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의 노예 - 26
오빠의 노예 - 26
“어머니? 어머니? 네가 정말 날 어머니로 생각했다면 세상이 뒤집히는 이런 짓은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설령 마음이 동했다고 해도 접었어야지. 정말 네가 날 어머니로 생각했다면 그랬어야 했다.”
안 회장은 이를 악문 채 뒤를 돌아서 아들 앞에 서서 결국 분통을 터뜨렸다.
“어머니로서 존경하고 좋아합니다. 지금껏 절 내치지 않고 가족으로 받아 주신 점도 은혜를 잊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거짓말. 그 말이 진심이라면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아? 넌 내 세상을 한 번 무너뜨렸어. 두 번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아니, 지금이라도 마음 접어. 내 말 들어. 절대로 안 될 말이야.
법이고 뭐고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영아는 가족이고 다른 식으로는 다르게 받아들일 생각은 천지가 개벽해도 절대 허락 못 한다.
이 이야기는 나만 아는 걸로 해. 영아 아빠한테는 입도 벙긋하지 마라. 분명히 말하는데 만약 그 사람이 알게 된다면 난 이 가족관계를 끝낼 거다.
그래도 내 경고를 무시하고 네가 얼마나 이기적인지 보여주고 싶다면 그렇게 해. 아, 더 이상 어떤 변명도 하지 마. 난 내 의견을 분명히 했고, 더 이상 여지는 없어. 흑과 백처럼 너무나 분명한 결론이니까. 그만 가봐라.”
Rrrrrrrrrrrrrrrrr. Rrrrrrrrrrrrrrrrr.
안 회장은 걸려온 업무상 전화를 받으며 태욱을 먼지처럼 털어냈다.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아들이 나가고 나서도 앞이 캄캄하면서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버렸다. 어떻게 통화를 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결국 혼자 남게 되자 안 회장은 머리를 감싸 쥔 채 힘없이 소파에 몸을 묻었다.
어떻게 이렇게 둔했던가. 돌이켜 보니 그 모든 게 다 보였는데. 눈뜬장님이었다. 그 둔함 때문에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을 지경에 이르렀다.
그건 그녀의 결벽증 같은 성격 탓이었다. 한 번도 부모님 뜻을 거스른 적도 없는 착실한 딸이었던 안 회장이었다. 잘못된 길은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모두가 안 회장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적어도 가족은 그럴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태욱이 다시 그녀의 삶에 두 번째 파장을 일으켰다. 벼락을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더니! 옛말은 틀리지 않았다. 명심해야 했는데.
태욱은 회장실을 빠져나와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는 폭격이라도 맞은 듯 엉망이 된 상태였다. 따지고 보면 폭탄은 그가 터뜨렸는데 애써 떨쳐 버렸던 죄책감이 다시 그를 뒤흔들었다.
짐작했던 바였다. 모친이 얼마나 노발대발할지는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부딪히니 넘어야 할 벽이 얼마나 견고한지 새삼 깨달았다.
무엇보다 모친의 상처가 너무나 잘 보여서 더 힘들었다. 하지만 영아를 포기하는 건 단순히 힘든 게 아니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살고 싶지도 않았다.
자살행위를 하기에는 그는 아직도 희망을 놓기 싫었다. 이미 해봤으니 다시는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래서 모친이 경고대로 한다면 행복은커녕 소중한 모든 사람이 산산조각 나서 상흔 가득한 재만 남을 것이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내리는 사람을 멍하니 보고 있던 그는 그녀가 누군지 인식했다. 그는 유진의 손목을 끌고 가까운 비상구를 데리고 갔다.
“무슨 작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그게 맞다면 그만둬. 이미 이실직고 했으니 가서 불난 데 부채질은 하지 마. 어머니 지금 너까지 감당할 상태가 아니니까.”
그를 의심스럽게 보던 유진은 곧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듯 고소한 미소를 지었다.
“꼴 좋네. 나한테 들켰을 때는 그렇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잘난 척 당당하더니. 천하의 마태욱도 가족이 약점이긴 하나 봐.”
“안 바빠?”
신나게 뇌까리던 유진은 한심하다는 듯한 그의 질문에 이를 갈았다.
“바빠. 하지만 내가 너한테 맺힌 게 많잖아.”
“뭐가? 잊었나 본데 우리 관계에 종지부를 찍은 건 너야.”
“나쁜 놈! 실질적으로는 그 반대잖아. 시작부터 나 혼자 하고 나 혼자 끝냈으니까.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건 넌 나한테 철저히 무심했다는 거야. 넌 나랑 같이 잠도 안 자고 바쁘다는 핑계로 잘 만나 주지도 않았잖아. 그러다 어쩌다 술이 들어가면 굶주린 짐승한테 뼈다귀를 던져 주듯 날 상대해 줬지. 그것도 모르고 난 껍데기만 가지고 좋아서 어쩔 줄 몰랐어.
