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란한 몸 - 7.저주의 끝

음란한 몸 - 7.저주의 끝

M 망가조아 0 1663

음란한 몸 - 7.저주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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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의 끝








해원이 별궁으로 돌아왔다. 결국 달거리가 시작될 때까지 해원은 다시 그 사내를 만날 수 없었다.


그 사이에 대나무 숲에 몇 번이나 왔었지만 그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마마. 닷새만 견디십시오.”






시녀들이 죄송한 표정으로 방문을 닫았고 닫힌 문 너머에서 대못을 못질하는 소리가 쾅쾅 울렸다.








부왕이 말한 남녕의 예비 부마는 아직 오지 않았다.


들리는 말로는 장마 때문에 물러진 지반으로 도중에 산사태를 만나 걸음이 지체된다고 했다.


그래서 이번 달거리가 마치기 전까지는 도착하지 못할 거라며 유모가 해원에게 살짝 귀뜸해줬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못질을 끝내고 시녀들이 물러나는 발소리가 멀어지자 해원이 익숙한 방 안을 둘러봤다.


다른 때와 똑같다.


갈아입을 의복과 차와 찻잔, 그리고 물그릇, 몸의 괴로움을 달래줄 나무로 만든 남근까지 그대로다.






“이제는 널 사용하지 않을 생각이야.”






해원이 나무 남근을 집어 들고는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겉으로는 변한 것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이제 증상이 조금씩 나타나고 있지만 오늘 저녁 해가 지기 전에 아마 몸이 달아오르고 삭이지 못하는 열이 전신에 달아오를 것이 분명하다.


자신의 몸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요부처럼 사내를 갈구하게 되고 급기야는 이성을 잃고 제발 저를 어떻게 해달라고 문을 긁으며 애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번 버텨볼 생각이다.


버티다가 죽는다면, 그것이 저주의 끝이라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한 번 버텨볼 생각이다.


이번을 버텨내면 다음 번에도 분명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저주를 끝낼 방법이 없다면 버틸 방법을 찾으면 된다.


무랑군의 말대로 이것을 저주가 아닌 병이라고 생각하고, 저주는 극복할 수 없지만 병이라면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는 각오를 한번 해볼 작정이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물론 자신은 버텨내더라도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단내를 맡고 음욕을 참지 못하는 사내들까지 자신이 어찌해줄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할 수도 없고,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는 거다. 하나씩 차근차근.






“하아...”






해원이 긴 숨을 내쉬었다. 벌써 몸이 달아오르고 있다.


방 안에 가득 찬 이 단내에 숨이 막혀온다.






이번 달거리는 유독 단내가 심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속곳이 흥건하게 젖어 질퍽거렸다.






지난 번 달거리는 무랑군 그 사내 덕분에 수월하게 넘겼다.


몸은 간사해서 한 번 수월하게 넘긴 것만 기억하고 그 이전에 힘들었던 것은 이미 다 잊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처음처럼 괴롭고 힘들다.






다른 때였다면 벌써 저 나무 남근으로 제 몸을 어떻게든 달래갔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번의 경험으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제 손이나 다른 도구로 몸을 달래봤자 그건 달래는 것이 아니다.


그건 몸의 열기를 더 부추길 뿐이다. 마치 불 붙은 화로에 더 타오르라고 숯을 더 넣어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불을 끄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하다.






불을 불로 끌 수는 없다.


제 몸의 미친 열기와 이 괴로운 발정을 가라앉히려면 몸을 찌르는 도구가 아니라 제 몸 안에 절정의 단비를 뿌려줄 사내가 필요할 뿐이다.


지금까지 발정기의 시간들이 괴로웠던 이유는 불 붙은 몸에 계속 불을 질러왔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더 활활 타오르라고 제 몸에 불을 질러왔던 탓에 숨 막히도록 괴로웠던 것이다.


하지만 무랑군을 만나 비로소 몸 안의 불을 끄자, 발정기는 숨 막히는 괴로움이 아니라 황홀한 시간이 되었다.






“하으응...으응...”






해원이 보료 위에서 뒹굴었다. 달아오른 몸을 어찌할바 몰라 제 손으로 제 양 팔을 꽉 움키고 가쁜 숨만 헐떡였다.


질퍽거리는 속곳을 벗어 집어 던지고 상의를 벗어 그것을 뭉쳐 꽉 물었다.


가라앉히지 못한 열기가 전신을 점령하고 갈 곳을 찾지 못한 지독한 음욕이 금방이라도 숨을 끊어놓을 것처럼 온 몸을 죄어왔다.


이럴 때 그 사내가 있다면 저를 달래줬을 것이다.


차가운 손으로 저를 만질 때마다 열이 식을 것이고, 뜨겁게 꿈틀거리는 것으로 제 안을 찌를 때마다 제 안에 꽉 찬 이 음욕이 물줄기와 함께 빠져나가 숨 쉴 수 있는 틈을 만들어주겠지.


하지만 무랑군은 없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에게 가기 위해서는 지금의 고통을 견뎌야 한다.






닷새다. 겨우 닷새다.


이번을 참아내면 다음 번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참지 못했던 이유는 끝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을 견딘다 해도 언제까지 견뎌야 할지, 견디는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견딜 수 없었을 뿐이다.


그러나 지금은 안다.


견뎌야 할 이유도 알고, 자신이 이번을 견뎌내면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이제는 안다.


자신이 이 고통을 견디고 가려는 길에 누가 기다리고 있을지 안다.






