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21장(2)
짐승 계약 #21장(2)
“익숙해져. 그래도 돼.”
매혹적인 눈동자가 타오르듯 빛나고 있었다. 그 눈을 희민이 가만히 응시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감정은 나약한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요.”
작게 꺼내는 말을 정혁이 주의 깊게 들었다.
“스스로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나약한 사람만 그런 거라고.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소중한 사람이라 해도 절대 의지하면 안 된다고.”
“…….”
“그런데 지금, 당신이 있어서 너무 안심이 돼요.”
희민의 눈동자에 촉촉하게 물기가 번졌다.
“이 모든 슬픔과 배신감을 혼자 느끼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당신이 옆에 있어 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정혁 씨가 지켜봐 줬다는 걸 아니까 너무, 안심이 돼요.”
솔직하게 말한 그녀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이며 빛났다.
그 얼굴을 눈을 떼지 못하고 보고 있던 정혁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젖은 속눈썹을 입술로 눌렀다.
“나약해서가 아니야.”
입술을 떼어 낸 정혁이 가까이에서 시선을 맞췄다.
“사랑해서야. ……그건.”
낮게 속삭인 그가 다른 쪽 눈에도 부드럽게 키스했다. 희민의 속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입술로 삼킨 정혁이 그녀의 작은 손을 힘주어 잡았다.
“사랑하니까 의지할 수 있는 거고.”
“…….”
지금 그의 말이 그녀에겐 구원과 같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진 희민은 콧잔등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제 손을 잡고 있는 정혁의 커다란 손이 보였다.
울컥 차오른 눈물 때문에 목구멍이 조여들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그에게 고맙고 또 고마운 마음이었다.
요즘 정혁과 함께 있을 때 자신이 어린애 같아진다는 생각이 들고는 했다.
자꾸 의지하려는 마음을 느낄 때마다 나약해지는 것만 같아 겁이 났었다. 하지만 방금 그의 말을 듣고 사랑이 그렇게 만든 거라는 걸 깨달았다.
사랑하니까 믿을 수 있는 거고, 사랑하니까 약해져도 괜찮은 거라고. 의지해도 괜찮은 거라고. 더는 혼자 아등바등 버티지 않아도 되는 거라고.
희민의 하얀 얼굴에 조용히 흘러내리는 눈물을 정혁이 말없이 닦아 줬다.
한동안 그대로 손만 내려다보고 있던 희민은 눈물을 털어 내다 뒷좌석에 정혁이 내려놓은 자신의 가방과 쇼핑백을 확인했다.
“……아, 맞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는 듯 코맹맹이 소리로 말한 희민이 팔을 뻗어 쇼핑백을 들어 올렸다.
“크리스마스 때 주려고 했는데, 이왕 들킨 거 지금 줄게요.”
희민이 쇼핑백을 정혁에게 내밀었다. 그걸 본 그의 눈에 의외감이 어렸다.
“나에게?”
“네. 정혁 씨 생일도 못 챙기고 넘어가 버려서 크리스마스 선물은 꼭 주고 싶었거든요.”
“…….”
그녀가 말간 미소를 지어 보이자 정혁이 굳은 얼굴로 쳐다봤다. 바라보기만 할 뿐 미동도 하지 않자 희민이 의아하게 바라봤다.
“열어 봐요. 어서.”
채근하듯 하는 말에 그제야 그의 얼굴이 쇼핑백으로 향했다.
느릿한 움직임으로 천천히 포장된 선물을 꺼내 내용물을 확인하자 심플한 디자인의 반지가 들어 있었다.
“당신이 해 준 것처럼 비싼 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꼭 끼고 다녀야 해요. 안 그래도 잘생긴 남자가 빈손으로 다니면 다른 여자들이 탐낼 거 아니에요.”
“…….”
희민이 웃으며 하는 말에도 정혁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가 케이스를 연 순간부터 심각한 얼굴로 반지에만 시선을 박고 있자 희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취향에 안 맞으면 다른 걸로…….”
