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위 포식자 - 1
최상위 포식자 - 1
먹이 사슬의 최상층에 있는 그 어떤 포식자도 벌레를 신경 쓰지는 않는다.
아무렇지 않게 짓밟고 지나가 버린다.
자신이 밟아 죽인 생명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말이다. 혹은 알지만 무시해 버리면서.
최상위 포식자인 설이현에게 있어서 자신은 그저 벌레 그 이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영주는 그를 처음 만난 오늘 벌써 깨달았다.
“아량이 넓어지셨나 보네요. 피도 섞이지 않았는데 자식으로 호적에도 올려 주시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가 입을 열어 그 말을 하는 순간 영주가 얼굴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설이현, 그의 자리는 설 회장이 앉은 자리에서 가장 가까웠고 영주의 자리는 식탁의 가장 끝자리였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식탁은 스무 명은 족히 앉을 수 있을 정도로 길었다.
실제로 그 식탁에 앉은 이들의 숫자는 열 명이 넘었다.
식탁의 상석에 앉은 남자는 이 식탁에 앉은 모든 이들의 아버지인 설태윤 회장. 그리고 그를 중심으로 식탁의 좌우에 앉아있는 이들은 전부 그의 자식들이다.
아들이 일곱 명, 딸이 네 명. 그렇게 열한 명의 자식 중 설 회장과 피가 섞이지 않은 것은 영주가 유일했다.
왜냐하면 영주의 엄마가 설 회장의 정부인 까닭이다.
설 회장이 자금 세탁용으로 사들인 미술품들을 관리하는 갤러리의 소장이 영주의 엄마였고, 영주는 친부가 누군지도 모른다.
술집에서 일했던 엄마는 꽤 여러 명의 남자와 잤었고 그중의 한 명이 영주의 생물학적 아버지겠지만 유전자 검사 따위는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영주는 술집 접대부의 딸로 태어나 자랐다.
엄마는 운이 좋게 손님 중에서 설 회장을 물었고, 그리고 엄마가 설 회장의 비자금 관리와 더불어서 그의 정부가 된 지 8년 만에 영주는 설 회장의 호적에 올랐다.
엄마가 그동안 집요하게 설 회장에게 조른 결과다. 그리고 영주는 오늘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다.
그들과 같이 호적에 오르긴 했지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의붓남매들은 절대로 제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영주도 잘 안다.
시선에서, 표정에서 자신을 향한 호의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 식탁에서 오직 자신만이 이방인이다.
어머니가 다르다고 해도 아버지 쪽의 피는 전부 같은 이들 속에 자신만이 덩그러니 이방인이다.
그리고 지금 그들 중에서 유일하게 본처의 아들인 설이현이 노골적으로 비아냥거렸다.
“잘 대해 주거라. 동생이라 생각하고.”
설 회장은 노구의 손을 떨어가며 겨우 수저를 들어 올렸다.
지난달 설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의 건강이 더 이상 그가 경영자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내려온 그 자리에 앉은 것이 설이현이다.
설 회장과 법적으로 혼인 신고를 한 이른바 본부인에게서 태어난 단 한 명의 아들이다.
그를 제외한 나머지 자식들은 전부 첩이라고 불리는 정부들에게서 태어났다.
설 회장의 호적에는 이름을 올렸지만, 감히 설이현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자격은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가 살아 계실 동안에는 노력 정도는 해 보겠습니다.”
설이현의 목소리에서 딱히 적의를 찾아볼 수는 없다.
적의, 경계, 그런 감정은 그의 눈에는 없다.
그의 눈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멸시뿐이다.
적의나 비난, 경계도 위협이 되거나 어느 정도 신경이 쓰일 때만 가지는 감정이다.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존재에게는 그런 감정조차 허비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발밑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에게 적의를 품거나 비난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저 발밑에서 기어 다니는 개미는 신경도 쓰지 않는 법이고, 모르는 사이에 밟아 죽일 수 있다.
