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승 계약 #21장(1)

짐승 계약 #21장(1)

M 망가조아 0 1664

짐승 계약 #21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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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백화점에 들러 선물 포장을 마친 희민이 쇼핑백을 들고 매장을 나왔다. 백화점 안에는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세워져 있었고 밖에도 금빛과 은빛의 세련된 장식이 가득 걸려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매년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점점 덜해진다지만 희민에겐 오히려 처음 느끼는 설렘이 있었다.






‘크리스마스 선물도 다 사 보고.’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쇼핑백을 보며 희민의 얼굴에 하얀 미소가 걸렸다.






주차장에 도착한 희민이 가방과 쇼핑백을 조수석에 내려놓고 시동을 거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정혁 씬가?’






수시로 전화하는 그를 떠올린 희민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얼른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는데 액정엔 예상치 못한 석호의 이름이 떠 있었다.






“석호 씨?”






희민이 이어폰을 귀에 끼며 휴대폰을 거치대에 올렸다. 한동안 여러 가지 일들로 석호와 연락을 하지 못했다. 


몇 번 전화가 온 적은 있었지만 늘 무언가로 바쁜 상황이었고, 통화로 수다를 떨 정도의 관계도 아니기 때문에 빨리 끊고는 했다. 


무엇보다 자신과 정혁의 일들로 머릿속이 꽉 차 다른 일은 신경 쓰지 못했다.






“아, 희민 씨. 지금 어디야?




“나 지금 밖에 나와 있는데. 무슨 일인데?”






평소와 같은 안부 전화일 거라 생각했는데 대뜸 위치를 묻는 말에 희민이 되물었다.






“밖이야? 나 지금 희민 씨 집 앞에 와 있는데.






차를 주차 구역에서 빼내던 희민은 뜻밖의 소리에 휴대폰 액정으로 시선을 향했다.






“석호 씨가 우리 집 앞에 와있다고? 무슨 일로?”




“그냥 근처 왔다가 생각나서……. 혹시 많이 늦어?






급작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집 앞까지 왔다는 말에 희민은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20분 정도면 도착해.”






시간을 보며 희민이 대답하자 밝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다행이다. 헛걸음했나 했는데. 그럼 이 앞에 있는 카페에서 기다릴 테니 그쪽으로 오겠어? 시간 오래 안 뺏을 테니까 잠깐 차나 한잔 마시자.




“알았어. 그럴게.”






전화를 끊고 빙글빙글 돌아야 하는 주차장을 빠져나오며 희민은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석호 씨에게 내가 집을 말해 준 적이 있나?’






늘 밖에서 약속을 잡았었고 같은 부서에 있을 때도 집이 어딘지 말해 준 적은 없었다. 


집 근처에 같이 온 적도 없었기에 석호가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렸다.


혹시 예전에 찾아 달라고 했던 정보 중에 자신의 집 주소가 나온 일이 있나 싶어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이상하네…….’






기억을 계속 되짚으며 집으로 돌아왔지만 떠오르는 건 없었다. 


결국 포기한 희민은 백화점에서 산 쇼핑백을 들고 석호가 기다리고 있는 카페로 향했다.






“희민 씨. 여기.”






카페에 앉아 있던 석호가 그녀를 보며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만에 본 그에게서 별다른 점은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처럼 밝은 표정으로 앉아 있는 석호를 보며 인사한 희민은 우선 자신의 커피를 주문하기 위해 카운터로 향했다.






“백화점 갔다 오는 길이야?”






희민이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로 오자 그녀의 손에 들린 쇼핑백을 본 석호가 물었다.






“응. 살 게 있어서.”






가방과 쇼핑백을 옆 의자에 내려놓은 희민이 그와 마주 앉았다.






“갑자기 찾아와서 놀랐잖아. 무슨 일인데?”






목적이 있어서 여기까지 찾아왔을 거라 생각한 희민이 묻는 말에 석호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그냥 근처 왔다 들렀다니까. 요즘 희민 씨가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래서 걱정되기도 하고. 별일 없는 거지?”




