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22장(1)

짐승 계약 #22장(1)

M 망가조아 0 1365

짐승 계약 #22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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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윤은 사교장에서 단번에 눈에 들어오는 남자를 보고 입술을 비틀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젠틀한 미소를 짓고 있는 남자에게 기다렸다는 듯 똑바로 다가가자 그가 그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태원 사람이 왜 세양그룹 임원들을 만나고 다녀요?”






주변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니 오히려 다 들으라는 듯 지윤이 언성을 높여 말했다. 


일부러 그러는 심리를 모를 리가 없는 정혁이 미소를 유지한 채 힐긋거리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잠시 양해 바랍니다.”






몸을 돌려 지윤과 똑바로 마주 보고 선 그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디 더 해 보라는 듯한 태연한 얼굴을 지윤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지금 김지훈의 저 얼굴은 문태진과 닮아 있었다.


기분이 나빴지만 그녀는 억지로 입술 끝을 휘어 올렸다.






“자리 옮겨 달라고 안 하는 것도 자존심 때문인가 봐요. 그거 참 쓸데없는 건데.”




“용건만 간단히 말해 주면 좋겠는데요. 최지윤 씨. 보시다시피 제가 다른 분과 대화 중이었던지라.”






정혁의 미소가 짙어지자 지윤의 눈이 가늘어졌다. 


역시 이 남자는 경멸하는 상대일수록 미소가 짙어지는 남자다. 


전에 느꼈던 게 기분 탓이 아니었다는 걸 확실히 깨달은 그녀가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장소를 옮길까요?”




“전 괜찮습니다만.”




“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 주시면 될 것 같은데.”






피차 여기선 말하기 불편한 이야기였지만 지윤은 정혁을 배려하듯 말하고 먼저 몸을 돌렸다. 


그가 따라오는 것을 곁눈질로 확인한 그녀가 테라스 쪽으로 걸어갔다.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오자 지윤이 팔짱을 끼고 그를 향해 돌아섰다.






긴장감 없이 느른히 서 있는 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그녀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 반지를 보자 한희민에게 눈부신 미소를 짓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환하게 마주 웃던 한희민의 얼굴도.






‘하.’






헛웃음을 흘린 지윤이 표정을 굳히고 차가운 시선으로 정혁을 올려다봤다.






“좀 이상해서 알아봤는데 점점 더 이상하던데요? 당신이 세양그룹 임원과 접촉한 게 한두 번이 아닌 것 같던데.”




“…….”






정혁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잘난 얼굴을 형편없이 구겨지게 만들어 주고 싶은 충동이 지윤의 내부에서 끓어올랐다.






“당신이 나한테 넘어왔으면 이런 방식보다는 좀 더 부드러웠을 텐데 어쩔 수 없죠. 워낙 고고하게 나오시니 내가 더러워질 수밖에.”




“얼마나 더러워지셨는지 궁금하군요. 최지윤 씨.”






그의 입술 끝이 시니컬하게 휘어 올라갔다. 






그림 같은 미소를 보니 지윤은 점점 더 배알이 뒤틀렸다. 


짜증스러운 감정을 숨긴 지윤이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이제야 나에게 관심 가져 주니까 좋네요. 그런데 자존심은 이미 상할 대로 상했는데. 어쩌죠?”




“그거 참 아쉬운 일인데요.”






하지만 그의 얼굴에선 일말의 아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으득.






이를 악문 지윤이 웃음을 거두고 표독스럽게 정혁을 쳐다봤다.






“본론으로 들어가죠. 한희민 씨 알죠?”




“그렇다면?”






본론을 꺼내 놓음과 동시에 말을 놓는 남자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 지윤이 가슴 위에서 팔짱을 꼈다.






“당신이 그 여자 연결 고리인 거 알아요. 태원의 어느 높으신 분이 한희민 뒤에 있는진 모르겠는데, 그 여자 스폰서에게 그거 그만두게 해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감정 없는 목소리지만 사람을 흠칫거리게 하는 위압감이 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는데 존칭이 사라진 말투와 목소리만으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다니. 


순간 지윤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어렴풋이 받았다.






“그러면 내가 알아본 거 묻을 테니까. 당신도 다칠 일 없을 테고.”






지윤이 차가운 눈으로 올려다보며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갔다. 거리를 좁힌 그녀가 은밀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행동 대장 같은 건가 봐요? 알아보는 족족 당신 이름이 나오는 거 보면.”




“…….”




“근데 그거 알죠. 보통 일 터지면 행동 대장이 먼저 다 뒤집어쓰고 잡혀가는 거.”






지윤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정혁의 반응을 살폈다.






자신이 대충 알아보고 온 게 아니라는 힌트는 충분히 줬을 거였다. 


그런데도 정혁의 표정에 변화가 없었다.  그저 자신에게 시선만 박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눈빛이 조금 이상했다. 당황한 것과는 거리가 먼 묘한 눈빛으로 저를 주시하고 있었다.