난처하게 말하는 희민의 얼굴을 잡아 올린 정혁이 그대로 거칠게 입술을 삼켰다.
숨결이 턱 막힐 만큼 급작스럽게 입술을 삼킨 그가 짐승처럼 혀를 빨아 올렸다.
애무하듯 진하게 혀를 얽어 대며 타액을 빨아 삼키자 희민의 숨이 금세 달아올랐다.
“하읍, 정혁…… 으음.”
거친 숨결이 입술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가 낮게 헐떡이며 말캉한 혀를 휘감아 질척하게 빨았다.
순식간에 입술이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 정도로 사납게 키스한 그가 탁한 호흡을 내뱉었다.
“……후.”
흐트러진 숨을 진정시키지도 못하고 그대로 시선을 옭아맨 정혁의 눈동자가 뜨겁게 일렁였다.
“감동했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한 그가 희민의 얼굴을 두 손으로 잡고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진심이야. 고마워.”
감동받은 듯 살짝 떨리는 허스키한 목소리에 희민의 콧등이 다시 시큰거렸다.
그가 준 선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임에도 목소리가 떨릴 정도로 감동을 받다니. 고작 크리스마스 선물 하나에 이렇게나 고마워하는 그를 보니 왜 진작 선물하지 않았을까 후회가 될 정도였다.
“직접 끼워 주겠어?”
정혁이 제 손가락을 내밀었다. 희민은 살짝 달아오른 뺨을 내리고 반지를 꺼내 그의 손가락에 끼웠다.
나름 고민하고 정한 사이즈였는데 다행히 딱 맞았다.
“잘 어울려요. ……다행이다.”
적당히 심플하지만 고급스러운 반지가 그의 손가락에 잘 어울려서 희민이 미소 지었다.
그런 그녀의 뺨에 고개 숙여 베이비 키스를 한 정혁이 입술을 옮겨 귓불을 핥으며 속삭였다.
“항상 끼고 다닐게.”
그의 낮은 목소리가 희민의 귓속으로 잔잔하게 흘러들어 왔다.
이날부터 정혁의 손가락엔 늘 그녀의 소유라는 증거가 반짝였다.
혹여나 잃어버릴세라 소중히 대하는 그의 모습을 볼 때마다 희민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
벌컥!
집무실 문이 급작스럽게 열리자 지윤이 흠칫 놀랐다. 문 앞에는 숨을 헐떡거리는 석호가 서 있었다.
“이 시간에 갑자기 회사로 찾아오면 어떡해?”
지윤이 얼굴을 구기는데 석호가 핏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미, 미안. 들켜 버렸어.”
짜증을 내던 지윤이 그의 말에 순간 표정을 바꿨다.
“들키다니? 한희민에게?”
석호에게 빠르게 걸어가며 지윤이 물었다. 그는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머리칼을 연신 쓸어 넘기고 있었다.
실수할 때마다 보이는 습관에 지윤은 초조해졌다.
“어. 너에게 들은 말을 희민 씨가 했다고 착각해 버려서 말실수를 해 버렸어.”
“정말?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일의 심각함을 깨달은 지윤이 표정을 굳히고 석호를 채근했다.
“그걸로 날 의심하기에 도망쳐서 여기로 온 거야.”
“뭐?!”
지윤이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거기서 우겼어야지, 바보같이 도망쳐 나온 거야?”
“미안해. 지윤아……. 너무 당황해 버렸어. 너, 너도 알잖아. 희민 씨 기억력 좋은 거.”
석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 모습을 한심하게 보며 지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바보같이 정말.”
답답한 얼굴로 혀를 찬 지윤이 석호의 등을 문 쪽으로 밀었다.
“일단 돌아가. 회사로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요, 용서해 줄 거지? 이 일로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다급한 목소리로 석호가 애원하자 지윤이 짜증 난다는 듯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이따가 퇴근하고 말해. 여기 보는 눈이 한둘도 아닌데 미쳤다고 날 찾아와? 어서 나가.”