지금 제 처지가 딱 그 개미라고 영주가 생각했다.
설이현은 최상위의 포식자이지만 자신은 개미처럼 하찮은 벌레다.
‘괜찮아. 어차피 나는 눈에 밟히지도 않을 테니까. 죽은 듯이 조용히 있으면 괜찮아.’
영주가 다시 조용히 수저를 움직였다.
중압감이 가득한 분위기라 음식이 자꾸 목에 걸렸다.
[회장님이 살면 얼마나 살겠니. 일 년? 이 년? 내일 돌아가셔도 이상하지 않은 연세야.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그땐 이 갤러리도 끝이고 나도 끝나.
설이현 그 인간이 제일 먼저 이 갤러리부터 정리할걸?
그러니까 호적에 네 이름을 올려서 적어도 유산 정도는 받아 내야지.
안 그래? 내가 회장님을 위해서 고생한 세월이 몇 년인데 그 정도 보상은 받아야지.]
영주가 이 집에 들어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엄마의 욕심 때문이다.
이해는 한다.
칠순 노인의 정부가 될 때 애정 같은 것이 있었을 리가 없다.
오직 돈, 그것 외에 다른 목적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물주였던 설 회장이 이제 죽을 날이 머지않아 보이니 엄마도 속이 타들어 갔을 것이 분명하다.
지금 엄마가 운영하는 갤러리의 미술 작품들은 모두 설 회장이 비자금을 세탁하는 용도로 사들인 것이다.
그 작품들의 진짜 주인은 엄마가 아닌 설 회장이다.
설 회장이 죽고 나면 엄마는 갤러리에서 빈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영주도 안다.
지금 사는 고급 빌라도, 하다 못해서 타고 다니는 승용차까지도 전부 설 회장이 차명으로 만들어 놓은 페이퍼 컴퍼니의 명의로 되어 있다.
몸뚱이 외에는 엄마의 소유로 등록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얼굴을 숙인 채로 넘어가지 않는 음식을 겨우 삼키는 사이에도 시선들이 느껴졌다.
설이현의 시선은 아니다.
설 회장의 다른 자식들의 시선일 것이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설이현과는 다르게 적의, 경계심, 또는 비웃음이 느껴졌다.
아마 그들은 피도 섞이지 않았으면서 이 자리에 앉아 그들 중의 일부가 되려고 하는 자신을 비웃고 조롱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이 받아야 할 지분의 일부를 가로채기 위해 이 집에 들어온 자신을 경계하거나 적의를 가지고 있으리라.
설이현보다 더 걱정해야 하는 이들은 아마 저들일 것이다.
‘뭔가 우습네…….’
정작 최상위의 포식자는 관심도 없는데 그 아래의 피식자들끼리 물고 뜯는 광경이 머릿속에 떠올라 영주의 입안에 쓴맛이 돌았다.
결국 설 회장이 죽기 직전까지 이 집 안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싸움이 아니라 피식자들끼리의 싸움이 될 거라는 예상 때문이었다.
***
“큐레이터라며?”
영주에게 제일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설주원이었다.
영주는 설 회장의 자식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습득하고 이 집에 들어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 바보처럼 무방비 상태로 들어온 것은 아니다.
순진한 십 대 소녀도 아니고 엄마의 욕심을 위한 아바타의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할 수 있도록 영주도 나름의 준비는 했다.
엄마의 욕심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 욕심에는 영주 자신의 욕심도 어느 정도는 섞여 있다.
애초에 엄마와 욕심과 자신을 분리하는 것이 우스웠다.
자신이 아무 고생 없이 대학원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엄마 때문이고, 정확히는 설 회장의 돈 때문이다.
자신이 노력해서 이루어 놓았다고 생각해 놓은 모든 것들은 모두 설 회장이라는 배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영주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설 회장의 죽음과 함께 그 배경이 사라지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 역시 인지하고 있다.
