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12장(2)

짐승 계약 #12장(2)

M 망가조아 0 1706

짐승 계약 #12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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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떻게 지내?” 






주문을 마치고 음료를 먼저 받은 뒤 석호가 물었다.






“그냥 쉬고 있어. 조금 쉬다가 여러 가지 배워 볼까 싶어.”






희민이 의자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며 대답했다.






“이쪽 일로는 안 돌아올 거야?”


“응.”






짧게 대답한 그녀의 표정을 보고 석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질릴 만도 하지……. 그래도 아쉽긴 한데. 보통 경력도 아니고.”


“이젠 그때처럼 치열하게 살고 싶지도 않고.”






희민이 탄산음료 잔에 꽂힌 스트로를 매만지며 담백하게 말했다. 


그녀의 얼굴을 석호가 안쓰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봤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는데 한순간에 그렇게 되면 나라도 방전될 것 같긴 해. 좀 쉬면 나아질 수 있어. 상황이 되면 쉬면서 천천히 생각해 봐. 희민 씨 말대로 취미로라도 가볍게 다른 일 배워 보고 그러면서.”






“……그러려고.”






희민이 흐리게 웃었다. 쉰다고 해서 나아질 성질의 문제는 아니지만 석호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마침 주문한 파스타와 화덕 피자가 나오고 두 사람은 식사를 시작했다.






‘역시 약을 먹어야 하나.’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감던 희민의 하얀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미열이 다시 올라왔다. 바깥 공기를 쐰 뒤 좀 나아진 것 같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희민이 약을 찾으려고 가방 쪽으로 몸을 돌리다가 문득 창밖을 쳐다봤다. 


순간 희민이 움직임을 멈췄다. 


햇빛이 쏟아지는 2층 창가 아래 골목에서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가 있었다.






“!”






남자를 쳐다보다 포크를 놓칠 뻔한 희민은 정신을 차리고 얼른 접시로 고개를 돌렸다.






‘저 남자,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거지?’






정혁을 보자마자 심장이 반응했다. 잠깐, 그런데…….






당황을 누른 희민이 이상함을 느끼고 다시 흘끔거리며 시선을 돌렸다. 


검은색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는 정혁의 손에 들려 있는 건 분명 담배였다. 그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희민 씨?”






석호의 목소리에 희민이 멈칫해선 고개를 들었다. 눈앞엔 걱정이 섞인 석호의 얼굴이 있었다.






“얼굴이 창백해. 어디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


“아. 괜찮아.”






애써 웃으며 대답한 희민이 포크로 말고 있던 파스타 면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하지만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정혁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데…….’






분명 그때 저택에서 정혁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담배 냄새가 났던 적도 없었다. 그럼 그 뒤에 피우게 된 걸까?






밖에서 그가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니 온몸의 미열이 극심해졌다. 얼굴까지 달아오르는 기분에 희민이 빠르게 말했다.






“미안, 석호 씨. 아무래도 몸이 안 좋은 게 맞나 봐. 오늘은 그만 들어가야겠어.”






희민이 티슈로 입을 닦으며 몸을 일으키자 석호가 걱정스럽게 따라 일어섰다.






“역시 안 좋네. 나 때문에 무리해서 나올 거 없었는데. 많이 안 좋으면 집까지 바래다줄까?”


“괜찮아. 미안한데 그만 나가자.”




“몸이 안 좋은데 미안하긴. 이런 날 불러낸 내가 미안하지.”






석호는 정말 괜찮다는 듯 계산서를 들고 일어섰다. 그걸 본 희민이 계산서를 가져가려 했다.






“내가 낼게. 나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다음에 사. 이건 내가 낼 테니까.”






계산서를 가져가려는 희민의 손을 물리친 석호가 카운터로 향했다. 


희민은 신경이 쓰였지만 여기서 더 권할 수가 없어서 의자에 걸어 둔 숄더백을 들고 따라나섰다.






“오늘 미안해. 석호 씨.”


“그럴 거 없다니까. 조심해서 운전하고.”




“응. 다음에 봐.”






석호와 인사를 나눈 희민이 차에 올라탔다. 주차장에 오자 심장이 더 요란하게 뛰었다.






‘그 남자의 차도 여기 있을까?’






자신이 일어나는 것을 그도 봤을 거였다. 밖에서 바로 올려다보이는 위치였으니까. 


주변을 한번 살펴봤지만 정혁이 보이진 않았다. 


그래도 어디선가 그가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희민은 긴장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잔뜩 긴장한 게 무색하게도 희민이 집에 올 때까지 정혁은 나타나지 않았다. 


혹시 몰라 집 주차장에서까지 바짝 신경을 세우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


집에 들어온 희민은 어깨에 힘이 탁 풀렸다.






“……뭐야.”






왠지 자신이 바보 같아진 기분이었다.


서정혁에게 너무 신경을 쓴 나머지 환각이라도 본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거나. 그는 담배를 피우지 않으니.






미열 때문이라고 생각한 희민은 곧장 감기약을 꺼내 먹었다. 그러고는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감기 때문이라면 약을 먹었으니 푹 자면 나아질 거야.’






그럼 이런 바보 같은 짓도 안 해도 되겠지.






눈을 꼭 감은 희민은 점점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열감은 자꾸 강해지고 그 열감이 서정혁과의 일을 떠올리게 했다. 


익숙한 열기, 익숙한 시선……. 그 모든 것들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날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 남자에게 사로잡혔던 그 열감의 시간들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희민은 미간을 일그러뜨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기억은 더욱 선명해졌다. 