그 대나무 숲에서 그 사내와 자신이 만난 것은 어쩌면 서로의 외로움이 서로를 끌어들였던 것일 수도 있다.


그 사내의 외로움이 자신의 외로움에 공명해서 자신들은 만났던 것일 수도 있다.






“하윽...! 흑!”






천을 꽉 물고 해원이 몸을 웅크렸다.


눈을 질끈 감자 대나무 숲에서 불었던 바람이 머릿속에서 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쏴아아- 쏴아아- 그 대나무 숲의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








“마마. 몸은 좀 어떠하세요?”






유모가 해원이 죽을 먹는 것을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다른 때보다 해원의 안색이 더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원은 이 별궁에 온 후부터 사흘 동안 열 번이 넘게 혼절을 했었다. 그 때문에 눈 아래가 홀쭉해졌다.






“괜찮아.”






해원이 아주 작게 웃었다.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다. 이제 제 달거리가 거의 끝나가고 있다는 건 해원도 느끼고 있다.


어젯밤에는 세 번이나 연달아 혼절할 정도로 괴로움이 극심했었다.


혼절한 후에 깨어나보니 새벽이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몸이 편안하다.






물론 이러다가도 다시 음란한 열기가 제 몸안에서 타오를 것을 해원은 안다.


하지만 다시 그 괴로움이 시작된다 하더라도 어제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내일 즈음에는 그마저도 사라질 것이라는 걸 이상하게도 느낄 수가 있다.






유모는 그동안 방문 밖에서 계속 안달을 했었다.


지금까지 해원이 정신을 잃는 일은 없었는데 이번은 몇 번이나 혼절하고 깨어나는 것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유모. 나 부탁이 하나 있어.”


“말씀하세요, 마마.”




“오늘 밤에는 문에 못을 박지 말아줄 수 있어?”


“마마, 그건 왜...”




“내일이면 다시 공주궁으로 돌아가잖아. 그리고 유모도 봤다시피 난 잘 견디고 있으니까, 문에 못을 박지 않아도 괜찮을 거야. 


오늘 밤에는 바람이 시원할 것 같으니까 밤에 너무 힘들면 대나무 숲에서 산책이라도 하려고.”






해원이 죽을 먹던 수저를 내리고 유모의 손을 잡았다.






“딱 한 번만이야.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할게. 어차피 여기는 아무도 못 오잖아. 그리고 내가 도망칠 것도 아니고 그냥 산책만 할 거니까.”






유모가 잠시 해원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밤 딱 한 번 뿐이에요, 마마.”


“고마워. 계속 저 대나무 숲에 가보고 싶었거든.”




“대나무 숲이 아름답긴 하지요.”


“유모는 가봤어?”




“아니요. 대나무 숲에 귀신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어서요. 물론 전 그런 소문은 안 믿지만 말이에요.”


“귀신?”




“진짜 귀신은 아닐 거예요. 바람이 불면 대나무들이 부딪치며 소리를 내니까 그게 귀신 울음소리로 들리는 거겠지요. 


예전에 여기서 무서운 일도 있었으니까...”




“그렇겠지.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서로 부딪쳐 소리를 내지...”






그 듣기 좋은 아름다운 소리가 왜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귀신의 울음소리로 들리는 걸까.


눈을 감고 들으면 청량하고 시원한 소리인데, 그것이 왜 슬프고 무서운 귀신의 울음소리로 들리는 걸까.






“그런데 유모. 나는 대나무가 부딪치며 내는 소리가 좋아. 쏴아 거리는 소리가 꼭 바다가 내는 소리 같잖아.”


“바다를 보신 적도 없으시면서...”




“유모가 말해줬잖아. 바다는 쏴아아 하고 소리를 낸다고.”


“그렇지요. 그런 소리를 내지요.”




“바닷가에 대나무가 자라면 좋겠다. 그렇지?”


“제가 어릴 때 살던 곳이 대나무 숲을 끼고 있는 바닷가였지요. 낮에는 파도 소리를 듣고 밤에는 대나무의 소리를 들었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소리였는지 몰라요.”




“나도 그런 곳에서 살고 싶어.”


“나중에 폐하께 말씀드려서 그런 곳에 작은 별궁을 지어달라고 하세요, 마마. 이 땅은 전부 마마의 나라니까요.”




“유모는 내가 언젠가는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럼요, 마마.”




“만약 내가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게 되고, 반려를 만나게 되면 유모는 어떻게 할 거야?”


“저는 그래도 마마를 모셔야지요. 마마가 태어나실 때 제 손으로 마마를 받았으니 마마께서 아기씨를 낳으실 때 그 아기씨도 제 손으로 받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유모.”




해원이 죽 그릇을 옆으로 치우고 유모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내가 딸을 낳으면 내 저주가 딸에게 가지 않을까? 나는 그게 무서워. 내가 정말 아이를 낳아도 되는 건지...”


“그런 말씀 마세요. 절대로 그럴 리가 없어요.”




“나한테는 일어난 일이잖아.”


“마마. 서리를 잔뜩 맞은 국화가 더 고운 꽃을 피우는 법이랍니다. 마마는 틀림없이 좋은 분과 행복해지실 거예요.”




“그랬으면 좋겠어.”


“그럴 거예요, 마마.”




“나중에 내가 대나무 숲이 있는 바다 근처에 집을 짓고 살게 되면 그때는 유모도 같이 살자. 나와 내 남편과 내 아이와 함께.”






