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6 )

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6 )

M 망가조아 0 1332

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 (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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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장,  창살 없는 감옥.






순애가 역 개찰구를 빠져나오자 김 기사가 달려와 허리를 굽힌다. 그는 순애의 양쪽 손을 번갈아 내려보며 짐이 없느냐고 물었다.


순애가 고개를 끄덕이자 "어서, 차에 오르시죠. 사모님"하고는 주차장으로 앞질러 뛰어간다.




“집에는 별고 없지요?”




“네, 사모님.”




“은비는요?”




“지금, 놀이방에 있을 시간입니다”




승용차가 시내 중심가를 빠져나와 외곽 도로 초입에 다다르자, 오른쪽으로 아파트 단지가 퇴락한 옛집들을 내려다보며 거호(거드름을 피우며 남을 낮춰보는)하게 솟아 있고, 왼쪽 야트막한 산 중턱에는 우거진 숲 사이로 고급 주택들이 듬성듬성 박혀, 마치 신세계의 그림 같은 마을을 보는 것 같았다.




순애가 대문을 들어서자 가정부가 달려 나왔다.


현관으로 들어선 순애는 거실에 눈길만 잠깐 주고는 바로 2층으로 향한다.




“식사 준비할까요, 사모님”




“생각 없어요. 나 좀 누워있을 테니까, 혹시라도 사장님 전화 오면 알려줘요”




순애는 침실에 들어서자마자 커튼부터 열어젖혔다.




커다란 전망창은 곧 대형 스크린이 되어, 멀고 가까운 전경이 한꺼번에 펼쳐진다.


가깝게는 잘 다듬어진 정원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고, 멀리는 아파트 단지서부터 그 너머로 철로와 굽이굽이 이어진 산 능선과 구름의 무리가 마치 구색을 갖추려는 듯 하늘가에 떠 있어, 잘 구성된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했다.




사백여 평의 넓은 정원이 다소 인위적이긴 하지만 나름대로 아름다운 조형미를 이루고 있다.


곧 담장을 뒤덮게 될 개나리와 진달래, 그리고 장미 넝쿨이 꽃을 피우면 그 조화가 더 눈이 부실 것이다.




듬성듬성 누워 있는 자연석을 굽어보며 목련, 산수유, 후박, 단풍들과 갖가지 상록수들이 사이좋게 어우러진 모습 하며, 한쪽 작은 연못에서는 각종 붕어가 노닐고 있다.


늘 바라보는 풍경이면서도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풍광들.




순애는 침대로 가 쓰러지듯 누웠다. 눈을 감자 피로가 전신으로 번져 몸이 허공에 붕 떠 있는 느낌이었다.




친정어머니를 병원에 눕혀놓고 서둘러 떠나온 순애.




오랜 시간을 앓다가 암 판정받았으니 그리 길게 살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이 당신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그래도 자식이라곤 달랑 딸 하나뿐이어서 순애는 생각할수록 안타까웠다.




순애는 자신도 모르게 도리질하며, 물러서지 않는 어두운 환영을 애써 지우려 했다. 그러나 그건 안간힘일 뿐, 서랍을 열어 신경안정제 한 알을 꺼내 삼켜야만 했다.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눈을 떴다. 신경안정제 약효에 잠에 빠져 있었던 모양이다. 은비가 침대 옆에 서 있다.


이때, 개가 짖어대고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비가 깡충거리며 창으로 달려간다.




순애는 서둘러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쇼핑백을 두 개나 들고 현관을 넘어선 미진이, 뭐라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고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찬바람이 꼬리로 남아 있다. 가끔 있는 일이어서 특별히 마음 쓸 필요는 없다. 그런데도 번번이 순애는 민망하고 불편했다.




순애는 커피 한 잔을 타 가지고 2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저녁 준비하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 가정부가 있으니 굳이 주방에 눌러있을 필요는 없었다.


커피 한 모금을 삼키고는 창가로 다가가 다시 풍경 속으로 다가섰다.