엄마가 빼앗기지 않으려는 갤러리는 영주 역시 빼앗기고 싶지 않다.
엄마에게 있어서 그 갤러리는 설 회장의 자금 세탁을 위한 미술품들을 모아 놓은 곳에 불과할지 몰라도 그곳에서 중학생부터 지금까지 시간을 보내온 영주에게 있어서는 애착의 공간이자 자신이 만들어가고 싶은 공간이다.
만약 자신에게 전권이 주어진다면 그 공간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키고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지 수십 번도 더 머릿속으로 설계해 봤다.
[나는 다른 건 필요 없어. 난 지금 사는 빌라와 평생 쓸 돈만 있으면 만족해. 이 갤러리는 네가 가져.]
실제로 엄마는 갤러리에는 관심이 없다.
갤러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작품들이 누구의 것인지 어떤 역사를 가졌는지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그것이 [얼마짜리]라는 것만 기억할 뿐이다.
어쩌면 엄마의 욕심과 자신의 욕심이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영주도 안다.
엄마도 자신도 둘 다 속물이다.
돈에 굴복하는 속물.
그래서 고고하게 굴 생각은 조금도 없다.
애초에 태생부터 고고한 것과는 거리가 머니 말이다.
“네.”
“고상한 직업이네.”
설주원은 어떻게 보면 설 회장의 장남이다.
가장 먼저 태어난 것으로 치면 장남이지만 정작 후계 서열에서는 설이현보다는 아래다.
설 회장의 첫 번째 첩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여사에게서 설주원은 태어났다.
그때 설 회장의 본부인인 최 여사와는 결혼도 하기 전이었고, 당시에 이 여사는 설 회장의 집에서 일하던 가정부였었다.
한참 매스컴에 설 회장의 결혼 이야기가 오르내리고 있을 때 이 여사는 어느 지방 병원에서 아무도 모르게 설주원을 낳았고 설주원이 설 회장의 아들로 호적에 올라갈 수 있었던 것은 설이현이 태어나고 나서도 10년이나 지난 후였다.
설이현보다는 세 살이나 많지만 설이현에게 머리를 숙여야 하는 남자다.
장남이지만 서자에게 있어서 장남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설이현에게 있어서 설주원은 영주 자신보다 급이 조금 더 높은 벌레? 고작 그 정도가 아닐까.
‘설주원. SC건설 사장.’
말이 좋아 사장이지 지분 하나 없는 사장이라는 것을 영주도 안다.
설 회장은 첩의 자식들에게 단 1%의 지분도 나눠 주지 않았다.
그 말은 다시 말해서 누구에게도 그의 경영권을 넘겨주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름만 사장이다.
지금은 경영에 참여해도 설 회장의 한마디면 사장 자리에서 내려와 평사원만도 못한 신세가 되어 버린다.
결국 설 회장의 자식들이 그에게 저항할 수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목숨줄이나 다름없는 돈줄을 꽉 움켜쥐고 있으니 누구도 감히 설 회장에게 반기를 들 수가 없다.
그런 것을 보면 설 회장에게 있어서 자식은 설이현 한 명밖에 없다는 말도 그럴듯하다.
나머지는 그냥 들러리, 혹은 설이현에게 마음껏 짓밟으라고 준 놀잇감에 지나지 않는다.
이 집에서 설 회장에게 감히 눈을 맞추고 제 생각을 거리낌 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설이현 한 명밖에 없다.
“여기, 낯설 거야. 무섭기도 할 거고.”
“차차 익숙해지겠지요.”
“겁이 없네.”
설주원이 픽 웃었다.
영주는 그의 친절을 믿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서 상냥하게 웃어도 그 웃는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진짜 얼굴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집에 들어올 때부터 영주는 아무도 믿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곳은 정글이고, 자신은 이 정글의 최약체 피식자다.