해원이 유모의 목을 끌어안았다.






얼굴도 모르는 어머니보다 유모가 해원에게는 어머니나 마찬가지다.


황궁이나 부왕, 공주의 신분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유모와 헤어지는 건 슬픈 일이다.


더군다나 자신이 사라지면 유모는 분명 큰 고초를 겪을 것이다.


유모를 생각하면 도망쳐서는 안 되지만 이제는 도망치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에서 도망쳐서 그 사내에게로 달려가고 싶다.






“고마웠어, 유모.”






유모를 있는 힘껏 끌어안고 해원이 진심으로 감사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영 말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으니까.








*








“자, 다 됐다.”






뜰에서 말리고 있던 약초들을 전부 헛간 안으로 들여놓은 사내가 사립문을 닫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맑았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시원하고 바다 쪽에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마주한 대나무 숲이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의원님. 어디 가시게요?”






마침 해변에 배를 대고 오늘 아침 내내 잡은 물고기를 망태에 담아 집으로 돌아가던 어부 한 명이 사내를 발견하는 아는 척을 했다.


이 어부는 올 봄에 바다에서 크게 다쳤을 때 이 사내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 덕분에 지금도 물고기를 잡아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어부는 사내의 집앞을 오갈 때마다 그가 잡은 물고기를 조금 나눠주곤 했다.






“좀 멀리 다녀올 것 같구나. 다리는 어떠하냐?”


“멀쩡합니다. 그런데 멀리라면 언제 돌아오실 건지...”




“나야 모르지. 일년이 걸릴지 이년이 걸릴지.”


“안 되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느냐?”


“소인 마누라가 두 달 후에 해산인데 그때 의원님이 안 계시면 누구한테 부탁을 드립니까?”




“의원이 나 밖에 없다더냐?”


“그래도 의원님이 제일 믿을만하지요.”




“찾는 사람을 만나면 일찍 돌아오겠지.”


“누굴 찾으러 가십니까?”




“이제 슬슬...가족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내가 조용히 웃었다.






“데리러 가야지. 여기까지 오는 길을 모를 테니까. 혼자서 그 멀고 험한 길을 어찌 오라고 하겠느냐. 내가 데리러 가야지.”


“조심해서 얼른 다녀오십시오.”




“다녀오마. 오래 걸리겠느냐.”






젊은 어부에게 그렇게 인사하고 사내가 봇짐을 등에 매고 걸음을 옮겼다.












사내가 갈 곳은 정해졌다.


오래 전에 떠나올 때 다시 돌아갈 거라고 생각도 못했던 곳으로 지금 사내는 돌아갈 작정이다.


예전에는 북연이라는 나라의 도읍이었지만 이제는 남월의 도읍이 된 곳으로 돌아가서, 그곳에서 해원을 만나 이곳으로 데려올 작정이다.


물론 그녀는 여기에 오겠다는 확답은 말해주지 않았다.


이곳이 어딘지 설명하고 오겠냐고 다시 묻기도 전에 그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해원.






처음에 그녀를 봤을 때는 여우이거나 아니면 꿈일 거라는 생각을 했었다.


매일 대나무 숲을 산책했지만 그녀를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나무 숲에서 기묘한 단내를 풍기며 혼자 고통스러워하던 그녀를 발견했을 때 사람이 아니라 여우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의 몸에서 그런 단내가 풍기는 것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단내가 아니라 사내의 음욕을 부추기는 그런 단내였었다.


맹세코 그런 것은 처음이었다.






이곳에 정착하기까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의원 노릇을 했었다.


온갖 증상을 가진 환자들을 돌보고 치료했었지만 몸에서 사내의 음욕을 충동질시키는 단내를 풍기는 증상은 처음 봤었다.


가끔 산에서 여우를 만나 홀렸다는 사람들의 이야기에나 나올 법한 그런 것이었다.






솔직한 심정으로 그때 해원의 몸에서 풍기는 단내에 사내 역시 태어나서 처음으로 성욕이라는 것을 느꼈었다.


그 전까지 사내는 여인을 보며 음욕을 품은 적이 없었다.


여인들을 치료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그녀들의 은밀한 곳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었고 음부에 병이 난 기생들의 경우도 많이 고쳤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도 상대를 여인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저 환자였을 뿐이다.






그게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일까.


가끔은 저를 유혹하려는 여인들이 있었어도 그녀들에게서 성적인 충동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제 안에서 주체할 수 없이 밀고 올라오는 음욕에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말을 걸었어도 그때 자신의 안에서는 뜨거운 음욕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런 여인이었다, 해원은.


사내들이라면 누구라도 이성을 잃게 만드는 유혹의 단내를 풍기는 여인.






불가항력이라는 말이 어떤 건지 그때 처음 알게 되었었다.


남녀간의 교접에 대해서는 의원인지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해본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교접은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라는 걸 가르쳐주마.]






호기롭게 그런 말을 해원에게 하긴 했지만, 정작 교접이 즐거운 것이라는 걸 사내도 그때 처음 알았었다.


사내는 어려서부터 혼자가 되어 거지꼴을 하고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하늘이 도와서 어진 성품을 가진 의원을 만났었다.


그를 따라다니며 심부름을 하면서 그에게서 의술을 배운 지 10년이 지나지 않아 더는 가르칠 것이 없을뿐더러 세상 제일의 명의라고 자부해도 좋을 거라는 말을 들었었다.


그게 열 여섯 살의 일이다.