오래지 않아 풍경의 한가운데 그 자리에 유 일영이 서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인가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다가섰다가는 멀어지고 다가섰다가는 멀어지기를 반복한다.


순애는 그가 분노하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증오하고 있다는 게 분명하다고 느꼈다.




"미안해요. 정말."




순애는 재빨리 등을 돌려 커다란 창가에서 벗어나려 했다.




추억이란 굳이 떠올리지 않아도 바람에 실려 오는 어떤 향기처럼 불쑥 나타난다. 애써 지우려고 해도, 쉽게 사라지지 않아, 그 스스로 물러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건 행복했든, 불행했든, 아름다운 추억이든, 씁쓸했던 기억이든 마찬가지였다.


순애한테 유 일영은 그런 존재였다.




때로는 가슴속이 미어질 만큼 괴로워, 너무도 벅찬 적이 많았지만, 대개는 애틋함이다. 그래서 더욱더 미안하고 그에게 죄스러워 자책감에 빠지곤 했다.




순애가 한 때는 남편이었던 유 일영을 두고 말없이 사라졌던 이유는, 순전히 현실적인 이해타산에 여자의 속성이 편승한 것만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한마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에게서 도망치듯 잠적해 버린 것은, 유 일영에게는 너무나 가혹한 행위였음을 잘 알고 있어서 순애는 이곳 산인에서 숨죽여 눌러사는 중이었다.


그 어떤 말벗도 없이 오로지 평수 넓은 저택에서 아래층과 위층만을 오르내리며 시간 속을 허우적거리고 있다.




모든 것이 풍요하고 자유로운 특별한 감옥, 순애는 그렇게 생각하며 이 공간에서 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린다. 남편의 전화다.


언제 왔느냐, 병세는 어떠냐 하는 물음과 저녁에 모임이 있어 늦겠다는 말뿐이었다.




순애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아직도 풍경 속에는, 뭐라고 분노의 외침을, 증오하는 표정으로 외쳐대는 유 일영이 서 있었다.


순애는 얼른 커튼을 당겨 그 모습을 지워버리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 * * *




역에 도착한 기차는 종착지의 승객들을 옆구리로 꾸역꾸역 내보내고 있다.


나도 그들 무리에 섞여 내몰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넓은 광장을 스멀스멀 기어 다녀, 마치 얇은 수막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방금 도착했음을 문현구에게 전하자 자신의 오피스텔 위치를 알려주었다.


열차에서 내린 승객들이 앞을 다투어 택시 승강장으로 몰려들었다.




오피스텔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문현구는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며 나귀처럼 이를 드러냈다.




니코틴이 잇새에 누렇게 끼어 있는 것을 보고 하루에 담배를 세 갑씩 피워댄다는 그의 말이 사실임을 단박에 깨달았다. 실내에 안개처럼 자욱하게 떠 있는 담배 연기 만으로도 금세 알 수 있었다.






“어서 와, 어려운 걸음 했구먼.”




“메일로 보내면 될걸. 초고는 다 된 거야?”




“다 됐으니 보자고 했지, 네 얼굴도 보고 싶구. 일부러 오라고 한 거야”




“건강은 좀 어때? 다리는 괜찮아?”




“그렇지 뭐. 그건 그렇고, 오랜만에 일영이 왔으니 우리 회포나 풀자. 나가서 술이나 실컷 마시자고.”




그는 내 생각은 묻지도 않고 서둘러 옷부터 꿰어 입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기우뚱거리는 모습이 새삼 안쓰러웠다.




학창 시절,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여 학생운동에 적극적이었던 문현구는 언젠가 공권력과의 심한 몸싸움에서 다리를 다쳤었다.


신체적인 열등감은 가끔 자학 증세로 이어지기도 했지만, 문학에 대한 열정으로 문현구는 이를 극복하고 있었다. 그는 성취욕이 강해 재학 중에 이미 신춘문예로 등단을 할 만큼 재원이었다.