어지러운 머릿속으로 벗어날 수 없는 쾌감에 몰아붙여진 채 헐떡이는 자신과 시선을 끈질기게 옭아 드는 묘한 빛깔의 눈동자가 뒤죽박죽 떠올랐다.








‘만에 하나 또 오늘 같은 날이 있더라도 넌 나만 보고 있어야 해.’




‘아아! ……아! 더, 더는……!’








타오르는 눈빛에 선명하게 떠오른 감정은 평소와 달랐다. 뭐지? 혼란스러움을 느꼈지만 온몸에 들끓어 오르는 쾌락이 더 컸다.






'못 견디겠어……!'






아무리 도망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젖은 몸을 움켜쥔 커다란 손아귀가 뜨거워 피부가 데일 것만 같았다.






‘다시 다른 남자에게 시선 줬다간 나도 내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으니까……. 그 자리에서 널 이렇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야. 한희민.’






탁탁거리며 살을 치대는 소리가 격렬해질수록 그의 허벅지까지 미끌거리는 애액이 잔뜩 묻었다. 


눈앞이 아찔해지고 고개를 저어 대는 순간 귓가에 그의 목소리가 박혀 들었다.






‘후…… 제길.’






질투에 휩싸인 그가 사정을 참지 못했다. 그의 구겨지는 미간을 보는 순간 쿵 떨어지는 심장의 울림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건, 질투였어.’






희민은 미열과 수마의 경계에 빠진 채 깨달았다. 서정혁의 그때 행동은 분명, 질투였다고.








***








“회장님.”






차 실장이 다가오는 걸 본 정혁이 담배를 바닥으로 떨어뜨렸다.






“…….”






그가 떨어뜨린 담배꽁초를 차 실장이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봤다. 


짧게 한숨을 들이켜고 까칠해진 정혁의 얼굴로 다시 시선을 올린 그녀가 말했다.






“세양 쪽에서 준비가 끝났다고 연락 왔습니다. 4A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세요.”






정혁은 대답하면서도 그녀의 말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한 그 얼굴은 차 실장에게 답답함을 느끼게 했다.






한희민이 저택을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정혁은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실장님. 회장님은 어디로 가신 겁니까? 중요한 회동이 있는데……. 지금 진행하는 것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승준이 난감한 얼굴로 물어 왔을 때 차 실장은 정혁이 한희민을 쫓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당분간 매수만 진행하고 나머진 우선 실행 정지 해 둬요. 회장님 복귀하시면 그때 진행하는 걸로 하고.’




‘정말 이해가 안 갑니다. 지금을 위해 15년 넘게 기다려 왔는데 회장님은 하필 이때 자리를 비우시고…….’




‘……더 중요한 일이 있을 수도 있겠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일단 내 말대로 해요. 걱정할 것 없어요. 회장님 곧 복귀하실 겁니다.’








승준에게 그렇게 말해 뒀지만 사실 차 실장도 자신이 없었다. 정혁의 이런 모습을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회장님.”






한희민 차가 사라진 곳을 보고 있는 정혁을 부르자 그의 시선이 차 실장에게 향했다. 최근 야위어서인지 더 날카로워진 턱선을 차 실장이 씁쓸하게 바라봤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할 말을 누른 차 실장이 돌아섰다.






정혁은 벌써 두 달이 넘게 이런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제 지체시킬 시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그가 회사로 복귀하지 않고 이러고 있는 이유를 차 실장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게 더 답답했다.






차로 돌아온 차 실장이 시동을 걸려다 움직임을 멈췄다.






“…….”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가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끼고 전화를 걸었다.






“이 비서.”


“네. 실장님.”






곧바로 전화를 받는 인영의 목소리에 차 실장이 피곤한 얼굴로 이마를 매만졌다.






“고 비서는 퇴근했어요?”


“방금 전에 했습니다.”




“그럼…… 이 비서 지금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요? 상담할 게 있는데.”






고민한 것이 우습게도 인영의 대답은 바로 들려왔다.






“물론입니다. 실장님.






인영은 차 실장이 말한 시간에 맞춰 정확히 바에 도착했다. 


회사에서 바로 나왔기 때문에 슈트 차림이었고 머리카락 하나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차가운 인상을 주는 은색 안경테와 날렵한 체형이 호락호락하게 볼 수 없는 이미지를 줬다.






오래 같이 일하기도 했지만 인영은 차 실장 스스로 생각할 때 일 궁합이 잘 맞는 사람이었다.


언제나 그녀가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을 먼저 끝내 놓는 기민성과 업무적 센스도 있었다. 


무엇보다 입이 무겁고 필요한 말 이상은 일절 하지 않는 점도 좋았다. 


쓸데없는 대화를 거의 하지 않는 차 실장으로선 그 점이 가장 대하기 편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인영은 차 실장이 혼자 생각하는 걸로는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때 상담하기 좋은 상대였다.






칵테일을 한 잔씩 시키고 테이블석에 마주 앉자 인영이 말했다.






“이번엔 무슨 일입니까. 실장님이 저에게 따로 상담하시는 건 회장님 문제일 것 같은데.”






평소 종종 이런 자리를 갖는 터라 인영은 곧바로 목적을 물어 왔다.






“…….”






차 실장이 인영을 잠시 바라봤다. 


이렇게 빙빙 돌리지 않고 거두절미한 그의 성격도 일할 때 꽤나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다만 할 말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선 꽤나 난감하기도 했다. 지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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