스승의 곁에서 4년 가량을 더 머물며 그곳에 찾아오는 환자들을 돌봤지만 찾아오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명문귀족들과 고관대작들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반항심이라는 것이 있었다.


자신이 돌아갈 곳을 빼앗고 어머니를 빼앗은 남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을 그때만 하더라도 버리지 못했었다.


그래서 결국 그곳을 떠났다.






떠돌아다니는 의원이 되기로 생각하고 이곳저곳에서 의원을 찾아가지 못할 정도로 궁핍한 사람들을 고치는 생활을 또 몇 년을 했었다.


그러던 중에 이곳에 오게 되었고 이곳에 아예 정착을 했다.


정착하면 외로움이 좀 사라질까 했지만 결국 깨달은 것은 자신은 누군가를 마음에 둘 정도로 아직 마음의 상처를 다 회복하지 못했다는 진실이었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어머니의 죽음은 골이 깊게 패인 상처였고 도무지 새살이 돋지 않는 아픔이었다.






그 즈음에 환자 한 명이 들 것에 실려 왔었다. 아이를 가진 산모와 그녀의 남편이었다.


산모는 이미 출혈이 심했었고 난산 끝에 어찌할 도리가 없어 찾아온 것이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었다. 그러나 끝내 산모도, 아이도 구하지 못했다.


아이는 사산되었고 산모도 눈을 뜨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맡았던 환자가 죽는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피투성이 손을 덜덜 떨며 자괴감에 빠졌었다.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자신이 고치지 못할 병은 없고 자신이 살리지 못할 환자는 없다고 자신만만했었지만 그때 처음으로 제 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절망했었고 죽은 여인의 남편을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몰라서 그 앞에 그저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죽은 여인에게도 죄를 지었고 남겨진 남편에게도 죄를 지었다.


자신을 믿고 살려줄 거라 생각해서 찾아온 이들에게 자신은 죄를 지은 것이다.






[그게 어찌 의원님 잘못이겠습니까.]






그러나 남편은 뜻밖의 말을 했다.


아내와 아이의 죽음 앞에서 무척이나 서럽게 울었던 남편은 화가 난 표정을 짓지 않았었다.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요. 누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애당초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을 도와달라고 왔을 뿐인데, 그것을 도와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게 어떻게 의원님 잘못이겠습니까. 사람이 살다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어찌할 수 없는 일도 있는 것을요.]






오히려 그 죽은 여인의 남편에게서 위로를 받았다.


그 이후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는 것이라고.






어머니의 죽음을 오랫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던 것은 자신이 어머니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여섯 살 어린 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느냐만은, 그래도 자신은 살았고 어머니는 죽었다.


그게 너무 아프고 또 큰 죄책감으로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 상처는 20년이 훨씬 더 지나서야 겨우 치료받을 수 있었다.






사람이 살다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다는,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면 그건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는 그 말에 비로소 마음의 상처에 새 살을 덮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된지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리고 해원을 만났다.






꿈인 듯 홀린 듯 대나무 숲에서 만났기에 어쩌면 세상에 한을 남기고 미처 떠나지 못한 넋의 잔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다시 만나며 그녀가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는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걸 조금씩 느꼈다.


그리고 마지막 만남에서 그녀가 남월 황제의 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운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녀는 그녀일 뿐이다.


누군가의 딸이 아니라, 누군가의 죄를 이어받은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냥 그녀일 뿐이다.


자신이 그저 자신인 것처럼 그녀도 그저 그녀다.


부모 대의 일이 자신들에게 비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지금 그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녀는 이곳이 어딘지 모를 테니까 그녀가 있는 곳을 아는 자신이 그녀를 마중 나가야 한다.


가서 데려 오자.


이곳에서 그녀의 그 병을 함께 고쳐가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많이 변했겠지.”






가는 김에 예전에 살았던 집 근처에도 가보고,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해원에게 필요한 것들을 함께 구해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






‘안 그래도 약재도 필요했으니까.’






이런 한적에 곳에 살면 진귀한 약재를 구하지 못하는 것이 힘들다.


남월의 도읍 정도면 온갖 진귀한 약재들이 전부 다 있을 것이다.


아마 돌아올 즈음이면 짐이 꽤 많을지도 모른다.


말과 수레를 사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사내가 천천히 걸음을 움직였다.








*








장마 내내 비가 오는 거 아니었다.


오늘이 그랬다. 아침부터 비가 그치더니 밤중이 되어도 빗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해원이 옷을 갈아입었다.


낮에 죽을 한 그릇 먹고 오후 무렵이 되자 다시 몸에 열이 오르며 견디기 힘든 발정이 찾아왔지만 이를 악물고 견뎠다.


혼절까지는 가지 않았다.


대신 전신이 식은땀으로 젖어버렸고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물론 땀이 아니더라도 옷은 갈아입어야 했지만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장 견디기 힘든 순간을 넘기자 속곳에 피가 배어나왔다는 것이다.


달거리를 하듯이 피가 비치면 그건 이번 달의 발정이 끝났다는 뜻이다.


발정을 하지 않아도 몸에서 미미한 단내는 나지만 그 정도는 사람들의 관심만 끌 뿐 사람들의 이성까지 잃게 만들지는 않는다.


그게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적어도 한 달 가량의 시간이 자신에게는 주어진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별궁에 올 때 미리 준비를 했다. 먼 길을 갈 준비를 나름대로 단단히 끝냈다.


시녀들의 옷을 몰래 챙겼고 시녀들이 신는 신발도 하나 숨겨 가져왔다.