‘저 표정은 뭐지?’






그를 관찰하며 지윤이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몸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이건 당신을 위한 충고니까.”




“……아아, 그랬군.”




“네?”






순간 픽, 웃음을 흘리는 정혁을 본 지윤이 미간을 좁혔다. 갑자기 손을 뻗어 온 그가 지윤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뭐, 뭐 하는 거예요?”






수려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는 급작스러운 정혁의 행동에 지윤은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정혁은 그녀의 반응에 아랑곳없이 하나하나 뜯어보듯 가까이에서 지윤의 얼굴을 응시했다.






곧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오해했던 거였어. 그때 남자를 본 게 아니었는데.”






정혁이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뉴욕에서 희민이 눈길을 준 이는 정말 서양 남자가 아닌 이 여자였다는 걸 지금 알았다. 


그때 그곳에서 최지윤을 의심하던 차에 우연히 보게 되었던 모양이다. 


그걸 모르고 당시 최지윤과 함께 있던 서양 남자를 희민이 쳐다본 줄 알고 질투했었다.






“무슨 말 하는……. 이거 놔요!”






지윤이 그의 손을 밀쳐 내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괜히 얼굴이 붉어지는 걸 들킬까 봐 빠르게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내 말 알아들었죠? 그 스폰서에게…….”




“그거 난데.”






지윤이 멈칫해선 정혁을 바라봤다. 그는 방금 전과 다른 표정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미소가 사라진 얼굴에는 서늘한 위압감만이 남아 있었다.






“나라고. 한희민 빼내 준 거.”




“하, 말이 되는 소릴 해요. 당신도 그 재판에 얼마가 들었는지 알 거 아니에요.”




“재판에 든 돈? 별거 아니잖아. 그건.”






그가 웃었다. 지금까지 짓던 웃음과는 전혀 다른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웃자 지윤은 섬뜩함을 느꼈다.






‘이 남자, 김지훈 맞아?’






마치 전혀 다른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그런데 당신…….”






정혁이 다시 한 걸음 다가오자 지윤이 흠칫거렸다. 


손을 슈트 바지 주머니에 꽂고 있는데도 좀 전과 다른 분위기 때문에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거리를 좁힌 정혁이 위에서 그녀를 내려다봤다.






“한희민을 망친 최지윤에게 복수한 비용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한데.”




“뭐, 뭐라고?”






지윤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때 정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팔을 들어 손목시계를 쳐다봤다.






“그런데, 아직 연락 못 받았나?”




“무슨 연락을 받아? 그보다 방금 뭐라고 한…….”






그녀가 앙칼진 목소리를 내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비서실장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제야 연락이 온 모양이군.”






정혁이 입술을 늘이는 모습을 지윤이 당혹스럽게 쳐다봤다. 


마치 비서실장에게서 전화가 올 것을 알고 있던 사람처럼 하는 말에 불길한 기운을 참아 누르며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에요?”




“사장님! 지금 당장 본사로 가 보셔야 합니다!






다급한 실장의 목소리가 지윤의 심장을 더 크게 뛰게 했다.






“지금 당장이라니, 이 시간에 무슨 일인데 그래요.”






지윤이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본사에서 연락이 왔는데…… 예고도 없이 급작스러운 주주 총회가 열리고 있다고 합니다. 그, 그런데 지금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총수 일가의 경영권을 박탈시키겠다는 안건이 진행되고 있다고…….






머리칼을 넘기던 지윤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우리 회사 경영권을 누가 박탈시킨다고!”




“저도 당황스러운데 이미 최대 주주는 회장님 일가가 아닌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고 합니다.




“뭐?”






지윤의 입술이 크게 벌어졌다.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려 버린 그녀의 얼굴을 정혁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대주주들도 이미 경영권 교체를 희망하고 있다고……. 어쨌든 빨리 본사로 가셔야 합니다!




“아, 알았어요. 일단, 일단 지금 바로 갈게요.”






혼란스러운 얼굴로 전화를 끊은 지윤이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그때 당황한 나머지 순간 잊고 있던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연락이 너무 늦은 거 아닌가. 세양그룹 실권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사람한테.”






돌아서던 지윤이 멈춰 서서 정혁을 바라봤다. 그녀의 흔들리는 시선이 평온한 표정의 남자에게 향했다.






“이거…… 혹시 방금 당신이 말한 게 이거야? 나에게 복수했다는 거, 그게 설마…….”






그녀의 말에 정혁이 느른하게 웃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 어서 가 봐. 남은 지분 다 뺏기기 전에.”






입술을 늘이고 웃고 있는 정혁을 초조하게 쏘아본 지윤이 홱 몸을 돌렸다. 


정신없이 테라스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그의 차가운 시선이 박혀 들었다.






***






급히 달려온 지윤이 본사 중역 회의실에 도착했다. 