설 회장의 눈이든 설이현의 눈이든, 그 눈에 거슬리면 추방당하고 만다.
그러니까 존재감은 없이, 그러나 동정심을 살 수 있게 행동해야 한다.
불쌍하지만 위협은 되지 않는 존재, 그게 영주가 생각하는 자신의 포지션이다.
그래야만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필요한 거나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그리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 테니까. 우린 적이 아니라는 걸 명심해.”
적이 아니다. 정말 적이 아닐까?
“감사합니다.”
“오빠라고 불러도 돼.”
“지금은…….”
“아직 어색하지?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것이 서로 더 편하다는 걸 알게 될 거야.”
오빠라니.
피도 섞이지 않았고 오늘까지는 제 존재도 몰랐을 사람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용건이 다 끝나셨으면 이제 방에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가.”
“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영주가 제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닫을 때까지도 설주원은 그곳에 서 있었다.
웃고 있는 그 눈 때문에 영주의 등이 오싹했다.
웃는데 이상할 정도로 무서웠다.
상냥한데 소름이 돋는다.
정글에 최상위 포식자인 호랑이가 있다면 설주원은 호랑이의 낯을 피해서 먹잇감을 찾는 또 다른 포식자일지도 모른다.
호랑이는 아니지만, 늑대나 승냥이.
설이현에게는 피식자이지만 자신에게는 포식자.
“집 좋다…….”
설주원의 생각을 지워 버린 영주가 창가로 걸어갔다.
이 집은 정말 미쳤다.
‘몇 평이나 될까. 300평? 400평?’
북한산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렇게 넓은 부지를 가진 저택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옛날 방식을 고수하듯이 넓은 집에서 설 회장은 그의 배다른 자식들을 모두 함께 살게 하고 있다.
악취미다.
정말 최악의 악취미다.
차라리 따로 살게 했다면 서로 얼굴을 부딪칠 일이 적겠지만 한집에 사는 이상 아침 식사와 저녁 식사는 항상 함께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의 배다른 자식들은 자신들의 처지를 계속 곱씹어야 할지도 모른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느 정도의 바닥에 살고 있는지, 자신들의 위에 누가 존재하는지 그것을 매일 매일 자각해야만 할 거다.
강제로 말이다.
[경쟁자들을 제거해 버려.]
엄마의 방식 또한 예전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쟁자들.
예전의 엄마는 그렇게 원하는 것을 손에 넣었다고 했다.
설 회장의 주위에 있는 다른 여자들을 제거하고 지금의 자리를 손에 넣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이 집으로 자신을 들여보내며 엄마는 자기가 했던 방식을 답습하라고 강요했었다.
엄마가 말하는 경쟁자들은 설 회장의 배다른 자식들이다.
설이현을 제외한 다른 자식들.
전부는 제거하지 못해도 한 명이라도 더 제거하면 유산을 물려받을 확률이 더 높아진다는 것이 엄마의 계산이다.
하지만 오늘 영주는 엄마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 확실하게 깨달았다.
아무리 경쟁자들을 제거해도, 설 회장의 저 열 명의 자식들을 전부 처리해도 자신에게 유산이 돌아올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것을 오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소름 끼치도록 확실하게 깨달았다.
결국 엄마는 헛물을 켜고 있다.
자신 역시 헛물을 들이켜고 있었다.
그걸 이 집에 들어와서 설 회장과 설이현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미 발을 들여놓은 다음에 깨달아 버렸다.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그러나 발을 들여놓은 이상 마음대로 벗어날 수도 없다.
파리 끈끈이에 걸려든 파리처럼, 여기서 벗어나는 것 역시 포식자의 관대한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죽은 듯이 있다가 설 회장이 죽으면 선처를 바라는 수밖에 없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없는 사람처럼 그렇게 있으면 차라리 눈 밖에 나지 않을 수는 있으니 말이다.
