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10장(1)

짐승 계약 #10장(1)

M 망가조아 0 1601

짐승 계약 #10장(1) 

1548f03e6fdbbb0d6fbe23e9be55fb2f_1702377371_3179.jpg 

오랜만에 병원을 찾은 딸을 보자 서희가 말간 웃음을 지었다.






“우리 딸 덕분에 엄마가 입원해서도 호강이네.”






희민이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






구속되어 있는 동안 변호사비와 병원비로 모아 놓은 돈을 전부 날린 상태였다. 


서희는 모르지만 입원비가 밀려 강제 퇴거 요청도 받았었다. 


마침 그때 차 실장의 제안을 받게 되어 입금된 거액의 계약금으로 오히려 서희의 병실은 업그레이드됐다.


그런 사정을 전혀 모르는 서희는 그저 그 전처럼 자신의 딸이 잘나간다고만 생각하고 있을 거였다.






“……호강은 무슨. 빨리 나아지기나 해.”






희민 입장에선 서희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나았다. 


이 1년 반 사이 자신에게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알면 서희는 죽어도 눈을 못 감을 거였다.






“해외 출장을 얼마나 연달아 다니면 병원 한 번을 못 왔어. 아무리 바빠도 어떻게든 얼굴 비치는 애가 못 올 정도면.”




“괜찮아. 이 바닥에선 바쁜 게 좋은 거잖아.”




“그래도……. 얼굴 많이 상했어, 너.”






서희가 걱정스럽게 얼굴을 들여다보자 희민은 속이 아팠다. 


얼굴 상한 게 누군데. 오랜만에 본 서희는 그 전보다 훨씬 안 좋아져 있었다. 


안 그래도 마른 몸은 더 앙상해졌고 얼굴에 혈색이라곤 없었다.


마치 밀랍인형처럼 보일 정도였다.






서희는 희민이 어릴 때부터 아팠다.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사고로 잃고 그 일로 인해 안 그래도 병약하던 엄마에게 큰 병이 왔다고 했다. 


그 병은 결국 암으로까지 진행되어 희민이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부터는 집에 있는 시간보다 입원한 시간이 더 많았다.






적지 않은 유산으로 형편이 어려운 집이 아니었는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불어나는 병원비는 점점 더 모녀의 목줄을 조여 왔다.


그럴수록 희민은 필사적으로 공부했다. 


아픈 엄마를 위해서 아등바등 노력한 결과 여기저기 매스컴에 탈 만큼 성공 궤도를 달리게 되었다.






하지만 서희는 날이 갈수록 생명력을 잃어 갔다. 


희민이 성공한 삶을 산다고 해도 아픈 엄마가 건강해질 순 없는 거였다. 


그래도 국내 제일의 의료 케어를 받을 수 있게 해 드리기 위해 잠 잘 시간도 아껴 가며 일했다. 


개인의 취미 생활, 휴식, 친구와의 소소한 식사 등 그 모든 건 사치라 생각하며 일에만 매진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희민 자신도 모르는 이유로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만약 그 계약이라도 없었다면…….’






그랬더라면 아마 병원비를 내지 못해 서희는 지금쯤 이 세상에 없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희민은 팔뚝에 자잘한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일로 막연하던 현실이 눈앞에 보이니 뒤늦은 실감이 아찔한 공포로 다가온 거였다.






“희민아.”






서희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굳어 있던 희민이 흠칫거렸다.






“응?”






희민이 정신을 차리고 쳐다보자 서희가 그녀의 얼굴을 살피고 있었다.






“요즘도 만나는 남자 없니?”




“바쁘잖아. 엄마 말대로 문병 올 시간도 없었는데 남자 만날 시간이 어디 있어.”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기려는 희민을 서희가 진지한 말투로 막았다.






“엄마가 항상 말했지. 세상에 의지할 사람 하나는 있어야 해. 넌 엄마가 몸이 약해서 다른 혈육도 만들어 주지 못해서 늘 걱정이 돼.”




“…….”






희민이 잠시 서희를 보고만 있었다.






서희가 늘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긴 했다. 하지만 지금 희민에게 있어 남자는 끔찍했다. 표정을 굳힌 희민이 시선을 피했다.






“나 혼자서도 잘 사니까 걱정할 거 없어. 이상한 남자 만나서 고생하는 거보단 혼자 사는 게 낫고.”






자신의 상황도 모르고 하는 말이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남자 얘기를 하는 것이 듣고 싶지 않아 희민은 저도 모르게 차갑게 말했다.






‘엄마 탓도 아니잖아.’