처음엔 그랬어. 근데 네 생일에 심하게 몸살을 앓았을 때 영아, 하고 여동생 이름을 불렀잖아. 단순히 여동생을 부른다고 하기에는 너무 애달프게 불러서 그냥 넘어가기 힘들었거든.”
그제야 태욱은 왜 그날 그렇게 유진이 여동생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 넌 내 질문에 신경질적으로 대응해서 더 의심을 키웠지. 게다가 전에 같이 밥을 먹었을 때 네가 여동생을 어떻게 쳐다봤는지 떠올리니 느낌이 싸하더라. 하지만 그건 너무 말이 안 되고 너처럼 완벽주의자가 그런 비이성적인 관계에 빠졌다는 걸 믿기가 힘들었어.
결국 너한테 회의감이 들어서 끝내자고 했지만. 난 그래도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자 할 줄 알았어. 네가 무뚝뚝하고 무신경하게 구는 건 성격 탓일 수도 있다고 믿으려고 했으니까 그래도 끝내자고 하면 뭔가 노력해 볼지도 모른다고 나만큼 너한테 잘 어울리는 여자도 없다고 믿었으니까.
근데 넌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개인적인 연락은 일절 받지도, 하지도 않았잖아. 그렇게 외면당하고 난 후 시간이 지날수록 내 의심은 확신으로 굳어지면서 분해서 미칠 것 같았어. 하지만 이미 끝낸 사이고 확실한 증거도 없이 널 추궁할 수도 없었어. 구차하게 굴긴 싫었으니까.”
그는 유진이 모친을 찾아가는 것을 막기 위해 긴 하소연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차하게 굴긴 싫었다는 말에 실소가 절로 나왔다.
“그래서 한참 지난 후에 영아한테 교묘하게 독을 뿌렸어?”
“뭐야? 효과가 있었나 보네. 훗, 쓰러질 것처럼 핏기가 가신 네 여동생을 보니 오빠 전 여친 이야기에 지나치게 집중한다 싶어 확신하기는 했어.”
“넌 뭔가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넌 진정으로 날 좋아한 게 아니야. 사랑은 더더구나 아니고. 넌 내 껍데기만 보고 욕심을 냈던 거지 너의 잘난 자만심을 만족시켜 준다 싶어서. 근데 만약 내가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에 보육원 출신이라면 과연 넌 나 하나만 보고 좋아했을까?”
유진은 처음부터 그의 배경에 대해 다 알고 접근했다. 성가실 정도로 노골적으로 말이다.
그녀는 그의 어린 시절이나 마태욱이라는 인간 자체에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눈을 빛내며 알고 싶었던 건 그의 가족이 가진 재산과 친구들한테 자랑할 수 있는 그의 배경과 외모였다. 하긴 그녀를 탓할 수도 없었다. 그에게 접근한 여자들은 하나같이 비슷한 이유였으니까.
“억지 부리지 마. 사람을 좋아하는 조건은 분명 배경이 안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그럼 넌 껍데기만 가졌던 것에 대해 이렇게 억울해할 자격은 없어. 그러니까, 이쯤 해서 과거는 잊어. 그게 널 위한 현명한 길이니까. 사실 네가 굳이 이러지 않아도 난 지금 벼랑 끝까지 몰렸으니까. 어머니는 만나지 마. 지금 찾아가 봐야 어머니한테 좋은 소리 못 들을 거야. 구차하게 보일 테니까.”
그는 지친 한숨을 쉬고는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갔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했다.
그에게 구멍은 영아였다.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너무 보고 싶어 심장이 아려 올 지경이었다.
일단 그녀에게 다 말하고 다시 길을 찾아봐야 했다. 그녀만 곁에 있으면 막막했던 가슴이 뚫릴 것 같았다. 그녀와 고통도 고민도 다 나누고 싶었다. 고통을 나누면 반이 되고 기쁨은 함께하면 배가 되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그의 편이니까.
***
영아는 거실을 서성거리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숨 푹 자고 일어났는데 태욱이 안 보여서 전화할까 하는 중이었다.
“오빠.”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그의 품으로 그녀가 뛰어들었다. 그가 와락 그녀를 끌어안았다. 마치 그가 너무 세게 안아서 이상했다. 그의 떨리는 숨결도 그녀의 의심을 부추겼다.
“혹시 부모님 만나고 오는 길인가요?”
그녀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물었다.
“어머니 만나고 오는 길이야.”
그녀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니, 그냥 철령이 아니라 심장이 무거운 바위에 짓눌리는 듯 숨을 쉴 수 없었다. 호흡이라도 하면 애써 망각했던 현실이 쓰나미처럼 덮칠 것 같았다.
“말해 봐요. 다. 남김없이. 알아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