자신이 무해한 벌레라는 것을 알게 하면 설이현도 자신에게 무관심이라는 관대함을 베풀어 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약간의 적선은 해 주지 않을까.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
잠에서 깬 영주가 제일 먼저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2시.
낯선 곳에서의 첫날이라 잠을 설쳤었다.
잠이 오지 않아 몇 번이나 몸을 뒤척이다 겨우 잠들었나 싶었는데 새벽 2시에 깨 버렸다.
이 집은 상상 이상으로 조용하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데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발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시끄러운 것도 잠을 설치게 하는 요인이지만 너무 고요해도 사람은 쉽게 잠들 수가 없다는 것을 영주는 오늘 처음 알았다.
‘목말라…….’
물은 아래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첫날부터 밤에 돌아다닌다는 인상은 주기 싫은데…….’
참을까.
잠시 고민한 끝에 영주가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저녁에 먹었던 밥이 제대로 소화가 되지 않아 가슴도 답답했다.
다행히 가방에 챙겨 온 두통약이 있다.
약을 먹기 위해서라도 물은 필요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바닥은 발소리 정도는 전부 집어삼켰다.
누가 뛰어다녀도 이 정도는 소리도 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슬리퍼까지 신었으니 발소리가 날 리가 만무하다.
계단을 내려가던 영주가 발을 멈췄다.
손에 두통약 두 알을 쥔 채로 계단에 멈춰 선 영주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벽에 붙어 있는 그림이었다.
‘모작일까…….’
저녁에는 벽을 볼 정신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이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이런 그림이 걸려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에곤 실레의 [빨래가 널린 집].
‘모작이겠지.’
엄마의 갤러리에 있는 미술품들은 전부 진품들이다.
그러나 취향은 전혀 일관적이지 않다.
취향이 아니라 돈이 되는 작품만 모아 놓았기 때문이다.
거액의 작품은 거의 엄마의 갤러리에 있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모작일 수도 있다.
400억이 넘는 작품을 이렇게 아무렇게나 벽에 걸어 놓는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으니까 말이다.
이 작품은 영주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이다.
고등학교 시절 이 그림을 보고 홀린 듯이 빠져들어 결국 큐레이터가 되고 말았다.
모작이 아닌 이 작품의 진품을 보고 싶었지만 아마 그건 실현 불가능할 것이다.
‘이 풍경을 너무 좋아했는데…….’
빨래가 널려 있는 풍경.
밝은 불이 밝혀진 창문이 있는 소박한 집들. 그리고 집과 집 사이에 널려 있는 형형색색의 빨래들.
사람 사는 풍경.
비록 사람은 한 명도 그려져 있지 않아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정겨운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선명한 그런 그림이다.
이 아늑하고 평온한 풍경을 영주는 가장 좋아한다.
영주가 그림으로 한 걸음 더 가까이 걸어갔다.
그림을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보고 있을 때였다.
“모작이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영주가 얼른 돌아섰다.
“죄, 죄, 죄송합니다!”
계단의 난간에 등을 기댄 채로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설이현이었다.
감히 시선도 맞출 수 없는 그야말로 최상위에 존재하는 포식자, 그 남자가 한 손에 담배를 끼운 채로 영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송할 것이 뭐가 있어? 보라고 걸어놓은 그림인데.”
입술은 웃고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다.
“어차피 가짜니까. 이런 곳에 걸어놓고 아무나 보라는 거지. 모작이니까 더러워져도 상관없고 누가 실수로 찢어 버려도 상관없고. 그런 거지.”
그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영주의 숨이 막혔다.
마침내 그가 곁에 서자 지독한 담배 냄새가 영주를 휘감았다.
영주는 담배 냄새가 싫다.
어려서부터 엄마가 내내 피웠던 담배의 냄새가 죽도록 싫었다.
“그런데 그거 알아?”
