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13장(1)

짐승 계약 #13장(1)

M 망가조아 0 1663

짐승 계약 #13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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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민은 며칠 감기를 앓았지만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된 이후로도 미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게 되자 장을 보러 나갔다. 


며칠 집 안에만 있는 사이 식료품이 똑 떨어져 버렸기도 하고 바깥 공기도 쐬고 싶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간편한 복장으로 차를 끌고 나온 희민은 마트를 찾았다. 


카트를 밀며 필요한 것들을 담는데 높은 진열대에 있는 시리얼에 손이 잘 닿지 않았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둔 거야.’






인상을 찌푸린 희민이 까치발을 들면 잡힐 거 같아 팔을 뻗었다. 그때 그녀의 손 위로 다른 손이 올라오더니 가볍게 시리얼 상자를 집어 들었다.


희민은 자신에게 시리얼 상자를 내미는 수려한 남자를 쳐다봤다.






“…….”






정혁을 본 그녀의 표정에 동요는 없었다. 이미 마트에 들어선 순간 그가 쫓고 있다는 걸 눈치챈 뒤였다. 굳이 쳐다보지 않았을 뿐.






희민은 시리얼을 들고 있는 정혁에게서 몸을 돌려 카트를 끌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다른 시리얼을 골라 담고 필요한 물품들을 사는 동안 정혁이 조금 거리를 두고 뒤따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따라와서 어쩔 건데.’






자긴 분명 오지 말라고 했었고, 그 말을 어긴 건 정혁이다. 더 이상 저 남자에게 휘둘리고 싶지도 않았다.


희민은 고집스럽게 그를 보지 않았다.






계산을 마친 뒤 짐을 차에 싣기 위해 카트에 넣고 마트를 나설 때까지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마트 지하 주차장으로 나온 희민은 카트를 밀고 차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빠앙!




“!”






순간 고개를 돌린 희민의 눈앞이 번쩍이며 밝아졌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차를 보고 그녀의 온몸이 굳었다. 


그때 뻗어 나온 팔이 순간적으로 희민의 허리를 잡아 뒤로 낚아챘다.






쿵.






희민을 끌어안은 정혁의 등이 기둥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아……!’






그의 품에 안긴 희민의 눈이 당혹스럽게 흔들렸다.






끼이익!






가까스로 사고를 면한 차가 급정거를 했다. 운전석 쪽 창문이 열리고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야! 미쳤어?! 차가 오는 걸 보고 나와야 될 거 아니……!”






욕하던 남자가 정혁의 서늘한 눈빛을 보고는 흠칫거렸다.






“앞으로 좀 조심해요.”






데시벨이 확 낮아진 목소리로 내뱉고는 고개를 돌린 남자가 창문을 올리고 그대로 가 버렸다. 차가 멀어지자 주변이 조용해졌다.






벽에 등을 댄 채 희민을 품에 바짝 끌어안고 있는 정혁이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봤다.






“괜찮아요?”




“……네.”






희민이 대답하며 몸을 세우려는데 정혁이 그녀를 품에 더 꽉 안았다.






“!”






더 깊이 안기게 된 희민의 눈이 커지는데 정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달려오는 차도 못 볼 정도로 신경 쓰이면서 왜 못 본 척을 해.”






숨을 삼킨 희민이 그의 몸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놔줘요.”




“대답하면 놔줄게.”




“…….”






희민은 심장 박동이 어지러울 정도로 뛰고 있었다. 


이렇게 안겨 있으니 익숙한 서정혁의 체향과 우드 계열 향수 향에 온몸에 힘이 쭉 빠지는 것 같았다.






“계속 신경 쓰였잖아, 당신.”






귓가에 정혁의 열기가 감도는 낮은 목소리가 닿았다.






“뒤에 있는 내가 신경 쓰여서 앞만 보고 간 거잖아. 아니야?”




“그건……!”






정혁이 그녀의 얼굴을 들어 올리자 입을 열던 희민이 멈칫거렸다.






“내 눈을 보고 말해 줬으면 좋겠는데.”






커다란 품에 안긴 채 눈앞에서 시선이 붙들리자 희민의 숨결이 가늘게 떨렸다.


이 남자는 모른다. 


이 눈빛이 자신을 어떤 상태로 만드는지를. 미열이 온몸에 뜨겁게 확 번지는 느낌에 희민은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내가 싫어서 그래?”




“…….”




“너무 싫어서, 쳐다보기도 싫어서 그런 거냐고.”






희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싫다고 해. 어서, 싫다고…….






입술을 달싹거려 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주시하던 정혁이 희민의 턱을 더 들어 올렸다.






“당신은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거짓말을 못 하는 사람이지.”




……내가?






희민이 눈을 깜빡이는데 정혁의 얼굴이 진지해졌다.






“그때도 그랬으니까.”




“…….”






가만히 보고 있던 희민이 표정을 정돈했다.






“거짓말 같은 거 안 해요.”




“그래. 알아. 한희민은 솔직하니까.”