요즈음은 남의 자서전이나 사사(社史) 따위를 대필해 주는 일에도 손을 대고 있는 그는 나보다는 세 살이나 많은 자라난 동네의 선배 형이다.


이렇게 문현구를 만나러 오게 된 동기는 오래전 내가 부탁한 청탁을 그가 흔쾌히 받아주었기 때문이다.


그 청탁은 나와 순애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 이름하여 "아내와 나의 머나먼 여정"이란 타이틀의 야한 소설 집필이었다.




문 선배가 나를 데리고 간 곳은 해변에 있는 생선 횟집. 검푸른 바다를 보니 꽉 막힌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으로 조금은 상쾌했다.


몇 쌍의 젊은 남녀들만이 거닐고 있을 뿐 바닷가는 한적해 보였다.


고요를 흔드는 파도 소리, 햇살이 쏟아지는 바다 표면은 마치 은빛 물고기 떼들이 일제히 수면으로 떠 오른 것처럼 눈부시게 반짝이고 있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늙은이의 등처럼 굽은 긴 해안을 따라 물거품을 하얗게 피워올리고 있는 파도에만 나는 눈길을 주었다. 거기에 순애가 긴 머리를 흩날리며 거닐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현구가 담배를 권하며 내 눈치를 살핀다.




이미 우리들의 관계를 알고 있으니 내가 어떤 생각에 빠져 있는지, 내 가슴속이 어떠한지 그도 충분히 헤아리고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생각은 무슨. 그냥, 바다를 보니까, 상쾌해서 그래”




“그게 아니라, 순애 씨 생각했겠지. 여기에도 함께 왔었다면서?”




“으응, 그런 적이 있었지”




“이젠 그만, 잊을 때도 됐잖아. 벌써 몇 년이야?”




술과 함께 주문한 생선회가 나왔다. 나는 술병을 기울이며.




“문 선배. 실은 나. 순애를 봤어.”




“무슨 소리야? 순애 씨를 봤다니. 언제?”




“...오늘”




“뭐? 지금 소설 쓰고 있어? 좀 자세하게 말해봐”




“만난 게 아니고, 그냥 보기만 했어.”




나는 산인역 플랫폼에서 그녀를 발견한 상황을 짤막하게 전해주었다.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이냐. 혹시, 착각해서 허상을 잘 못 본 거 아냐?”




“아냐, 순애가 분명했어.”




나는 다시금 플랫폼에서의 정황을 반추하며 순애가 정말 산인에 붙박여 사는지, 아니면 잠깐 다니러 그곳에서 내렸는지 어떤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어떠한 결론도 낼 수가 없었다.




만약 거기에 상주한다고 해도, 그 큰 도시에서 무슨 수로 어떻게 순애를 찾아내고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는가. 그리고 만약에 해후할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이미 나를 버리고 간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몸이라면.




그러나 믿고 싶었다.


내 가슴속은 이미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또 찢겨 있었지만, 순애는 절대 그럴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지만 왜, 왜 그날 그렇게 내 눈앞에서 뒷모습을 보인 후 배를 타고 떠나간 뒤,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는지 그 이유는 알아야 했다.


그녀 나름대로 피치 못할 어떤 곡절이 있었겠지만, 결코 그렇게 헤어질 수는 없었다.




“만약에 무슨 일이 있어 산인역에서 내린 거라면 아직 항도(부산) 어딘가에 있다는 건데, 내가 학교에서 나온 후에 얼마나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는지 문 선배도 알잖아.




근데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구.”




“그 사정이야 나도 들어서 알지만, 어디 그 바닥이 웬만큼 넓어야지. 어쨌든, 순애 씨는 순둥이 같은 겉모습과는 달리 매정하고 독한 여자야. 자아, 술이나 마시자구.”




“으음. 그래, 탈고 축하해. 문 선배”




“뭘, 이제 1부 끝낸걸. 아무튼 고마워.”




“그게 어딘데. 나 같은 사람은 죽었다 깨어나도 그런 글 쓰지 못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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