별궁으로 올 때 이 갇힌 공간에서 지낼 동안 필요한 것들이라며 이런 저런 것들을 가져왔었다.


시녀들에게는 책과 인형, 그리고 수를 놓을 물건들이라고 둘러댔지만 가져온 작은 궤짝 안에는 먼 여정에 필요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어설프게 준비할 수는 없다.






준비도 없이 도망쳤다가 잡혀 다시 돌아오게 되면 두 번째 기회는 없다는 걸 해원은 누구보다 잘 안다.


그 사내가 사는 곳이 어딘지 모르니 어쩌면 일년, 십년을 헤매야 할 수도 있다.


평생을 걸려도 그 사내를 찾아내지 못할 수도 있다. 그걸 다 알고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대나무 숲에서 서로에게 이끌려 만난 인연이라면 분명 운명이 이끄는 대로 그 사내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해원은 믿는다.






‘이제 가자.’






조심스럽게 문을 열자 문은 조용히 열렸다. 유모가 약속대로 대못을 빼준 것이다.


밖으로 나온 해원이 걸음을 옮긴 방향은 대나무 숲이 아니었다. 가야할 곳은 대나무 숲이 아니다.


대나무 숲은 무랑군 그 사내를 만날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이 아니다.


잠깐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그 사내를 만나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해원이 별궁의 문을 향해 걸었다.


별궁의 문은 밖에서 걸려 있지 않고 안에서 걸려있다.


별궁의 처소 문 밖에 대못을 박는 것은 자신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고, 별궁의 문을 안에서 잠그는 이유는 밖에서 다른 이들, 특히 사내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렇게 6년이나 안팎으로 잠긴 곳에서 한 달에 닷새는 갇혀서 살아왔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어두워...’






별궁에서 황궁의 뒷문으로 향하는 길을 쳐다보며 해원이 잠시 망설였다.


길이 너무 어둡다.


이곳 별궁 자체가 사람들의 인적이 드문 곳이라 황궁 곳곳을 밝히는 횃불이나 등불이 이곳에는 없다.


황궁의 후문 쪽도 평소에는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이다.






그곳은 다른 말로 사문이라고도 불리는데 죽은 자들의 시신을 내가는 문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렸다.


황궁에서 죽은 이들의 시신을 내어가는 일이 아니면 사문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래서 오늘 해원은 그곳으로 도망칠 생각이다.


문은 안에서 잠겨 있을 것이니 여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지방을 넘어서던 해원의 발이 멈췄다. 제 앞에 누군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알아본 해원이 무척이나 당황했다.






“아, 아바마마...이곳엔 어찌하여...”






지금까지 6년 동안 부왕이 이 별궁에 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부왕이 바로 앞에 서 있다.


시녀와 환관들도 대동하지 않고 부왕 혼자 서 있었다.


해원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를 바라보는 부왕의 눈동자가 심상찮았기 때문이다.


이 별궁에 들어오기 전 마지막으로 부왕을 알현했을 때도 꼭 이런 눈빛이었다.






‘발정기도 끝이 났는데...’






발정기에 다른 사내들이 제 몸의 단내를 맡았을 때 짓는 그런 표정과 비슷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의 발정기는 끝났다.


지금 제 몸에서 나는 단내는 미미하다. 그 정도로는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다.






“아바마마. 이런 야심한 시각에 어인 일로...”






“그러는 너는 이런 늦은 밤에 어딜 가려는 것이냐? 게다가 옷은 그게 무슨 꼴이냐?”






황제가 해원을 향해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해원은 본능적으로 그 손을 피했다.






“설마 도망이라도 치려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라...”






“그 몸을 가지고 어디로 도망칠 수 있다고 감히 도망을 치려고 한 것이냐.”






그때 문득 해원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마지막으로 부왕을 만났을 때 부왕이 제게 했던 말이었다.






[점점 네 어미를 닮아가는구나.]






만약 다른 상황이었다면 죽은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해원은 유모에게서 부왕이 감춘 비밀을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와 아버지가 숨긴 비밀에 대해서 전부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시작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친 누이였던 어머니를 겁탈했다는 것도 안다.


친 누이를 겁탈한 전적이 있는 사내가, 친 딸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다.






‘눈빛이 이상해.’






그때도 소름끼치는 느낌을 받았었지만 지금도 역시 그렇다.


그 눈빛이 저를 훑어보자 등을 타고 벌레가 기어오르는 것처럼 기분이 나쁘다.






“아니면 혼자 견디는 것이 힘들어서 사내를 찾으러 가는 것이냐?”


“아바마마...”




“내가 생각해봤단다, 얘야. 남녕에서 오기로 한 부마 후보가 장마에 발이 묶여 늦어진다는 보고를 받고 내가 생각을 해보니, 굳이 부마를 들일 이유가 있을까 싶더구나.”




“네?”




“부마를 굳이 들이려는 이유가 내가 너 말고 다른 자식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 


내가 아들이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굳이 부마를 들일 이유는 없지. 


안 그러냐? 네가 그런 몸을 가지고 있는데 어느 사내가 너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겠느냐.


항시 발정하고 다른 사내들의 음욕을 부추기는 계집을 어느 사내가 아내로 반기겠느냔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지금은 부왕의 모든 것이 이상하다. 표정, 목소리, 그리고 그 목소리에 담긴 말의 내용까지 전부 이상하다.