하지만 희민은 곧장 자신의 못된 말투를 후회했다. 제가 선택한 일인데 순간적으로라도 까칠하게 말한 것을 사과하려 희민이 입을 열었다.






“엄마, 그러니까 난…….”




“그래도 이기적인 부탁인 거 아는데…… 엄마가 너 혼자 두고는 눈을 감아도 죄책감에 죽지를 못할 거 같아서 하는 말이야.”




“왜 그런 소릴 해? 요즘 경과도 좋다고 아까 의사 선생님도……!”






희민이 답답한 마음에 얼굴을 와락 찡그리는데 서희가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희민아.”






소름 끼치게 앙상한 손을 내려다보며 희민이 입을 다물었다. 서희가 딸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엄마 몸은 엄마가 가장 잘 알아.”




“…….”




“부탁할게. 나쁜 남자 만나라는 거 아니야. 다만 노력만이라도 해 줘. 평생 함께해 줄 수 있는 든든한 네 편 만들려는 노력이라도.”






서희가 뼈마디가 다 드러난 손으로 희민의 손을 강하게 잡아 왔다. 그 손에 담긴 걱정을 모를 리가 없는 희민이 입 안 연한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알았어. 안 그래도 여기저기 소개시켜 준다고 귀찮게 하는 사람들 한둘이 아니야. 바쁘다고 다 거절했는데 이번 주부터는 시간 될 때마다 한 명씩 만나 볼게. ……그럼 안심할 거야?”






희민의 말에 서희의 하얀 얼굴에 환한 웃음이 걸렸다.






“역시 착한 우리 딸. 정말 고마워. 희민아.”






서희의 웃음을 보던 희민은 눈시울이 뜨거워져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나 바쁜 중에 나온 거라서 그만 가 봐야 해.”






희민이 정말 급한 볼일이 있는 사람처럼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챙겼다.






“그래.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여 줘서 고마워. 많이 바쁘면 엄마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까 그 시간에 소개팅이라도 해.”




“알았다니까. 잔소리는.”






어색하게 미소를 지은 희민은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친 희민이 작게 훌쩍이며 엘리베이터를 탔다.






서희는 학생 때부터 남자 친구 만들라는 말을 했었다.








‘나 공부해야 돼. 바빠.’






‘공부보다 네 편 만드는 게 더 중요해.’








늘 공부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다른 엄마들과 다른 소리를 하는 이유를 희민은 알고 있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오랫동안 옆에 있어 주지 못하는 서희가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희민을 걱정해서 그런 말을 했다는 걸.






희민은 서희와 함께하는 미래를 위해 열심히 공부한 거지만, 서희는 자신이 없는 미래에 희민과 함께해 줄 남자를 원했다. 


비록 일찍 죽어 버렸지만 남편이 자신 삶에 얼마나 큰 힘이 되어 줬는지를 항상 얘기하며.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남자들과 연애를 한 것도 서희 영향이 컸다.








‘드디어 남자 친구가 생겼어? 어때? 착하니? 너한테 잘해 줘?’








남자 친구가 생겼다고 하면 서희는 무척 기뻐하며 이것저것 물었다. 


특히 얼마나 잘해 주는지를 궁금해했다. 


자신의 빈자리를 잘 채워 줄 상냥한 사람을 만나기를 서희는 늘 바랐다. 


헤어졌다고 하면 실망할까 봐 헤어진 뒤 한참 뒤에나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노력과 달리 늘 연애는 잘되지 않았다.






처음 만날 땐 서희가 원하는 대로 지극정성이던 남자들은 금세 변하곤 했다. 


똑같은 일을 몇 번 겪고는 더 이상 연애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연애라는 건 공부나 일처럼 자신의 노력만으로 되는 건 아니었다. 반복할수록 지치고 상처만 남았다.


그래서 일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으로 희민은 성공했지만 서희는 성공한 딸보다 오히려 남자 친구를 만날 때에 더 기뻐했다. 


그게 한때는 서운하기도 했다. 


자신의 노력과는 다른 걸 바라는 서희가 야속했지만 혼자 남게 될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을 알기에 이해하기로 했다.






상념에 빠진 채 병원을 나온 희민은 차를 몰고 한강으로 갔다. 밤이 다 된 시간이라 사위가 어둑어둑했다.






끼익.






약속된 주차장 칸에 차를 세우자 먼저 주차된 옆 차에서 남자가 나왔다. 


모자를 깊이 눌러쓴 남자는 자연스럽게 희민의 차 조수석으로 올랐다.

, , , , , , , , , , ,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