“응. 별일 없어. 석호 씨도 잘 지냈어?”




“나야 항상 잘 지내지. 늘 그렇듯 무색무취 무탈한 삶이잖아.”




“그런 게 가장 좋은 거 아닌가. 평온하고.”






희민이 조용히 웃으며 말하자 석호가 안경테 위로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얼마나 재미없는 삶인데. 심심하기 짝이 없어.”






지루한 삶에 지친 사람처럼 그가 장난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희민이 마주 웃어 주자 그도 싱긋 웃으며 커피 잔을 들어 입술로 가져갔다. 


석호가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며 잠시 생각하던 희민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말을 꺼냈다.






“그런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 난 말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어…… 어?”






순간 석호는 필요 이상으로 당황하는 걸로 보였다. 희민이 이상함을 느끼는데 곧 그가 웃으며 말했다.






“전에 말한 적 있잖아. 기억 안 나?”




“그랬나?”




“그래. 그때 그…… 언제더라? 같이 일할 때.”






적어도 희민의 기억에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방금 전 석호의 무척 당황한 얼굴이 신경 쓰여 더 말하지 않으려는데 마침 주문한 아메리카노가 나왔다.






“주말엔 뭐 해?”






석호가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는 게 느껴졌지만 희민은 조용히 따랐다.






“일이 있어.”






주말은 마침 크리스마스였고 정혁과 약속이 있었다.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는 없어 희민이 간단하게 대답하자 석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 클래스 가는 거야? 열심이네. 뭐든 열심히 하는 게 희민 씨답고.”




“…….”






순간 희민의 얼굴이 굳었다.






아까부터 복기하던 그녀의 머릿속이 빠르게 기억들을 꺼내 놓기 시작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그런 거액을 대체 어떻게 구한 거야? 변호사들은 다 어떻게 한 거고.’




‘혹시 무슨…… 위험한 일 같은 거 한 건 아니지?’




‘그런데 소문 물어보는 거 보면 누가 그랬는지 찾으려는 거야?’




‘어떻게 나오게 된 건지 말해 줄 수 있어?’




‘누가 도와준 것 같긴 한데 혹시…….’








의심하지 못했던, 아무렇지도 않게 흘렸던 대화들 중 자신에 대해 캐묻는 대화들이 송곳처럼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희민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종종 생각한다. 이 좋은 기억력이 축복일까. 아니면 저주일까.'






“당분간은 클래스 다니면서 지내려고?”






희민의 표정을 보지 못한 듯 석호는 자기 말만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대본을 읽는 연기자 같다는 생각이 이제야 들었다.






“꽃집 열고 그럴 건 아니지? 어쨌든 그냥 취미로 배우는 거니까 좀 쉬다가 다른 일…….”




“석호 씨.”




“응?”






석호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 얼굴을 희민이 가만히 바라보자 그녀의 시선을 이상하게 생각한 그가 안경을 고쳐 썼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의 얼굴을 주시하며 희민이 물었다.






“나 클래스 다니는 건 어떻게 알았어?”




“어? 아, 전에 희민 씨가…….”




“난 석호 씨에게 말한 적이 없는데.”






희민이 표정을 바꾸지 않고 말하자 석호의 얼굴에 방금 전과 똑같은 당황이 떠올랐다.






“에이. 무슨 소리야? 희민 씨가 분명 나한테 말해 줬는데.”






그는 지금의 상황을 다시 웃음으로 무마시키려 했다. 하지만 희민은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난 말한 적 없어.”




“…….”






석호의 이마에 순식간에 땀이 배어났다. 희민은 흔들림 없이 그 얼굴을 마주 봤다.






“어떻게 안 거야?”






덜컹!






사색이 된 석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무 급하게 일어선 나머지 의자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아…… 저, 저기. 오해하진 말고 들어. 희민 씨.”