“그래서 생각했지. 나는 더 이상 자식을 낳지 못했지만 만약 상대가 너라면 어떨까 하고. 


네 어미가 내게 널 낳아준 것처럼 너도 어쩌면 내게 아이를 낳아주지 않을까? 


내 자식을 낳은 유일한 계집이 네 어미였지. 특별했거든. 그러니까 너도 네 어미처럼 내 아이를 낳아줄 지도 모르지. 특별하니까 말이다.”




“아, 아바마마. 하늘이 무섭지도 않으세요...?”






무섭고 끔찍한 말을 어찌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뱉어낸단 말인가.


하늘이 전부 듣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감히 저런 말을 부끄러움도 모르고 뱉어내지는 못할 것이다.






“하늘? 내가 왜 하늘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이냐?”






황제의 손이 다시 해원을 향해 뻗어왔다.






“꺄악!”






도망치려고 했지만 그보다 더 빨리 그 손이 해원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신이 있었다면 지금까지 어째서 벌이 내리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나는 이 땅에서 북연의 것들이 절하던 신들의 신당을 전부 불태웠다. 


신이 있고 하늘이 있다면 벌써 나를 죽였겠지. 하지만 봐라. 난 멀쩡하게 살아있지 않느냐. 


그건 하늘도 신도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뭘 무서워해야 한다는 것이냐?”




“아, 아바마마. 놓아주세요...제발 놓아주세요...”






해원이 잡힌 손을 빼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소용이 없다.






“아바마마! 아바마마-!”






황제는 해원의 손목을 잡고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손을 뿌리칠 수 없는 해원이 그 손에 이끌려 거의 질질 끌려갔다.










“꺄아악!”






황제가 해원을 내동댕이쳤다.


방 안으로 끌려 들어온 해원이 보료 위로 쓰러졌다.






“이것으로 그동안 네 몸을 달래왔었지?”






황제가 보료 발치 쪽에 놓아둔 작은 궤 안에서 사내의 남근을 본떠서 만든 나무 남근을 꺼내 들었다.






“이런 것으로 몸이 달래지더냐?”






나무 남근을 손에 쥐고 황제가 제게 다가와 앉자 해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지금 제 부왕이 제게 무슨 짓을 하려는지 해원도 알고 있다.


부왕은 하늘도 무서워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손가락질이나 비난 따위는 애당초 두려워하지 않던 부왕이다.


하늘 아래 부왕이 두려워하는 것은 없고 부왕을 막을 것도 없다는 걸 해원은 잘 안다.


그가 그의 친 누이를 겁탈해서 자신을 낳은 것처럼 자신을 겁탈해서 또 다시 아이를 얻는다 하더라도 누가 그걸 비난하겠는가.


무소불위의 권력이 그에게 있는데 누가 감히 황제를 비난할 것인가.






“내가 어리석었지. 가장 쉽고 편한 방법을 옆에 두고 멀리서 방법을 찾았으니 말이다. 


너를 여기에 가둬둘 것이 아니라 진즉에 내가 네 발정을 다스려줘야 했었던 거다. 


나는 네가 마냥 어린 줄 알았더니 어느새 무르익어서 네 어미와 똑같은 얼굴이 된 것을 보고 나서야 내가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단다.”






부왕의 눈동자에 어리는 빛이 탐욕스런 짐승의 그것처럼 해원에게는 느껴졌다.


지금 제 앞에 있는 건 자신을 낳아준 아비가 아니다.


패륜적인 짓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왔고 또 저지르려고 하는 짐승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비명을 질러 유모와 시녀들이 달려온다 한들 누가 감히 황제를 막겠는가.






“저주같은 소리. 나는 처음부터 특별했던 거다. 특별한 몸이라서 내 씨를 받을 수 있는 것이 나와 피를 나눠가진 누이 밖에 없었던 거고, 이제 이 세상에 내 피를 나눠가진 것은 너 밖에 없으니 너만 내 씨를 받아서 내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거다. 다른 년들은 수십 수백명이 있어도 소용이 없어. 그걸 이제야 알았지.”






탐욕스런 눈으로 제게 다가오는 부왕을 보며 해원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부왕은 미쳤다]는 것이다.


언제부터 미친 것일까.


자신의 단내가 부왕을 미치게 한 걸까.






아니다. 부왕은 처음부터 미쳐 있었던 거다. 미쳐 있었기 때문에 친 누이에게 그런 짓을 했었던 것이다.


[저주]는 어쩌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미친 부왕에게서 자신을 지켜왔던 것일 수도 있다.


이 저주 때문에 부왕이 자신을 이 별궁에 가두고 공주궁에 가두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이미 지금보다 훨씬 전에 부왕의 손에 겁탈 당했을지도 모른다.


모순되게도 저주 때문에 부왕의 눈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너는 이제부터 공주가 아니라 황후마마라고 불리게 될 거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다. 하지만 귀를 틀어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손을 뻗은 해원이 머리 맡의 촛대를 잡았다.


지금 해원이 제 몸을 지킬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촛대였다.






“왜 그러느냐 얘야. 그것으로 이 아비를 치기라도 하려고 그러는 것이냐?”






덜덜 떨리는 손이 혹시 촛대를 놓칠까봐 해원이 있는 힘을 다해 촛대를 쥐고 뒤로 엉금엉금 물러났다.


촛대에 꽂힌 초에서 떨어진 촛농이 손을 뜨겁게 적셔도 해원은 촛대를 놓지 않았다.


어른거리는 불꽃 너머에서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황제의 모습이 흔들렸다.