정혁이 이 순간에 어울리지 않게도 아찔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자 희민은 머릿속에 산소가 점점 부족해지는 기분이었다. 


겨우 아닌 척 눈에 힘을 주고 있는 게 전부였다.






시선이 엉켜드는 사이 주차장엔 차가 계속 지나다니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힐긋거리는 게 보였지만 정혁은 신경도 쓰지 않는 듯 희민에게만 시선을 뒀다.






전에도 그랬다.


길거리에서 누가 쳐다보든 서정혁은 자신만 보고 있었다. 주변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이.






“그러니까 말해 봐. 내가 싫으면 싫다고 말하면 돼.”






정혁이 집요하게 물어 왔다.






“싫다고 하면,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건가요?”






희민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묻자 그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느슨해졌다.






“아니.”




“그럼 무슨 의미…….”




“그저 당신 마음이 알고 싶어서야.”






정혁이 타오를 듯한 눈동자로 희민의 입술을 응시했다. 곧 그 시선이 눈으로 올라오자 희민은 심장이 꽉 움켜잡히는 것 같았다.






“당신이 날 정말 싫어하는지 알고 싶어. 하지만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냐고 하면…… 난 그러지 못해.”






그가 고개를 기울이자 어둡게 타오르는 눈동자가 더 가까워졌다.






‘숨 막혀.’






희민은 숨 쉬기가 어렵다는 걸 느꼈다. 미열 때문인지 서정혁의 이 눈빛 때문인지 어지러울 정도로 숨이 차올랐다.






“당신이 그 집에서 사라진 뒤 알게 됐거든.”




“뭘…… 알게 됐는데요.”






희민은 자신이 거의 헐떡이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오로지 자신의 입술과 뺨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반응하지 않고 눈을 치켜뜨고 있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희민의 열기가 번진 얼굴을 가까이서 내려다보며 정혁이 말했다.






“나도 감정이라는 게 있다는 거.”




“감정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희민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있어. 가끔은. 정도의 차이겠지만.”






이게 무슨 말일까?






온몸에 번진 열기를 누르며 희민이 정혁의 말을 생각하고 있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그때 무의미하다고 한 거 사과할게. 그땐 몰랐어. 그런 감정이 있다는 걸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




“…….”






“누군가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더는 내 곁에 없을 때 가슴이 무너질 거 같다거나, 꽉 막힌 것처럼 조여드는 거 같다거나. 그런 거 그땐 알지 못하고 한 소리야.”






진지한 목소리에 희민이 일부러 차갑게 말했다.






“내 일로 알게 됐다는 말로 들리네요.”




“맞아. 한희민 덕분이지.”






정혁이 그답지 않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자 희민이 표정을 굳혔다.






“그렇게 웃지 말아요.”




“어째서?”






의아하게 보는 정혁의 시선을 희민이 피했다.






“이상하잖아요. 당신 그렇게 웃지 않았는데. 그리고 별로 웃지도 않던 사람이.”






항상 냉기가 흐르던 미소를 짓거나 화가 났을 때 더 아름다운 미소를 짓던 사람이 그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웃는다는 게 이상했다. 하는 말도 그렇고…… 이 남자가 정말 그 서정혁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였다.






“안고 싶어서 매일을 죽을 것 같았던 여자를 안고 있는데 웃음이 안 나오나?”




“당신 정말 아까부터 무슨 말을…….”






얼굴이 확 붉어진 희민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 얼굴을 정혁이 커다란 두 손으로 감쌌다.






“정말이야. 진짜 죽을 것 같았어.”




“…….”




“그때 내가 한 말은 농담이 아니야. 미친놈 같겠지만…… 정말로 그래.”






정혁이 한숨처럼 뱉어 냈다. 그가 지금 한 말이 하루에도 수도 없이 자위한다던 그 낯 뜨거운 말이라는 걸 깨닫자 희민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그리고.”






정혁이 설명할 말을 찾듯 미간을 좁혔다. 그답지 않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설명하기 위해 열심히 단어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






“몸뿐인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마음도 감정도 전부 하루 종일 당신만 떠올리고 갖고 싶어 했어.”






그의 곧게 뻗은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시선을 박고 있는 그를 마주 보던 희민은 이상함을 느꼈다.






‘달라……졌어.’






욕망 어린 뜨거움만 담긴 그의 눈동자엔 다른 것도 담겨 있었다. 


똑같다고만 생각했는데 다르다. 


정염만이 아닌 절박함. 간절한 어떤 감정이 섬세하게 빛나는 그의 진지한 눈동자에 담겨 있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내가 아니라 당신 감정이야.”






두 손으로 희민의 얼굴을 감싸 쥔 정혁이 확인하듯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감정을 읽어 내려는 절박한 시선을 희민은 참지 못할 것 같았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이 그는 그녀의 시선을 완전히 포박했다.






“한희민은 내가 싫은 건가? 그래?”






탁한 목소리가 열기를 띠고 그녀의 귓가에 감겨들었다. 희민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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