석호가 테이블 위의 자기 휴대폰을 들어 빠르게 코트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내가 갑자기 볼일이 생각나서 지, 지금 가 봐야 할 거 같거든. 너무 급한 일이라 일단 가 봐야 할 거 같아. 다음에, 다음에 다시 연락할게.”






식은땀이 맺힌 얼굴로 억지로 웃어 보인 석호가 그녀를 지나쳐 카페를 빠져나갔다. 


그 모든 행동을 표정 변화 없이 보고 있던 희민의 입술 새로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차라리 잘 숨기고 둘러댈 줄 아는 사람이라면 좋았을 텐데.’






유일하게 날 믿어 준 사람.






머릿속에 지금까지 석호를 신뢰해 왔던 이유가 떠올랐다. 그러자 희민의 얼굴에 쓴웃음이 번졌다.






‘그렇구나. 진짜로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던 거였어. 믿어 준 게 아니라.’






왜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을까. 어쩌면 그런 상황에서 날 믿어 준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일 수도 있었는데…….






쓴물처럼 올라오는 환멸감에 희민이 답답한 한숨을 뱉어 냈다. 순진하게 그저 저를 믿어 준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 모든 일들을 상담하고 정보를 빼내 달라고 부탁했던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희민이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는데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희민아.”






정혁의 목소리에 희민이 고개를 들었다. 멍해 있는 그녀를 마주 보며 정혁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에 갑자기 정신을 차린 듯 희민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그만 가자.”






황망히 묻는 희민를 일으킨 그가 한 손으로는 그녀의 손을 잡고 다른 손으로는 그녀의 짐을 들었다. 


앞장서서 카페를 나서는 정혁의 등을 희민이 눈을 깜빡이며 바라봤다. 


커다랗고 넓은 등이 언제부터인가 익숙하게 그녀의 시선 앞에 있었다. 그 모든 일에서 그녀를 지켜 주기 위한 든든한 방패처럼.






카페를 나서는 순간 희민은 문득 카페 안쪽을 쳐다봤다. 그


녀가 있던 자리 근처에 손님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그의 경호원이라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리고 카페를 나선 다음 골목 한쪽에서도 그의 경호원 한 명이 서 있는 걸 봤다. 


아까부터 주차되어 있던 차로 들어가는 경호원을 보자 방금까지 석호와 함께 있었던 자신에 대한 모든 보고가 정혁에게 들어갔다는 걸 깨달았다.






앞에 세워 둔 정혁의 차에 올라타자 희민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왜 말 안 해 줬어요?”






희민이 하는 말의 의미를 바로 알아챈 듯 정혁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까지 하나 보고 있었어.”




“석호 씨 만날 때마다 보고 있었어요? 경호원 시켜서 대화 다 듣고?”




“걱정됐으니까.”




“…….”






희민이 말없이 전방을 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정혁의 더 낮아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인내도 오늘이 마지막이었어. 만약 오늘 그쪽에서 들키지 않았다면 내가 알게 해 줬을 거야. 두 사람이 만나는 거 더는 못 봐.”






위험스럽게 낮아진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조용히 듣고 있던 희민이 긴 한숨을 토해 냈다.






“……하아.”




“실망했어?”






그녀의 한숨에 정혁이 긴장이 담긴 눈으로 쳐다봤다.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그를 씁쓸한 얼굴로 보며 희민이 입을 열었다.






“정혁 씨에게 실망한 게 아니라 나에게 실망했어요. 지금까지 저런 사람을 믿고 있었던 게 한심해서.”




“네 잘못이 아니야.”




“아니, 내 잘못이에요.”






희민이 무겁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를 정혁이 진지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었다.






“이런 내 모습을 진작부터 보였다는 게 창피한데…… 그런데 정혁 씨가 걱정돼서 계속 보고 있었다고 하니까 또 한편으로는 안심되기도 하고.”




“…….”




“이런 데 익숙해지면 안 되는데.”






희민이 시선을 내린 채 미간을 좁히자 정혁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으로 가져갔다. 그녀의 시선을 다시 자신 쪽으로 이끈 그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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