“가, 가까이 오면 찌를 거예요...”


“그걸로 찌른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란다.”






탐욕스럽게 웃으며 황제가 해원을 향해 사납게 몸을 던졌다.






“아아악!”






저를 향해 달려드는 황제를 향해 해원이 촛대를 휘둘렀지만 그보다 황제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해원의 손에서 떨어진 촛대가 방바닥에 나뒹굴었다.






“괜찮아, 괜찮아. 네 어미도 처음에는 저항했었지. 하지만 몇 번 겪고 나니 얌전해지더구나.”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저를 낳고 죽었다는 모친은 얼마나 끔찍했을까.


그녀가 저항을 멈춘 까닭은 아무리 저항해도 바뀌지 않을 운명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에 순응해서 살려고 했지만 그녀의 몸 안에서 자라는 죄의 씨앗이 얼마나 끔찍하고 무서웠을까.


그래서 저를 낳고 죽은 건지도 모른다.


산후열이 올라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죽음을 택했는지 그걸 이제 와서 알 길은 없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어머니는 스스로 죽음을 택했을 수도 있다.


그녀가 낳은 죄의 결과를 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아악!”






해원이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제 옷을 벗기려는 황제의 가슴과 얼굴을 손으로 때렸지만 소용이 없다.






와장창-!






발버둥치며 이리저리 몸을 비틀던 해원의 손 끝에 걸린 물그릇이 깨지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이건...’






해원이 제 손 끝에 걸리는 것이 뭔지 알아차렸다.


그 날카로운 것은 지금 막 깨진 그릇의 파편이다. 해원이 그릇 파편을 꽉 쥐었다.






‘아파...!’






손이 베이며 피가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파편에 베인 손바닥이 뜨겁지만 지금은 이런 아픔을 느낄 때가 아니다.






“으아아악!”






해원이 파편을 쥔 손을 휘두르자 황제가 비명을 지르며 두 손으로 목을 감쌌다.


목을 감싼 황제의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줄줄 새어나왔다.


그릇의 파편으로 황제의 목을 그은 것이다.






“끄, 끄윽...이, 이 모, 못된 것이...”






목에서 줄줄 새는 피를 손으로 막으며 황제가 해원을 노려봤다.


파편을 꽉 쥔 해원이 엉거주춤 일어났다.


조금 전에 바닥에 나뒹군 촛대의 초에서 옮겨 붙은 불이 보료와 이불을 태우며 타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 년...!”






비틀거리며 일어난 황제가 해원을 향해 덤벼들었다.


피투성이의 황제를 향해 해원이 다시 한 번 파편을 휘둘렀다.






“으아아악!”






파편의 단면이 황제의 얼굴을 찌르자 황제의 눈에서 피가 솟구쳤다.


한 손으로는 목을, 한 손으로는 눈을 움키고 뒷걸음질 치던 황제가 그 자리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주저앉은 그의 옷자락 끝에 불이 붙는 것을 본 해원이 들고 있던 파편을 집어 던졌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였다.


황제의 옷에 붙은 불을 끄는 것과 이대로 도망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살리느냐 외면하느냐.






“해, 해원아! 이 아비를 좀, 아비를 좀 도와다오...!”






옷에 불이 붙자 황제가 허둥거리며 해원을 불렀다.






눈에서 쏟아지는 피 때문에 앞이 흐릿하고 목에서 쏟아진 꽤 많은 피 때문에 지금 황제는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 바짓단과 옷자락에 붙은 불길이 점점 위로 번져오자 황제가 비명을 지르며 해원을 불렀다.


순간 해원의 머릿속에 스스로 불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는 신녀가 떠올랐다.


무랑군, 그 사내의 모친이기도 한 신녀는 오래 전에 이 자리에 세워져 있던 신당이 불탈 때 불길 속으로 뛰어들어 죽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이곳은 다시 불타고 있다.






“저는 아버지가 없어요.”






차갑게 말한 해원이 손에 쥔 파편을 던지고 돌아섰다.


그리고 방에서 나오자마자 방문을 닫고 문 옆에 놓아둔 대못과 망치를 손에 들었다.


유모가 잠시 빼놓은 대못이 망치와 함께 문 옆에 가지런히 놓여 있었던 것이다.






쾅-! 쾅-!






지금까지 저를 가두는 것에 사용되던 대못을 제 손으로 박으며 해원이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악!”






방안에서 부왕의 비명이 새어나왔지만 해원은 망치질을 멈추지 않았다.






“이 년! 이 년!”






어떻게 문까지 기어왔는지 황제가 안에서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하지만 해원은 이 문이 얼마나 견고한지 잘 안다.


자신이 6년 동안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긁고 두드려도 한 번도 부서진 적이 없던 문이다.


피를 흘려 기운이 빠진 부왕은 무슨 짓을 해도 이 문을 열 수 없을 것이다.






쾅-! 쾅-! 쾅-!






처음에는 거세게 내리치던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 의미를 해원은 안다.


부왕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문틈 사이에서 뜨거운 열기가 새어나오고 있다.


방문 너머가 시뻘겋게 물든 것을 보며 해원이 뒤로 물러났다.


뜰에는 아직 그녀가 떨어뜨린 보따리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마마!”






저를 부르는 소리에 해원이 뒤를 돌아봤다. 뒤에는 유모와 다른 시녀들이 놀란 얼굴로 서 있었다.






“마마, 이게 대체 어찌된...”