“아…… 그, 그래.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나가서 기다릴게.”
“집에 가 있어. 근처에서 기다리지 말고.”
“응. 기다릴게.”
석호가 우물쭈물하며 집무실을 나갔다. 가슴 위에서 팔짱을 낀 채 그 모습을 쏘아보고 있던 지윤이 문이 닫히자 신경질적으로 돌아섰다.
“더 캐낼 수 있었는데 멍청하게 굴어선 진짜…….”
지윤이 눈썹을 찌푸리고 한숨을 내뱉었다.
우선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해 봐야 했다. 황
석호는 처음부터 한희민의 동기라는 걸 알고 지윤이 접근한 거였다.
석호는 그 아둔하고 멍청한 성격답게 자신의 유혹에 쉽게 넘어왔고 시키는 대로 한희민의 정보를 캐내 왔다.
바보 같은 한희민은 석호를 진심으로 믿은 모양인지 자신이 저지른 일을 캐내는 정보원 역할로 석호를 의지했다.
그 모든 이야기가 저를 망친 사람에게 들어갈지도 모르고.
어차피 그 일을 벌인 게 자기인 걸 눈치챈 마당에 한희민도 지금은 석호가 누구와 연관됐는지 뻔히 알 거였다.
‘그렇다 해도 한희민이 할 수 있는 건 없겠지. 지금도 아무것도 못 하고 있듯이.’
지윤의 입술이 차가운 미소로 비틀렸다.
“이게 바로 권력이라는 거야. 한희민.”
넌 앞으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게 이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고.
빠르게 생각을 정리하자 일그러졌던 지윤의 얼굴이 한층 환해졌다.
다시 책상 쪽으로 향하는데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
메시지 알림 소리를 듣고 책상 위에 올려 뒀던 휴대폰을 집어 든 지윤이 내용을 확인했다.
“……!”
지윤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를 악문 그녀가 휴대폰을 움켜쥐고 걸어 뒀던 코트를 낚아챘다.
그러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급히 빠져나갔다.
***
퍽!
벽에 던져진 지윤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을 표정 변화 없이 보고 있던 문태진이 자신 앞에 떨어져 있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깨진 액정엔 그와 다른 여자가 침대 위에서 함께 찍은 사진이 떠 있었다.
“언제까지 이런 거 수습하고 다니게 할 거야?”
지윤이 눈을 부릅뜨고 씹어 내뱉듯 말했지만 태진은 별다른 동요 없이 휴대폰을 소파 위로 툭 던졌다.
“네가 수습할 거 없다고 하지 않았나? 놔두면 내가 알아서 해.”
“다 퍼져 나간 다음에? 우리 약혼한 사이인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 있어? 니가 이딴 식으로 놀아나면 내 얼굴이 대체 뭐가 되냐고!”
악을 쓰는 지윤의 얼굴이 볼품없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을 태진은 익숙하게 쳐다봤다.
“그 약혼 니가 원해서 한 거잖아.”
“뭐?”
지윤이 눈을 치켜떴다. 분노가 치밀어 꽉 쥔 그녀의 주먹이 파들파들 떨리고 있었다. 거칠어진 숨을 들이켜며 그녀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라고 좋아서 했어?”
표독스럽게 노려보는 지윤을 태진이 건조하게 쳐다봤다.
일말의 감정도 없는 그의 그 눈을 볼 때마다 지윤은 짜증이 치밀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움켜쥔 그녀의 주먹에서 터질 듯 핏대가 도드라졌다.
“그래. 너나 나나 좋아서 약혼한 사람 없다 치자. 그래 봤자 어차피 이쪽 바닥에서 좋아서 약혼하고 결혼하는 사람 없잖아.”
“그래서 이렇게 놀아나는 거야?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억울하면 너도 만나.”
대수롭지 않게 하는 말에 지윤이 멈칫거렸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태진이 그녀의 옆을 지나치려다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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