실이현이 담배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담배의 끝으로 그림을 꾹 눌렀다.
그림이 검게 변하며 타들어 갔다.
모작이라고 해도 이렇게 잘 만든 작품이 이 남자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지금 남자는 증명하고 있다.
“파리가 앉았던 음식을 먹을 수는 없잖아.”
그 말과 함께 이현의 손이 그림을 뿌욱 찢어 내렸다.
“오염된 그림은 쓰레기나 마찬가지지.”
“하지 마세요!”
그가 그림을 찢는 순간 영주가 그를 밀쳤다.
아마 제정신이 아니었던 게 분명하다.
그가 그림을 찢는 것을 보는 순간 정신이 나가 버린 것이 틀림없다.
있는 힘껏 밀었지만 이현은 한 발 뒤로 물러섰을 뿐이다.
예상치 못한 일을 당한 이현이 영주를 쳐다봤다.
그의 발아래는 떨어진 담배가 하얀 연기를 피워 올리며 뒹굴고 있었고 담배가 떨어지며 손등을 스쳤는지 그의 손등에는 붉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와 영주 사이에는 절반 정도 찢어진 그림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 그러니까… 이건…….”
제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영주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덜덜 떨었다.
죽은 듯이 있으려고 했다.
없는 존재처럼 지내려고 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무너져 내렸다.
“뭘 쥐고 있지?”
크게 화를 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너무 차분하고 담담해서 영주는 그게 더 무서웠다.
“손에 뭘 쥐고 있는 거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가온 이현이 꽉 쥐고 있는 영주의 손가락을 풀어 그 안에서 두통약 두 알을 찾아냈다.
그의 손이 두통약을 집어 들어도 영주는 움직일 수 없었다.
“두통약?”
약을 집어 든 이현이 그것을 영주의 입술 안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
한 알, 두 알.
그러고는 그녀의 턱을 밀어 벌어진 입술을 강제로 닫았다.
“삼켜.”
그 말에 영주가 물도 없이 알약을 삼켰다.
억지로 삼킨 두 개의 알약이 식도를 타고 힘겹게 내려갔다.
“좋은 걸 하나 가르쳐 줄까? 지금 아무도 자고 있지 않을걸?”
이현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들 자는 척하며 문밖을 엿보고 있을 거야.
내가 너를 어떻게 하는지 훔쳐보고 있는 거지.
내가 화를 내고 네가 내 앞에서 살려 달라고 빌고, 그런 걸 보고 싶어서 다들 자는 척 문밖을 엿보고 있겠지.
그리고 위안을 얻는 거야.
나는 저런 덜떨어진 년과 다르니까 저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라고 말이야.”
이현의 말처럼 정말 이 고요한 정적 속에서 보이지 않는 모두가 자신을 엿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났다.
“오늘 밤은 다들 즐거울 거야. 적어도 자기 차례는 아니니까. 당하는 것이 자기는 아니니까. 그리고 내가 너를 보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들은 안전할 거로 생각할 테니까.”
한 마디 한 마디가 오싹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목소리다.
“그러니까 그 예상대로 움직여 주면 재미가 없겠지?”
이현의 손가락이 영주의 턱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목선을 타고 내려온 손가락이 쇄골을 지나 가슴의 정점에서 멈추고 그 정점을 꾹 눌렀다.
“다리 벌려.”
순간 영주는 제 귀를 의심했다.
‘뭐라고?’
“귀먹었어?”
설이현이 바짝 다가서는 바람에 한 걸음 뒤로 물러난 영주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찢어진 그림이 등에 닿았다.
더는 물러날 곳도 없다.
“다리 벌리라고 했어. 창녀처럼.”
더는 듣고 있을 수가 없다.
“비켜 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뺨을 날려 버리고 싶지만 그건 여기서 내쫓아 달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을 꾹 참고 영주가 그를 노려봤다.