이미 회의실 안에선 모든 일이 끝난 듯 사람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밀려 나오는 사람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자 최 회장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난리를 피우고 있었다.






“니들이 뭔데 마음대로 내 경영권을 박탈해! 이건 다 무효야!”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최 회장에게 임원들과 주주들 중 누구 하나 관심 두는 이가 없었다. 


한심하다는 듯 힐긋거리며 회의실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평소 굽신거리며 최 회장에게 허리를 조아리던 그들의 배신적 행태에 지윤은 온몸이 뻣뻣이 굳을 정도로 분노가 차올랐다.






‘당신들이 감히……!’






지윤이 입술을 짓씹는데 회장 옆에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키가 크고 안경을 착용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무표정하게 최 회장의 난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지윤이 노려보고 있는데 평소 최 회장과 친밀한 관계였던 황구영 전무가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일어서며 최 회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러게 왜 남이 회장님 경영권을 침범할 정도로 주식을 사 모을 때까지 방관하셨어요.”




“헛소리하지 마! 그 정도로 큰 지분 차지할 만한 건 없었어! 이건 사기야!”






최 회장이 고함을 쳤다. 


완전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곤두선 핏대들 때문에 그는 더 기괴해 보였다. 


그러자 옆에 있던 인영이 그에게 파일을 펼쳐 내보였다.






“아까 몇 번이나 보여 드렸지만, 여기 보시면 저희 AQ그룹에서 지난 15년에 걸쳐서 총 32개의 회사로 나누어 산 주식이…….”




“집어치워!”






퍽!






인영이 내민 파일을 최 회장이 벽으로 던져 버렸다. 그러고는 회의실 테이블 위의 모든 기기들을 전부 쓸어 내렸다.






“아아악! 이건 다 모함이야!”






와르르르!






테이블 위에 있는 것들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최 회장이 회의실 안의 손에 잡히는 모든 것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미친 사람처럼 고함을 질러 대는 그를 인영과 차 실장은 말없이 보고 있었다. 


그저 날뛰는 걸 가만히 구경만 하는 사람들처럼 최 회장의 난동을 관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당혹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김지훈 데려와! 그 개자식이 날 속이고……!”




“저 부르셨습니까.”






굳어 있는 지윤의 옆을 지나친 정혁이 태연히 회의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최 회장이 산발이 된 머리를 치켜들더니 눈을 번뜩였다.






“너, 너 이 자식……! 이럴 거면서 나한테 와서 투자니 뭐니 개소리를 했어? 감히 니가 나를……!”






최 회장이 미친 사람 같은 몰골로 정혁을 향해 달려드는데 경호원들이 빠르게 앞을 막아섰다.






“이, 이건 다 뭐야?”






순식간에 자신을 에워싼 경호원들을 최 회장이 당황한 얼굴로 쳐다봤다.






“넘겨주신 주식이 아주 유용했습니다. 덕분에 마지막 퍼즐이 완성되었으니까.”




“뭣……!”






정혁이 경호원들에 포박된 최 회장을 보며 말했다. 


머리칼이고 옷이고 완전히 흐트러진 채 벌건 얼굴로 씩씩거리는 짐승 같은 모습의 최 회장을 정혁이 만족스럽게 쳐다봤다.






“그리고 김 실장님께서 넘겨주신 파일도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온갖 비리와 탈세 증거들이 넘쳐 나던데요. 불법 로비와 뇌물 수수 증거도 함께 말입니다. 덕분에 경영권만 박탈되는 건 아닐 겁니다. 회장님.”






정혁이 그림 같은 미소를 짓자 최 회장의 핏발 선 눈이 터질 듯 커졌다.






“너…… 너……! 너……!”




“검찰에 넘어가는 자료 중 회장님이 한 일이 아닌 것도 있을 수 있겠지만.”






서늘한 정혁의 시선이 지윤에게 향하자 그녀가 흠칫거렸다. 하얗게 질린 지윤에게 시선을 박은 채 그가 말했다.






“그건 회장님 업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똑같은 방식으로 제 소중한 사람이 커다란 상처를 받아서 말입니다.”




“……!”






그의 말에 지윤은 온몸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그가 지금 자신이 한희민에게 저지른 죗값까지 치르게 할 작정인 거 같아 이가 딱딱 부딪치며 떨려 왔다.






정혁이 다시 최 회장에게 느른히 시선을 돌렸다. 


절망에 찬 최 회장은 입을 벌리고 볼품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그를 보는 정혁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대…… 대체 왜 나에게…….”






말도 잘 나오지 않는 듯 절망 어린 얼굴로 서 있는 최 회장에게 정혁이 말했다.






“모르십니까?”




“그러니까 대체 뭘! 뭘 말하는 거냐고!”






최 회장이 까랑까랑한 쇳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상한 소리만 하지 말고 제발 좀 알아듣게 말해!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김지훈.”




“니 이름 누가 몰라서 헛소리를…….”




“아는 이름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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