아마 방문에 대못을 박는 소리 때문에 다들 놀라 뛰어왔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도 부왕이 지른 비명 때문일 수도 있다.






“으아아아악-!”






그때 방문 안쪽에서 부왕이 내지르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누가 들어도 황제의 비명이었다.






“마마, 설마...”






유모도 다른 시녀들도 저 방 안에 갇힌 것이 황제라는 걸 알아차렸을 것이다.


해원은 지금 자신의 꼴이 어떤지 알고 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손에 묻은 피, 그리고 흐트러진 옷까지.






“마마, 피부터 닦으세요.”






허둥거리며 뛰어온 유모가 제 치마로 해원의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피를 닦는 유모의 손도, 그리고 해원의 손도 덜덜 떨렸다.






“마마...마마...”






유모의 눈에서 눈물이 굴러 떨어지자 해원이 숨을 내쉬었다.






“난 떠날 거야...”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전부다.






“난 이제 여길 떠날 거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


“네, 마마...네, 마마...”






유모가 해원의 옷매무새를 고쳐줬다. 그리고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다듬어준 다음 시녀 한 명을 불렀다.






“너는 마마를 모셔다드리고 오거라.”


“유모.”




“이게 맞는 거예요, 마마.”






아마 유모도 다른 시녀들도 저 닫힌 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저 안에 누가 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다 알고 있지만 누구 하나 황제를 구하려는 사람은 없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황제가 죽기를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미안해, 유모.”






자신이 얼마나 무책임한 짓을 하려는 것인지 해원은 잘 안다.


자신은 부왕의 단 하나의 핏줄이다. 단 한명의 후계자라는 의미다.


지금 저 불타는 방 안에서 황제가 죽으면 그 뒤를 자신이 이어야 한다.


그런데 만약 자신이 사라지면 옥좌는 무주공산이 되고 나라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혼란도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나면 그 뒤는 엉망진창으로 보이겠지만 그래도 다시 자리를 잡아가는 것처럼 황제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나라가 혼란에 빠진다 하더라도 결국에는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가고 옥좌는 다시 주인을 찾을 것이다.


오히려 더 나은 주인이 옥좌에 앉을 수도 있다.


적어도 친 누이를 겁탈하고 스스로가 하늘의 신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아닌 그보다는 현명하고, 그보다는 인간적인 이가 옥좌에 앉을 수도 있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떤 이가 황제가 되더라도 지금보다는 나을 것이다.






“저는 여기에 있을 테니까, 머무실 곳을 찾으시면 제게 연락을 해주세요, 마마. 그러면 제가 달려갈 테니까요.”


“그래, 꼭 그럴게.”






유모의 손을 한 번 더 꽉 잡아준 다음 해원이 시녀를 따라 서둘러 그곳을 벗어났다.


뜰을 벗어나 별궁에서 완전히 나갔을 때 해원은 별궁의 지붕 위로 솟구치는 불길을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킬 것처럼 불길이 그렇게 치솟고 있었다.










“그런데...”






해원이 사라진 쪽을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던 유모가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착각한 거냐? 공주마마의 옥체에서 단내가 전혀 풍기지 않던데...”


“저희도 그렇게 느꼈습니다. 공주마마의 옥체에서 그 단내가 사라졌어요...”






시녀들이 전부 그렇게 대답했다.






별궁이 타는 연기의 냄새 때문에 미미한 단내를 맡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그 누구도 그 단내를, 6년이나 맡아온 그 단내를 맡지 못했다는 것이다.


마치 저주가 끝난 것처럼.


저 타오르는 불길과 황제의 죽음과 함께 그녀를 괴롭히던 저주도 마침내 끝이 난 것처럼.








*








남월의 황제 진양이 서거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땅을 정복하고 남녕에서 북연의 옛 도읍으로 수도를 천도한 것으로도 모자라 북연에서 섬기던 북악신의 신당을 전부 불태우고 신을 섬기는 것을 금지한 황제는 마치 살아있는 신처럼 군림했지만 결국은 불길을 피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의 유일한 핏줄이었던 해원 공주 역시 그 불길 속에서 타 죽었다. 부녀가 함께 타죽은 것이다.






황제와 그 유일한 후사가 함께 죽는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인해 남월 황실에는 더 이상의 황족이 남지 않게 되었고 당연하겠지만 옥좌를 차지하기 위해서 싸움이 벌어졌다.






차기 황제를 지명할 권리가 당연히 제게 있다고 주장하는 황후와 죽은 황제의 유복자를 잉태했다고 주장하는 후궁들이 서로 싸워댔고 귀족들도 편을 갈라 싸웠으며 그 싸움은 꽤 오래 지속되었다.






공석이 된 옥좌의 주인이 결정된 것은 황제가 죽은 지 여섯 달이나 지나 해가 바뀐 후였다.


새 황제가 된 것은 막 태어난 갓난 아이로 황제의 유복자였다.


물론 진짜 황제의 아들인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이를 낳은 후궁은 그 아이가 황제의 아이라고 주장했고 황후가 그것을 용인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황제가 되었고 갓난 아이가 황제가 되었으니 당연히 나라는 황후, 그러니까 태후의 수렴청정으로 이어졌다.


태후와 유복자를 낳은 후궁의 정치적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걸 누구나 짐작할 수 있었지만 후궁의 거짓도, 태후의 묵인도 증명할 증거는 어디에도 없으니 누구 하나 그것이 부당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태후의 수렴청정이 죽은 황제의 치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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