자신이 이 남자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자길 어떤 식으로 생각하든 그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줄 의무는 없다.
“내일 당장 짐 싸서 나가고 싶어?”
숨이 막혔다.
이 남자는 아마 빈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쫓는다면 내쫓을 것이다.
“이 집에 있을 수 있는 조건은 단 하나뿐이야. 내 말에 복종하는 것. 싫으면 나가야지.”
알고 있다.
이 집에 있으려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 하나라도 얻으려면 복종하며 기다려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모름지기 개란 그런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 낸 빵 부스러기는 달콤할까.
먹어보지 않아서 아직은 모른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할까?’
영주가 망설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다.
순결을 지키느니, 창녀처럼 굴 수 없다느니 하는 그런 순진한 갈등은 아니다.
이런 짓까지 해놓고도 아무것도 손에 넣지 못하게 되면 자신만 결국 바보짓을 한 것이 된다.
이런 짓도 확신이 있어야만 할 수 있다.
개처럼 굴어서 빵 부스러기를 반드시 얻어 낼 수 있다는 확신. 그 확신을 설이현은 제게 주지 못했다.
오히려 이 남자를 만나는 순간 이 남자는 절대로 개에게 빵 부스러기를 던져 주지 않는 남자라는 사실만 확인했을 뿐이다.
쓰레기통에 버릴지언정 개에게 남는 것을 주지 않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복종한다고 해서, 자존심이나 다른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복종한다고 해서 과연 제게 돌아올 것이 있을까.
엄마라면 당연히 [일단 시키는 대로 해.]라고 말했을 것이다.
머리 굴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말이다.
그럴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면 애당초 이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설 회장의 호적에 제 이름을 올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고작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생각이 달라진 것은 이 집을 지배하고 있는 설이현 때문이다.
설 회장이나 다른 배다른 자식들은 모르겠지만 설이현에게 서는 아무것도 얻어 낼 수가 없다는 것을 영주는 깨달았다.
이건 말로는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설이현을 직접 눈앞에서 보고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괴물은, 눈앞에서 직접 봐야 그 진짜 무서움을 알게 되는 것처럼.
시키는 대로 다 해도, 굴욕 어린 복종을 감수해도 손에 쥘 수 있는 것이 없다면 차라리 지금이라도 발을 빼는 것이 더 현명한 노릇일지도 모른다.
“쫓겨나기 싫지? 그러려면 알아서 기어. 그게 싫으면 나가고.”
바짝 다가온 탓에 그가 말할 때마다 숨결이 영주의 얼굴에 닿았다.
두려움에 두근거리는 제 심장을 아마 이 남자도 고스란히 느끼고 있지 않을까.
그 정도로 그와 그녀 사이에는 간격이 없다.
그리고 그의 손은 영주의 허리에 닿아 있다.
그녀가 복종의 의미로 다리를 벌리면 곧장 아래로 내려올 것처럼.
“여기서 나갈게요.”
“고작 반나절 만에 항복할 정도의 각오였다면, 어차피 여기서는 못 버텨. 내게 감사해야 할 거야.”
감사? 감사라고?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다.
고작 한밤중에 물을 마시러 나왔다가 이런 봉변을 당하고 이런 말을 들어야 한다는 것이 기가 차지만 지금 영주는 다른 걱정을 해야 한다.
[하루 만에 쫓겨나?! 아니 하루 만에 네 발로 나와?! 네가 정신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널 그 호적에 넣으려고 내가 얼마나 애를 썼는데 너는 고작 버티는 것도 못해?!]
제게 소리치며 저주에 가까운 욕설을 퍼부을 엄마를 상상하기만 해도 벌써 머리가 아파져 온다.
조금 전에 알약을 두 개나 삼켰는데도, 머리가 아프다.
왜 약 기운은 돌지 않는 걸까.
이 남자 앞에서는 약조차도 말을 듣지 않는 걸까. 기가 막히게도 말이다.