의가 아니지.’






그때였다.






“커피가 왔습니다~”






은서가 발랄하게 웃으며 양손에 머그컵을 들고 왔다.






“미안해요, 쟁반 같은 걸 키우지 않아서.”






은서가 이한의 앞에 머그컵을 내려놓는다.






“고, 고맙습니다.”






이한이 얼른 컵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런 곳에 속옷을 둔 걸 알게 되면 창피해하겠지? 무안하겠지?’






이한이 은근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기가 모른 척 안 보면 그만이지만 그가 앉은 바로 옆에 브래지어가 나뒹굴고 있다는 걸 은서가 알게 되면 엄청나게 무안하고 부끄러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수, 숨겨줄까?’






적어도 소파 밑으로 던져 놓으면 낫지 않을까 싶어 이한이 기회만 엿본다. 


바로 손만 뻗으면 잡을 수 있으니까 은서가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때 얼른 집어서 소파 밑으로 던져 놓는 것이다.






“아, 저기 사진에 저분들은 부모님이신가 봐요.”






이한이 은서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벽에 걸린 사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예상은 적중. 은서가 이한의 손이 가리키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네, 엄마하고 아빠.”






기회는 이때다 하고 이한이 얼른 브래지어를 잡아 소파 밑으로 쑥 밀어 넣었다. 아니, 넣으려 했었다. 넣을 수 있었다.






“.....”




“.....”






은서가 이한의 손을 빤히 쳐다본다. 이한이 미처 소파 밑으로 손을 내리기 전에 그녀의 시선이 원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손에 핑크빛 브래지어를 든 채로 이한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완전 얼음 그 자체, 손가락 하나, 눈 한 번 깜빡일 수 없다. 


손에 잡힌 브래지어만이 민망스럽게 흔들린다. 찰나가 마치 영원처럼 느껴지는 몇 초가 흐르자 이한이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이, 이건… 저어, 그러니까.”


“아, 음… 그게 왜.”






이쯤 되면 당황한 건 은서도 마찬가지다. 저게 왜 저기에 있는가 싶은 것이다. 


기억을 쥐어짜자 오늘 아침에 옷을 갈아입으며 브래지어를 소파에 집어 던졌다는 것이 떠오른다.






왜! 왜 하필 브래지어를 소파에 던졌던 걸까! 왜! 그리고 이 남자는 왜 그걸 손에 들고 있는 것일까?! 기념으로? 여자 방에 왔던 기념으로? 아니면 사귀는 기념으로?






“그거 제 건데요.”






은서가 말하자마자 후회했다.






‘그럼 내 거지. 내 집에, 내 소파에 있는 브래지어가 당연히 내 거지, 내 거라고 자랑할 일이 있냐?! 아아아아악!’


“아, 여기, 드릴게요.”






이한이 얼른 두 손으로 공손하게 브래지어를 은서에게 내밀었다. 그걸 또 은서가 두 손으로 받는다. 


마치 엄청나게 중요한 뭔가를 주고받듯이 두 사람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브래지어를 주고받는다.






“이, 이게 왜 거기 있지? 아하하하하.”






은서가 어색하게 웃으며 받아든 브래지어를 자기가 앉은 소파 뒤로 감춘다.


이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러게 평소에 집 정리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다.






“아, 저… 커피 잘 마셨어요. 알바를 가야 해서.”






이한이 일어나는 순간 은서는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아직 커피를 다 마시지 않은 걸 알지만 이대로 이한과 얼굴을 마주보고 있기에는 너무 뻘쭘한 것이다. 


내일 집 정리 잘 해놓고 다시 한 번 초대하자, 생각하며 은서가 따라 일어섰다.






“차 키가.”






이한이 땀을 뻘뻘 흘리며 주머니를 뒤졌다. 당황하니 차 키를 어디에 뒀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앞주머니를 뒤지던 이한이 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 어디 뒀지?”






차 키는 항상 앞주머니에 넣는다.






“아, 저기 있네요.”






키를 발견한 건 은서였다. 이한이 들어오며 소파 팔걸이에 키를 올려둔 것이다.






“내 정신 좀 봐, 키를 여기에 두고.”






뒷주머니를 뒤지던 이한이 소파 팔걸이에 둔 키를 잡으려 손을 주머니에서 빼는 순간, 탁. 그의 뒷주머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뭐가 떨어졌어요.”






그걸 또 은서가 친절하게 허리를 숙여 집어 든다. 이한의 뒷주머니에서 떨어진 것을 손으로 집어든 순간 은서의 눈이 커졌다. 


작고, 네모난 비닐 포장이 된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






천천히 숙였던 허리를 일으킨 은서가 손에 들린 그걸 이한에게 내민다.


그녀가 내미는 건 쳐다보는 이한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배달 나오기 전 가게에서 주인 형이 필요할 거라면 뒷주머니에 넣어둔 그것이었다.






콘돔.






*






“아, 저 이건, 가게 형이 멋대로, 이건 제게 아니고, 저어 그게.”






당황한 채로 은서의 손에서 콘돔을 빼앗은 이한이 차 키를 집어 들고 현관 쪽으로 후다닥 걸어간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날 뭘로 생각할까. 저질이라고 생각할 거야. 믿어줬는데 엉큼한 생각이나 하고 있는 저질이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얼굴이 새빨개진 채로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지만 당황한 나머지 발이 잘 들어가지 않는다.






“가, 갈게요.”






이한이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저기!”






이한이 현관을 나가 문을 닫으려 할 때 은서가 그를 부른다.






“우산 가져가야죠!”






그대로 달아나려던 이한이 우산이라는 말에 휙 돌아섰다. 그랬다. 밖에는 비가 내린다. 비, 우산.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비만 내리지 않았으면 이런 창피한 일을 당할 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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